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국민에게 ‘세계 최고 안전 대국’ 타이틀은 큰 자랑거리였다. 1988 서울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미국 등 일부 참가국은 한국 대신 일본으로 전지훈련을 갔다. 한국이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분단국가인 점을 들어 일본이 참가국들을 상대로 ‘한국 대신 치안이 좋은 일본으로 전지훈련을 오라’고 홍보했기 때문이다. 숱한 지진에도 끄떡없는 고층 빌딩과 철도는 일본 안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자부심이었던 안전 신화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기점으로 빠르게 무너졌다.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는 지난해 “일본은 안전 신화와 결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기에 지난 8일 발생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총격 사망 사건은 연이은 대형 사고로 상처 입은 일본 국민에게 ‘더 이상 일본은 안전하지 않다’는 충격을 줬다.
일본 역대 최장수 총리가 쓰러지는 장면을 지켜본 일본 국민은 부실한 경호 태세와 안전 불감증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전문 암살범도 아닌 평범한 40대 남성이 대낮에 아베 전 총리를 살해하도록 방치한 일본 경찰의 ‘프리패스’ 경호에 국민 분노가 쏠리고 있는 것. BBC, 뉴욕타임스 등 주요 해외 매체들도 ‘안전 대국이 흔들린다’며 비판하고 있다. 일본의 안전 신화는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걸까.
◇“경호의 ABC도 지켜지지 않은 엉터리”
아베 전 총리의 총격 장면을 분석한 경호 전문가들은 “요인 경호의 ABC도 지켜지지 않은 엉터리 경호”라고 입을 모았다. 일본 NHK가 공개한 당시 유세 현장 영상에 따르면 아베 전 총리는 차도 한가운데에서 연설해 사방이 뚫려 있었다. 성인 남성 팔뚝만 한 사제총을 든 범인이 아베의 7~8m 뒤로 다가갔지만 주변에 있던 3~4명의 경찰은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최종균 선문대 무도경호학부 교수는 “가장 기본적인 사주경계(사방을 확인함)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근접경호에 실패했다”며 “일본 경시청 SP(Security Police)의 경호 매뉴얼은 철통같기로 유명한데 이번에 하나도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최 교수는 “연설 장소의 사각지대가 어디인지, 수상한 물건이 설치될 가능성은 없는지 확인하는 사전 준비가 없었다”며 “요인 주변으로 누군가 다가오는지 확인하는 위협평가도 부실해 보이는 등 콘서트장 수준의 경호였다”고 설명했다.
첫 총격이 발생한 직후 일본 경찰의 안이한 대처도 논란이다. 범인이 주변 인도에서 걸어나와 처음 방아쇠를 당길 때까지 걸린 시간은 9.1초. 아베 전 총리가 놀란 듯 뒤를 돌아보고 3초 뒤 두 번째 총성이 울릴 때까지 아무런 경호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 아베는 두 번째 총격에 가슴을 맞고 쓰러졌다. 지난 3월 박근혜 전 대통령 대구 사저 앞에서 발생한 ‘소주병 테러’ 당시 경호원들이 군중에서 누군가 소주병을 투척하려고 하자 곧바로 박 전 대통령을 에워싸 보호한 것과 대조적이다. 최종균 교수는 “경호원들이 총성이 나온 뒤 바로 아베 총리를 보호했다면 중상을 입었을지언정 사망에 이를 정도까지 가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고 현장은 일본 전직 최장수 총리이자 자민당 최대 파벌을 이끄는 정치 거물의 유세장이라고 하기엔 사전 준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일본에선 선거운동을 할 때 정치인이 특수 개조한 차량의 지붕 위에 올라가 연설하기 때문에 칼과 같은 흉기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다. 높은 곳에서 주변을 감시하기도 쉽다. 하지만 아베는 이번 유세에서 도로 위 30cm 높이 연단에 서서 연설해 주변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일본 경찰도 기자회견에서 “경호, 경비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고 인정했다.
