“로랑이 화천으로 갔다고?” 프랑스 이름 로랑(Laurent)으로 더 익숙한 구유회 전 그랜드 하얏트 서울 호텔 식음료 담당 부장. 그가 은퇴 후 강원도 화천에서 인생 제2막을 열었다는 소식에 많은 이가 의아해했다.

구 전 부장은 ‘전설의 호텔리어’로 통한다. 입사한 지 2년 만인 1988년, 한때 장안에서 잘나간다는 이가 모두 모이는 클럽으로 명성을 떨쳤던 ‘JJ마호니스(Mahoney’s)’를 열었다. 그는 JJ마호니스를 포함, 하얏트 내 식음 매장 12곳을 총괄하기 위해 호텔에서 살다시피 했다. 2019년 은퇴할 때까지 33년 동안 매일 새벽 3시 퇴근해 아침 9시에 출근했다. 구 전 부장은 “한번은 직원들 교육을 했는데 ‘혹시 고아세요?’라고 묻는 직원이 있었다”고 했다. “집에도 안 가고 호텔에만 붙어 있으니 이상해 보였나 봐요, 하하!”

구유회 화성힐링센터장의 현재 모습(오른쪽)과 과거 그랜드 하얏트 서울 호텔 부장 시절 모습./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조선일보DB

서울 한복판 그것도 특급 호텔에서 평생을 보낸 ‘도시 남자’의 산골행이라니! 화천은 서울에서 차로 불과 2시간 거리지만, 강원도 어떤 지역보다 첩첩산중이다. 구 전 부장은 “2019년 말 처음 왔을 때 본 화천 풍광은 산과 강이 어우러져 굵고 웅장했다”고 했다. “일본 홋카이도 못잖았죠. 하지만 문화 시설이나 즐길 거리는 비교가 되지 않았어요. 내가 뭔가 기여할 수 있겠다 싶었죠.” 화천군은 구 전 부장에게 ‘화천힐링센터’ 운영을 맡겼다. 화천에서 생산하는 식재료 연구와 조리법 개발, 로컬 셰프 양성과 군민 창업 교육 등을 담당하는 연구·교육 센터다.

화천힐링센터 센터장을 맡은 지 2년. 특급 호텔 매니저의 날카로운 안목으로 찾아낸 화천의 숨은 먹거리와 볼거리가 궁금했다.

◇'한국의 헬렌 니어링’이 있는 산방환담

'산방환담' 속 ‘밭산’은 모르고 보면 그저 잡초가 무성한 수풀 같다. 하지만 알고 보면 더덕, 두릅, 곰취, 병풍취, 명이나물, 누리대, 눈개승마 등 산나물과 약초 밭이다./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구유회 센터장이 화천에서 가장 먼저 데려간 곳은 화천군 사내면 광덕리 깊은 산자락에 자리한 ‘산방환담’이다. 윤병옥(69)·조순정(62)씨 부부가 차려놓은 상은 간에 좋다는 벌나무(산청목)와 표고버섯, 당귀 잎을 넣고 끓인 토종 닭백숙, 직접 만든 모두부와 순두부, 올챙이국수, 명이·곰취 장아찌, 호박꽁다리떡 등으로 가득했다. 닭이며 나물이며 약초는 부부가 산에서 직접 기른 것이다.

구 센터장은 “조씨는 ‘한국의 헬렌 니어링’이랄 만하다”고 했다. 헬렌 니어링은 책 ‘소박한 밥상’으로 이름난 자연주의자. 경남 거창에서 태어난 조씨는 22세 때 화천에 왔다. “다들 미쳤다고 했어요. 서울에서 멀쩡한 직장 그만두고 시골 들어간다고. 그럴 만도 했죠. 다들 도회지로 나갈 때 젊은 처녀가 산골짝으로 들어왔으니. 마을 사람들한테 간첩 신고 당하기도 했어요(웃음).”

중매로 만난 남편과 결혼해 농사짓던 조씨는 ‘더 미친 일’을 결심했다. 화천에서도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기로 한 것. 2005년 그나마 평지에 있던 밭 3000여 평을 팔아 버려지다시피 한 임야를 사들였고, 돈이 모일 때마다 땅을 조금씩 사들였다. 그렇게 사들인 임야가 화천에 6만평, 인근 철원에 8만평이다. 그러곤 꿈꾸던 자연 농법을 시작했다.

