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장마가 지나면 계곡은 그 어느 때보다 시원한 피서지로 변신한다. 중부 내륙, 험준한 산을 품어 심산유곡이 발달한 충북 괴산은 계곡이 넘쳐나는 곳. 일찍이 조선시대 청운의 꿈을 품고 과거를 보러 오가던 영남의 과객들이 지친 발을 담그고 쉬어 가던 명소로 유명했다. 중국 주자의 ‘무이구곡’을 흠모해 이름 붙였다는 우암 송시열의 ‘화양구곡’부터 퇴계 이황이 사랑한 ‘선유구곡(선유동 계곡)’, 단원 김홍도가 즐겨 찾았다는 ‘수옥폭포’까지 곁에 두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신선이 되는 괴산의 ‘무릉도원’을 찾았다. 물길을 가까이 두고 걷는 옛길 여행은 덤이다.
◇사극 속 ‘주연급’ 폭포
“폭우 내리는 장마 때에도 수량이 위협적으로 늘지는 않아요. 오히려 비가 어느 정도 내리고 맑은 날 찾으면 수옥폭포의 진풍경을 만날 수 있죠.”
며칠째 장맛비가 내리고 난 후인 지난 15일, 괴산군 연풍면 수옥폭포는 인근 주민들 말대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따라 맑고 깨끗한 폭포수가 우렁찬 소리를 내며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수옥폭포 관광단지’ 주차장에서 불과 3분 남짓 걸었을 뿐인데 갑자기 나타난 원시적인 풍광에 탄성이 터졌다. “가족들과 수안보 왔다가 들렀다”라는 조진호(60·용인)씨는 “인공 폭포가 아닌 이상 대개 이 정도 규모의 폭포를 보려면 깊은 산 속으로 한참 들어가야 하는데,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오기에도 부담 없었다”라며 흡족해했다. 이따금 폭포수 아래 계곡으로 ‘입수’해 버리는 아이들, 나무 그늘진 너럭바위에 대충 몸을 기대 낮잠을 청하는 노인들의 오후는 더울 틈이 없어 보였다.
괴산과 경북 문경 사이 ‘조령(鳥嶺·새재)’ 삼관문 부근에서 ‘소 조령’으로 흘러내린 계곡물이 20m 절벽을 타고 떨어지며 생긴 수옥폭포는 울창한 수풀로 둘러싸인 암반을 타고 흐른다. 그 옛날 과거를 보러 오가던 영남의 선비, 관료들이 조령을 지날 때 지친 발을 씻어주고 한숨 쉬어가게 해준 고마운 계곡물이다.
폭포 아래 거대한 솥뚜껑을 뒤집어 놓은 듯한 모양의 소(沼)는 오랜 시간 폭포수가 깎고 다듬어 조각해낸 작품이다. 수심이 깊지는 않다. 한여름엔 마치 도 닦는 듯한 자세로 소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쏟아지는 폭포수를 흠뻑 맞으며 연출 사진을 찍는 이들도 있다.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다 싶은 이곳은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을 소재로 했던 드라마 ‘바람의 화원’을 비롯해 ‘여인천하’ ‘다모’ ‘왕건’ ‘주몽’ 등 이미 수많은 사극의 배경으로 ‘열연’한 폭포다. 실제 단원은 정조의 어진을 그린 공으로 1791년부터 3년간 수옥폭포가 있는 연풍현 현감으로 지내며 수옥폭포를 자주 찾았다. 단원의 ‘모정풍류(茅亭風流)’속 배경도 ‘수옥정’과 수옥폭포일 거란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려시대 땐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피신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수옥폭포 일대는 관광단지로 조성해놓았다. 폭포를 마주하고 오른쪽 절벽을 따라 난 나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폭포를 상류에서 내려다볼 수 있다. 차로 2분 거리에 ‘숲캉스’ 명소인 조령산휴양림이, 10분 거리에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신도들이 숨어 지내던 은신처이자 순교지였던 연풍순교성지가 있다. 연풍순교성지엔 박해 당시 처형에 사용됐던 형구돌 4개가 남아있다. 연풍이 순교성지가 된 것도 조령과 관계가 깊다. 이곳 토박이인 오성인 괴산군 문화관광해설사는 “천주교 신도들을 쫓던 관아의 포졸들도 조령까지 왔다가 산이 너무 험해서 포기하고 돌아갔다”며 “연풍면은 그렇게 쫓기던 천주교 신도들이 정착해 교우촌을 형성했던 곳”이라고 했다.