◇“우리가 알던 일본이 아니다”
아베 사망으로 충격에 휩싸인 일본에선 ‘더 이상 안전 신화는 없다’는 실망감이 터져나오고 있다. 일본 내 위기 전문가로 꼽히는 후쿠다 미쓰루 니혼대 위기관리학부 교수는 본지 인터뷰에서 “일본은 이미 치안이 좋은 나라, 안전하다는 신화가 무너졌다고 생각한다”며 “이번 범행은 ‘일본에서는 요인 암살 사건이 일어나기 어렵다’고 믿는 일본 사회와 경찰의 안일함, 용의자가 쉽게 총 재료를 손에 넣을 수 있는 환경이 있어 가능했다”고 밝혔다. 안전에 대한 과신이 새로운 유형의 테러를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본이 장기 경제 침체를 겪으면서 과거에 비해 안전에 대한 투자가 줄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창민 한국외대 일본학과 교수는 “일본 지인들 사이에서 ‘우리가 알던 일본이 아니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며 “일본이 동일본 대지진으로 한 차례 안전 신화가 붕괴됐는데 그 이후 안전 매뉴얼 업데이트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최근 후진국형 사고가 늘고 있다”고 했다.
지나치게 매뉴얼을 지키려는 ‘원칙주의’가 역설적으로 일본 사회 안전 수준을 떨어뜨린다는 비판도 나온다. 일본은 총기 규제가 강해 총으로 인한 사망 사고가 적은데, 이 때문에 경찰이 칼 공격에 초점을 맞춰 제작된 경호 매뉴얼에 따르느라 총격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일본 경시청에 따르면 일본에선 총기로 인한 사망 사고가 연 10건이 되지 않는다. 이기태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일본은 매뉴얼에 최대한 많은 대책을 넣지만 매뉴얼에 없는 돌발 변수가 생기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며 “최근 들어 조폭이 봉투에 총알을 넣어 일본 정치인을 협박하기도 하는 등 총기 안전에서 자유롭지 않은 게 드러났음에도 한 번 정한 매뉴얼에 나오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안일하게 대처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이 위원은 “지난 2005년 효고현에서 발생한 열차 탈선 사고가 대표적”이라며 “열차 도착 시간을 맞추기 위해 곡선 주로에서 무리하게 속도를 높였다가 탈선해 인근 아파트 주민이 50명 넘게 사망했는데 지나치게 원칙만 중시하다 보니 생긴 참사”라고 했다.
아베를 저격한 범인의 정체도 일본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41세 남성 야마가미 데쓰야는 2000년대 초반 해상 자위대에서 3년간 근무한 이후 이렇다 할 직장이 없었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종교단체에 재산을 기부해 가정이 파탄 났는데 이 단체에 아베가 영상 메시지를 보낸 것을 보고 범행을 결심했다고 진술했다. 장부승 관서외국어대 교수는 “지난해 도쿄 지하철에서 조커 복장을 한 남성이 칼부림을 한 사건처럼 경제적으로 어렵고 가정 파탄에 빠진 사람들이 망상에 빠져 증오 범죄를 저지르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사회 한계선에 몰린 나머지 좌절감을 어디로 분출해야 할지 몰라 살인을 저지르는 외로운 늑대(단독으로 행동하는 테러리스트)에 일본 사회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내년 G7 회의 앞두고 VIP 경호에 비상
아베 경호 실패의 책임이 있는 일본 정부도 곤혹스럽다. 국제적으로 일본의 안전 문제가 불거질 경우 올 하반기부터 재개할 예정인 외국인 관광객 입국에 차질을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년 5월에는 히로시마에서 G7 정상회의를 개최할 예정인데 이번 사건으로 VIP 경호에 구멍이 생기면서 비상이 걸렸다. 한 일본 전문가는 “일본은 당분간 주요국 정부에 일본이 여전히 안전하다는 걸 지속적으로 알리려 애쓸 것”이라고 했다.
향후 한일 관계에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이번 참의원 선거 승리로 일본을 ‘교전이 가능한 군대를 보유한 보통 국가로 전환’하는 개헌을 추진할 동력을 얻게 됐다. 개헌은 아베가 이루지 못한 숙원 사업이다.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 입장에선 껄끄러운 상황. 하지만 일각에선 일본이 현재 고물가와 엔저 문제 등 경제난이 심각하기 때문에 당장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선 무리하게 개헌을 추진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아사바 유키 교토 도시샤대학 글로벌지역문화학부 교수는 “아베 총격 사건으로 일본에선 정치인과 사이비종교 간 커넥션 문제도 심각해지고 있다”며 “총격 용의자가 범행 배경이라고 밝힌 통일교가 한국에서 생긴 종교라는 점 때문에 향후 한일 관계 정상화에 걸림돌이 될지 여부도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