‘산방환담’을 운영하는 조순정·윤병옥 부부가 직접 키운 벌나무, 표고버섯, 당귀잎을 넣고 끓인 토종 닭백숙./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부부가 지난 17년간 정성껏 가꿔온 ‘밭산’은 모르고 보면 그저 잡초가 무성한 수풀 같다. 하지만 알고 보면 더덕, 두릅, 곰취, 병풍취, 명이나물, 누리대, 눈개승마 등 산나물과 약초 밭이다. 화학 농약이나 비료는 쓰지 않는다. 그가 돌배나무 밭으로 갔다. “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으니 5년간 열매가 맺히지 않더라고요. 6년째에 돌배 예닐곱 개가 달렸고, 8년째부터 제대로 열매를 맺었죠. 나무 스스로 병충해를 이겨내는 힘을 회복한 겁니다.”

그렇게 키운 나물과 약초, 옥수수, 고추 등 농작물 70여 가지를 두레생협을 통해 유통하고, 산방환담을 찾는 이들에게 직접 팔거나 음식으로 만들어 낸다. 구 센터장은 “식당과 캠핑장, 산채 요리와 다래·산나물 채취해 맛보고 요리하기, 효소·청·잼 만들기 등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하면서 이른바 6차 산업화의 롤모델이 되고 있다”고 했다. 잘 가꿔진 오솔길을 따라 텐트를 치고 캠핑할 수 있는 데크(1박 3만원) 12개가 마련돼 있다. 식사 한 상 12만원. 체험 프로그램은 1인당 5만원으로 5명 이상 진행된다. 산방환담 010-5210-2087, sanbanghd.modoo.at

◇화천 산 까맹이 토마토 먹어봤어요?

화천 용담농원에서 도입한 신품종 ‘까맹이 토마토’./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화천은 국내 아스파라거스 주요 산지다. 구 센터장은 “다른 지역보다 기온이 낮아 육질이 단단하고 선도가 오래간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했다. 그가 데려간 ‘햇살부부농원’ 하우스 안에서는 싱그러운 연둣빛 아스파라거스가 죽순처럼 땅에서 쑥쑥 올라오고 있었다. 농원 대표 석창욱씨는 “아스파라거스는 3~4월에 수확하고 5~6월 휴식기를 가졌다가 7~9월 다시 수확한다”며 “그 외 기간에 판매하는 아스파라거스는 대부분 외국산”이라고 했다.

농장에 연락하면 아스파라거스를 집에서 바로 받을 수 있다. 석 대표는 “대형 마트나 온라인 쇼핑보다 훨씬 싸진 않지만, 마트나 온라인 쇼핑이 수확 후 2.5~3일 지나 받는 반면 우리 것은 하루 뒤 받을 수 있어 선도가 훨씬 좋다”고 했다. 구 센터장은 “‘아스파라거스 진액’이 해장에 그만”이라며 강추했다. 아스파라거스 밑동을 끓인 진액은 콩나물 냉국을 농축한 맛이었다. 아스파라거스 가격은 15일 현재 1kg당 2만원, 진액은 30봉에 2만5000원이다. 햇살부부농원 010-6257-2631

화천은 국내 아스파라거스 주산지 중 하나. ‘햇살부부농원’ 석창욱 대표가 시장에 내놓기 위해 다듬고 다발로 묶은 아스파라거스를 들어 보이고 있다./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화천은 코로나 이전까지 매년 8월 축제가 열렸을 만큼 토마토 생산량이 많다. 구 센터장은 “‘까맹이 토마토’ 먹어봤냐”며 ‘용담농원’으로 끌고 갔다. 거대한 하우스 안이 온통 토마토 밭인데 죄다 검붉었다. 정길영 대표는 “스페인에서 개발된 신품종”이라며 “일반 토마토 대비 리코펜은 3배, 카로틴은 2배 높은 데다 식감도 아삭해서 소비자들이 선호한다”고 했다. 구 센터장은 “생으로 먹어도 맛있고 삼겹살 구울 때 곁에 살짝 익혀도 별미”라며 입맛 다셨다. 1kg당 5000원. 용담농원 (033)441-7133

◇수달이 사는 곡운구곡

크고 작은 폭포와 자연스럽게 형성된 소가 별천지 같은 ‘곡운구곡’ 계곡./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곡운구곡 제8곡 ‘융의연’을 끼고 있는 ‘러브팜캠핑장’./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산 높고 골 깊은 화천에는 풍광 빼어난 계곡이 많다. 구 센터장은 곡운구곡(谷雲九曲)을 추천했다. 조용히 물가에 앉아 있으면 왜가리가 날아와 물 마시고 수달이 물고기 사냥하는 모습도 볼 수 있을 만큼 청정 자연을 그대로 간직했다.