◇우암 송시열 흔적 따라가는 ‘화양구곡’
괴산은 예부터 은신처, 은둔처로 유명했다. 산이 많아 속세와 거리 두기가 가능했고, 물소리에 번뇌를 씻어내기 쉬웠다. 수옥폭포가 공민왕의 피신처였다면 청천면 속리산국립공원 화양동 지구의 계곡 화양구곡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이나 거론됐다던 노론계 수장이자 대학자 우암 송시열의 은둔처였다. 우암은 효종(조선 17대) 임금을 잃은 뒤 화양동에서 학문을 닦았다. 오 해설사는 “구곡마다 절절하게 스민 옛 유학자들의 이야기와 풍류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시원한 여름 여행이 될 것”이라고 했다.
깎아내린 듯한 암벽이 마치 하늘을 떠받치는 모습이라 하여 ‘경천벽’이라 불리는 1곡부터 9곡 ‘파천(파곶)’까지 아홉 곳의 절경이 이어지는 3㎞ 구간의 구곡은 국가 명승으로 지정돼 있다. 구곡 중에서도 오 해설사가 추천하는 곳은 9곡 ‘파천’과 4곡 ‘금사담’이다. 파천은 바위가 넓게 펼쳐져 있어 신선들이 술잔을 나누었다는 곳답게 선계(仙界)의 풍경이 펼쳐진다. 오 해설사에 따르면 “1970년대에는 지역 주민들이 모여 노래자랑을 열었을 정도”로 평평하고도 넓게 펼쳐진 바위가 장관이다. 우암이 후학을 양성한 ‘암서재’ 부근 4곡 금사담은 화양구곡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맑고 깨끗한 물과 금모래가 보이는 계곡 속의 못’이라는 의미처럼 주변에 부드럽고 폭신한 모래밭이 깔려있다. 금사담 부근엔 ‘서원철폐령’이 내려지기까지 조선 후기 중앙 정치의 1번지로 여겨졌다가 훗날 중앙 정치에 지나치게 관여해 비난받기도 했던 ‘화양서원’도 있다.
동그란 구멍이 무늬처럼 새겨진 3곡 ‘읍궁암’도 재미있다. 우암의 버팀목이었던 효종이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41세 나이에 승하하자 우암이 한양을 향해 활처럼 엎드려 통곡해 흘린 눈물 때문에 생긴 구멍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옥빛 연못 같은 2곡 ‘운영담’, 천체를 관측할 수 있다 하여 이름 붙인 ‘첨성대’, 구름을 찌를 듯한 바위가 있다는 6곡 ‘능운대’ 등 암벽마다 구곡의 이름을 새긴 각자(刻字)를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 해설사는 “각자를 다 찾아보지 않고선 화양구곡을 온전히 여행했다고 할 수 없다”며 “300~400년 전에 새긴 글씨들이 마치 지난해 새겨놓은 것처럼 또렷이 남아 있는 건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암벽에 새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화양동 탐방지원센터에서 6곡인 능운대까지 하루 7회(오전 2회, 오후 5회) 무공해 전기버스를 무료 운행한다. 탐방 프로그램 등은 화양분소로 문의(043-832-4347)하면 된다. 화양구곡에서 7㎞ 거리에 퇴계 이야기가 남아있는 ‘선유구곡’이나, 현지 주민들에게 물놀이 명소로 사랑받는 ‘쌍곡구곡’, 그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갈은구곡’으로도 이어가 볼 만하다. 오 해설사는 “군자산이 중심인 85km의 충청도양반길을 걸으면 괴산의 웬만한 구곡을 둘러볼 수 있다”고 했다.