‘러브팜캠핑장’은 곡운구곡 제8곡 ‘융의연’을 끼고 있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드리우는 짙은 그늘 아래 텐트를 치면 숲속에 머무는 듯, 계곡물 소리가 시원하다. 오토 캠핑장과 함께 펜션도 있다. 관리 사무소 옆 계곡 뷰 카페에서 저녁에 맥주 마시며 감상하는 산속 노을이 근사하다. 1989년부터 화훼 농가를 운영해온 지인학씨와 세 아들이 운영하는 곳답게, 캠핑장 곳곳에서 야생화가 자라고 뒤쪽 화훼 하우스에서 꽃과 허브도 감상할 수 있다. 010-8489-2479, 러브팜.com

◇조인성이 라면 끓여주던 ‘원천상회’

구유회 화천힐링센터장(오른쪽)이 ‘원천상회’ 주인 최승옥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원천상회는 조인성과 차태현이 라면 끓여주던 가게로 유명해졌다./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하남면사무소와 우체국 사이에 있는 ‘원천상회’는 전국구 동네 수퍼다. 지난해 2월 방영한 ‘어쩌다 사장’의 촬영지. 배우 조인성과 차태현이 손님들에게 라면 끓여주던 가게로 유명해졌다. 구 센터장은 “집 구하기 전 인근 숙박 업소에 머무는 3개월 동안 여기서 매일 아침을 먹었다”며 주인 최승옥(69)씨와 반갑게 인사했다.

“요즘은 뜸하다. 예전만큼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는 최씨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서울과 부천에서 왔다는 장년 부부 두 쌍이 가게 문을 밀고 들어왔다. 여성 둘은 “우리 아들 보러 왔지~”라며 까르르 웃더니 조인성 입간판 옆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방송 제작진이 전국을 뒤져 찾아낸 곳답게 시골 구멍가게, 딱 그 이미지다. 계산대에는 화천~춘천 시외버스 시간표가 붙었고, ‘회수권’이라고 인쇄한 종이 버스 탑승권을 팔았다.

많은 이가 침 꼴깍 삼키게 했던, 조인성의 대게 라면은 이제 없다. 가게를 혼자 운영하는 최씨가 대게로 따로 육수를 우려가며 끓이기엔 버거웠다고 한다. 대신 빨갛고 매운 ‘홍라면’과 하얗고 시원한 ‘정라면’을 각각 3500원 받고 끓여준다. 최씨가 직접 담근, 푹 익은 김치는 여전히 함께 준다. 최씨는 “방송 섭외 들어왔을 땐 할지 말지 고민했는데, 하길 잘했다”고 했다. “화천의 구멍가게에서 대한민국 모두의 구멍가게가 됐잖아요. 다들 즐거워하세요. 사라져 가는 추억 속 구멍가게를 앨범에서 꺼내 보는 기분인가 봐요.” 원천상회 (033)441-3620

◇'개산삼’으로 만든 허브차

화천힐링센터에서 작약 뿌리를 활용해 만든 반려견용 허브차 '펄펄날개.'/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화천읍에 들어서자 보기 드물게 규모 큰 건물이 눈에 띄었다. 장병들에게 필요한 온갖 물품을 파는 ‘군인 백화점’이었다. 구 센터장은 “군인과 군 가족이 화천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나다”고 했다. 화천 전통 시장도 규모가 꽤 컸다. “매월 3·8이 들어가는 날 화천 5일장까지 열리면 주차장까지 사고파는 이들로 번잡하다”고 했다.

시장에서 맨 처음 들른 곳은 ‘화영물산·산약초’(033-442-4646). 구 센터장은 “힐링센터에서 반려견을 위한 허브차 ‘펄펄날개’를 개발했는데, 주 재료인 작약 뿌리를 여기서 구했다”며 “화천에서 나는 약재를 믿고 살 수 있는 가게”라고 소개했다. 주인 김재천씨는 “작약 뿌리는 화천에서 예부터 ‘개산삼’이라 불렀다”고 했다. “곰과 싸우다 죽어가던 사냥개한테 작약 뿌리 달인 물을 한 달간 먹였더니 살아났답니다. 개한테 특효란 거죠.”

구 센터장은 작약 뿌리 향을 중화하고 찬물에도 쉽게 우러나도록 발효시켜 티백에 담았다. 그는 “로컬(local) 지혜를 바탕으로 새로운 가치를 개발해내는 것, 그게 우리 센터가 할 일”이라고 했다.

시장 맛집으로 구 센터장은 “화천 공무원들과 자주 식사하는 집”이라며 시장 입구 ‘황해식당’(033-441-1188)으로 데려갔다. 소머리곰탕(9000·1만2000원)이 대표 메뉴이지만 북어해장국(8000원)도 곰탕 못잖게 뽀얗게 진하면서 시원하고 구수했다. 구 센터장은 “황해식당 바로 옆 ‘스마일명품찰진꽈배기(033-441-0171)’는 장병들이 휴가나 외박 나왔다 귀대할 때 반드시 들러 사 가는 집”이라고 했다.

화천 밖으로도 소문 난 ‘황창두부’로 끓인 ‘섬뜰마루’의 두부전골./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시장 멀지 않은 곳에서 빨간 목재 건물이 눈에 확 들어왔다. 벽에 흰 글씨로 ‘산타클로스우체국 대한민국 본점’(033-442-9400)이라고 적혀 있었다. 산타에게 1년 365일 언제든 편지를 보낼 수 있는 우체국. 산천어로 유명한 화천군이 세계겨울축제에 참가한 인연으로 산타클로스 고장인 핀란드 로바니에미 산타우체국과 독점 계약을 맺고 2018년 문 열었다.

구 센터장은 “화천엔 춘천, 가평 등 다른 지역 식당들도 사다 쓸 만큼 이름 난 ‘황창두부’(033-441-4173)가 있다”고 소개했다. 찾아가면 한 모 2000원에 살 수 있지만, 찾아가기 불편하면 화천읍 ‘하나로마트’에서 살 수 있다. 황창두부로 끓인 두부전골(1인분 8000원)을 맛보려면 화천군 사내면 ‘섬뜰마루’(033-441-6901)로 간다. 양이 엄청 많았다. 식당 주인은 “화천 지역 특성”이라고 했다. “배고픈 기억이 있어서 그런가, 정량 맞춰 내면 내 손이 부끄러워서 못 하겠어요.” 오리 로스(2만8000·5만원)와 훈제(3만·5만5000원)도 손님들이 즐겨 찾는 메뉴다.

◇물 위를 걷는 신비한 체험 ‘숲으로 다리’

‘숲으로 다리’는 북한강에 떠 있는 길이 3.3km 부교. ‘칼의 노래’ 작가 김훈이 명명했다. 숲속 길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다리가 끝나는 구간부터 1km가량 숲길이 이어진다.

걸을 때마다 부교가 조금씩 흔들린다. 출렁이는 강 위를 걷는 기분이다. 이른 아침과 해 질 무렵 특히 물안개 피어오르는 새벽 풍광이 수려하다. 햇빛이 내리꽂히는 한낮에 걸어도 강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 더위가 순간 사라지는 쾌감을 얻을 수 있다.

숲으로 다리는 ‘산소 100리길’의 일부이기도 하다. 산소 100리길은 북한강변을 따라 42km에 걸쳐 조성됐다. 대부분 평탄해 누구나 무리 없이 완주할 수 있다. 산소 100리길 자전거 대여소(033-442-7570)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고 돌아도 좋다. 대여료 1만원을 내면 5000원짜리 상품권을 준다.

화천 '꺼먹다리'./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숲으로 다리에서 멀지 않은 ‘꺼먹다리’는 화천에서 가장 사진발 좋은 다리로 꼽힌다. 화천댐 준공과 함께 세워진 다리로, 목재로 된 상판의 부식을 막기 위해 콜타르로 칠해 색이 검다. 독특한 외관과 함께 북한강 풍광이 어우러져 영화와 드라마 단골 촬영지가 됐다. ‘거례리 사랑나무’는 북한강을 바라보고 선 수령 400년 된 느티나무. 뮤직비디오와 드라마에 등장하며 SNS에서 ‘핫플’로 떴다. 사랑나무 아래 벤치가 포토 스팟. 강물을 바라보며 멍 때리기도 알맞다. 거례리 수목공원에 있다.

“어때요, 화천 괜찮죠?” 구 센터장이 사랑나무 밑에서 활짝 웃으며 물었다. 서비스가 만족스러웠는지 궁금한 호텔리어처럼 보였다.

북한강을 바라보고 서 있는 ‘거례리 사랑나무’./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