◇괴산의 젖줄 ‘괴강’과 ‘산막이옛길’
괴산의 물길을 논할 때 괴산호를 지나칠 수 없다. 1952년 남한강 지류인 ‘달천’에 괴산댐을 만들며 형성된 호수다. 괴산을 통과하는 달천을 두고 괴산 사람들은 ‘괴강’이라 부르기도 한다. 협곡 같은 괴산호는 풍광이 수려해 이를 가까이 두고 걷는 산막이옛길과 함께 괴산 여행의 백미로 꼽힌다. 산막이옛길은 칠성면 외사리 ‘사오랑 마을’에서 ‘산이 막아선 마을’이란 뜻의 산골 마을인 ‘산막이 마을’까지 이어져 있던 10리 옛길을 복원한 도보길이다. 산막이 마을 역시 조령처럼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피해 산속으로 들어갔던 피란민들이 산에 막혀 더는 가지 못하고 머무른 데서 유래했다. 산막이옛길 산책로에는 40m 절벽 위에서 한반도 지형을 감상할 수 있는 한반도 지형 전망대와 ‘연리지 나무’를 비롯해 ‘매바위’ ‘호랑이 굴’ 등 볼거리가 숨어 있다. 산, 강, 계곡, 숲을 다양하게 거치는 코스인데 한반도 지형 전망대를 오가려면 어느 정도 등산은 감수해야 한다. 더위와 힘겨루기하며 산막이옛길 전 구간 걷기가 부담스럽다면 괴산호를 유유히 오가는 유람선(5000원부터)을 이용해 일부만 거닐어볼 수도 있다.
괴산호 8경 중 5경인 연하협구름다리는 산막이옛길과 충청도양반길을 잇는 167m 구름다리. 힘들이지 않고 괴산호와 연하협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다. 산과 하늘을 비춰내는 거울 같은 호수가 기다린다. 다리 아래로 유람선이나 모터보트가 하얀 물길을 내며 오가기라도 하면 그림 같은 사진도 찍을 수 있다. 갈은계곡과도 가깝고 ‘괴산 북스테이’로 유명한 숲속작은책방이나 ‘올갱이(다슬기) 체험’을 해볼 수 있는 둔율올갱이마을이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60여년 세월 내린 청인약방도
산과 산 사이, 마을과 물길 사이 깨알 같이 숨은 여행지를 찾아다니면 괴산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칠성면 청인약방은 90여 년 전통의 불정면 목도양조장과 함께 근현대 건축 여행을 하는 이들이 일부러 찾는 곳. 약업사인 신종철(90)씨가 1958년 ‘청인약점’으로 문을 열었다. ‘청인’이란 이름은 신씨가 약방을 여는 데 도움을 줬던 청주의 양약종상과 인천병원 원장 부부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두 도시 이름을 따서 지은 것. ‘약점’에서 시작해 ‘약포’ ‘약방’으로, 시대에 따라 간판도 몇 번 바뀌었다. 약방은 신씨가 60년 넘게 운영해오다 2020년 괴산군에 기증했는데, 평소엔 닫혀 있는 경우가 많아 7월 초부터 신씨가 직접 나서 다시 문을 열었다. 신씨는 “문화재에 버금가는 역사를 지닌 공간이라 일부러 찾는 이들의 걸음을 헛되게 할 수 없어 시간이 날 때마다 나와 앉아있다”고 했다. 200여 년 된 신령스러운 느티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약방에 들어서면 1960년대 생산된 금성선풍기가 더위를 식혀준다. 약방 내부엔 신씨처럼 곱게 주름진 물건들이 전시돼 있다. 1950년부터 신씨가 직접 손으로 써왔다는 빛바랜 일기장과 장부들이 약장 한 칸을 꽉 채웠다. 6·25전쟁 당시의 미군 대포 부품을 주워다 만들었다는 재떨이도 눈에 띈다. 근현대를 아우르는 약 박물관 같다. 지금은 약을 팔진 않지만, 운이 좋으면 약방의 변천사와 약에 관한 정보를 신씨에게 직접 들을 수 있다. 차로 5분 거리 내에 있는 초원의 집도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지켜낸 ‘보물’이 있는 곳. 주인 이재옥씨가 30여 년간 하나하나 돌을 쌓아 만들었다는 ‘돌집’의 1700㎡(500평) 정원엔 한반도 지도, 태극기 등 돌 작품이 빼곡하다. 냉장고에 있는 ‘캔 음료’ 하나 사 마시면 관람료는 무료다.
초원의 집에서 나와 괴산읍 방향으로 가면 또 다른 괴강 전망대라 불리는 취묵당이 기다린다. 조선 선조 때 독서왕이라 불렸던 백곡 김득신이 지은 독서재(정자)로 충무공 김시민 장군 사당인 ‘충민사’ 산책로 뒤편에 있다. 능촌리 강 언덕에 위치해 활처럼 굽이쳐 흐르는 달천(괴강)을 내려다볼 수 있다.
괴산읍에 갔다면 괴산전통시장(산막이시장)도 들러볼 일이다. 장날(매월 3·8일로 끝나는 날)에 맞춰 찾으면 볼거리가 풍성하다. 요즘엔 제철 맞은 ‘괴산대학찰옥수수’가 한자리 차지하는 중. 인근 괴산유기농엑스포광장과 일완 홍범식 가옥 일대에선 24일까지 찰옥수수축제도 연다. 갓 쪄낸 따끈따끈한 찰옥수수 하나를 사 입에 무니 갑자기 설레기 시작했다. 옥수수가 이렇게 맛있어지는 계절은 곧 여름방학이라는 얘기니까.
[ 올갱이 해장국 먹을까? 시원한 콩국시 한그릇 할까? ]
괴산 현지인이 즐겨찾는 맛집
괴강교 주변으론 괴강의 대표 음식인 올갱이해장국과 민물매운탕을 맛볼 수 있는 식당들이 자리하고 있다. 괴강에서 잡은 쏘가리, 메기, 동자개(빠가사리) 등과 ‘둔율 올갱이 마을’ 등지에서 잡은 올갱이를 주재료로 쓰는 곳들이다. 대표 메뉴 이름을 그대로 써놓은 듯한 상호의 칠성면 괴산올갱이해장국송어회매운탕은 현지인들이 추천하는 올갱이해장국(보통 8000원, 특 1만2000원) 맛집이다. 된장으로 맛을 낸 국물에 꼬들꼬들한 올갱이, 아욱·부추·파 등을 넣은 해장국은 텁텁하지 않고 시원하고 깔끔한 맛이 난다. 예약 후 맛볼 수 있는 올갱이 전골(소 3만원, 중 4만원)은 수제비(2000원)를 추가해 먹으면 별미. 1980년에 문 연 괴산읍내 서울식당도 진한 된장으로 맛을 낸 올갱이해장국(8000원)을 찾는 이들이 많다.
괴산읍 청이랑콩이랑은 괴산군청 및 부근 관공서 직원들이 즐겨 찾는다. 괴산군의 자연 음식 브랜드 ‘산수미’ 맛집 중 한 곳으로 주인이 직접 농사지어 수확한 콩으로 두부를 만들어 요리한다. 점심엔 매콤한 양념에 낙지와 두부 등을 넣고 자작하게 끓여낸 짜낙찌개정식(9000원)이 인기지만 여름엔 서리태 콩국수(8000원) 인기도 그에 못지않다. 심심한 듯 담백한 콩국은 멋 부리지 않은 ‘시골 스타일’. ‘들기름 두부 부침’을 양념장에 찍어 곁들이면 맛있다.
화양계곡과 가까이 있는 청천면 사나이짬뽕은 줄 서는 중식당이다. 전국에 동명의 식당이 두 곳 더 있는데, 이름만 같을 뿐 체인점은 아니다. ‘부산 사나이’인 주인이 직접 요리해 내는 사나이짬뽕(1만2000원)은 한 그릇의 붉은 바다다. 돼지뼈와 각종 해산물을 우린 시뻘건 국물에 낙지 한 마리를 비롯해 주꾸미, 홍합 등 해산물이 푸짐하게 들어간다. 여기에 어묵 꼬치를 꽂아주는데 빨간 국물이 특징인 ‘부산오뎅’을 맛보는 듯하다. 건더기가 많아 건져 먹다 지칠 정도. 면까지 먹고 나면 “배 부르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짬뽕 양이 많다고 탕수육(1만8000원)을 지나치면 후회할지 모른다. “부먹(소스를 부어서 먹는)이 진리”라는 조언에 따라 소스를 흥건하게 부어 먹는 도톰한 크기의 탕수육은 고급 중식당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는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