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서초동 서울회생법원 제4별관 6호 법정. 개인회생 재판을 받으러 온 수십 명이 대기하는 가운데 재판장이 들어서고 있다.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18일 오후 1시 45분, 서초동 서울회생법원 제4별관 3층 제7호 법정 앞 복도. 양팔에 토시를 낀 배달 기사, 고무줄 바지를 허리까지 질끈 올려 입은 아주머니, 핑크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청년, AS센터 조끼를 입은 남자, 지팡이를 짚은 노인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복도를 서성거렸다. 잠시 후 법정 문이 열리자 25명이 줄지어 들어갔다.

정확히 2시가 되자 나타난 재판장이 “여기 온 분들, 다 제각기의 사연과 고민 끝에 오신 거라 생각합니다.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먼저 드리겠습니다”라며 관련 절차를 안내했다. 뒤늦게 법정을 찾은 10여 명은 선 채로 재판에 참여했다. 이들은 법원이 나눠준 ‘채무자 유의 사항’에 고개를 파묻기도 하고, 몇몇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10여 분간의 재판이 끝나자 바로 옆 제6호 법정에서 또 다른 재판이 시작됐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사람들이 밀물과 썰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이들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빚을 도저히 갚을 수 없게 된 사람들이다.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에 있는 절차에 따라 빚을 탕감받으려 법원을 찾았다. 고정적인 소득이 있으면 회생 절차를, 소득이 없으면 파산 절차를 밟는다. 대법원에 따르면 코로나 확산이 본격화된 2020∼2021년 전국 법원엔 연평균 8만3791건의 개인회생 신청, 4만9721건의 개인파산 신청이 접수됐다. 지난 6월 전국 법원에 접수된 개인회생 건수만 7234건, 개인파산 건수는 3559건이다.

재판이 끝나자 법정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1997년 IMF 외환 위기 당시엔 기업이 빚더미에 앉았다면, 이번 코로나 경제 불황으로는 개인이 빚더미에 앉았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IMF 당시에는 기본적으로 기업파산이 중심을 이루고, 개인파산은 부수적이었다”며 “코로나 장기화로 인한 타격은 자영업자·소상공인을 중심으로 한 개인파산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다르다”고 했다.

실제로 회생법원엔 코로나 사태 장기화와 고강도 사회적 거리 두기로 벼랑 끝에 내몰린 자영업자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지난해 인천에 중식집을 차렸던 30대 후반의 김씨 부부도 이날 법원을 찾았다. 거리 두기가 해제될 거란 기대감에 목 좋은 곳에 8000만원가량 빚을 내 차린 가게였다. 개업 초반만 해도 인근 직장인들과 학생들 사이에 맛집으로 소문이 났다. 그러나 거리 두기가 길어지자 개점휴업 상태가 됐고, 결국 회생법원을 찾게 됐다. 서울 광진구에서 ‘건강힐링센터’를 운영했던 70대 사장도 파산 신청을 하러 법원을 찾았다. 거리 두기가 있기 전만 해도 단골들이 많아 망할 일 없던 가게였다. 그는 “이제 다 끝났어, 오히려 홀가분해” 하며 법정을 떠났다.

중소기업 사장들도 코로나로 인한 타격을 견디지 못했다. 이날 2시 재판에 나온 이동현(62)씨는 10년 전 도산한 중소 가전제품 기업 사장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발명특허 20여 개를 내며 씩씩하게 버텨왔다. 그러나 코로나가 치명타였다. 부품 조달은 물론, 거래처가 줄도산하고, 외국인 노동자로 채웠던 직원도 구해지지 않자, 결국 연대보증을 선 아내와 함께 회생 신청을 하러 왔다.

근무 시간이 줄어들어 빚더미에 앉은 경우도 있다. 갓 대학생이 된 딸을 둔 이모(45)씨는 콜센터 상담직으로 일했는데, 코로나 여파로 주 5일 출근에서 4일 출근, 8시간 근무에서 6시간 근무로 바뀌며 소득이 급감했다. 코로나 확진까지 되자 직장에서 매년 챙겨주던 인센티브도 따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딸이 대학에 입학하며 들어가는 돈은 두 배로 늘어난 상황. 카드로 돌려막기 하며 버틴 끝에 이씨는 결국 회생법원을 찾게 됐다.

법률 상담을 돕는 대한법률구조공단.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가족 중 하나라도 실직하는 경우 다 같이 생활고에 빠져 파산 신청을 하기도 한다. 생계급여 일반 수급자에 해당하는 60대 박모씨는 3억원이 넘는 채무를 지고 있었는데, 해외 영업을 하던 자식이 코로나로 정리 해고를 당하고, 나머지 자식 둘도 월급이 깎이거나 직장을 잃어, 2년을 버틴 끝에 결국 파산 신청을 하러 왔다. 화학약품을 제조하는 회사에 다녔던 박모(55)씨는 회사가 망해 일자리를 잃은 경우. 다른 직장을 구해야 하지만, 납 중독 증세로 정상적인 근로 활동이 불가능해져 결국 파산 신청을 하게 됐다. 대한법률구조공단 서울 개인회생·파산 종합지원센터장 박진무 변호사는 “가족 중 누군가 아파서 치료비를 빚으로 내는 경우, 가족의 채무 때문에 오는 경우, 일을 하다 다쳐서 또 일을 못 하는 악순환에 빠진 분들이 법률 상담을 받으러 온다”고 했다.

가상 화폐에 투자했다가 손실을 입고 법원을 찾은 사람도 있다. 재판 시간보다 2시간이나 일찍 와서 기다리던 오모(59)씨는 작년 5월 친구가 권유했던 가상 화폐 ‘브이글로벌’에 4500만원을 빚내서 투자했다가 완전히 날려버렸다. 브이글로벌 관계자들은 투자 사기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코로나로 직장을 잃은 게 화근이었다. 오씨는 “투자 설명회에 간 내 탓”이라고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작년 6월 서울 압구정동에 있는 한 건물에서 청소일을 다시 시작해, 그나마 파산이 아닌 회생 절차를 밟게 됐다.

오씨처럼 돈을 빌려 주식이나 가상 화폐에 투자했다가 개인회생을 신청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가운데, 서울회생법원은 투자로 손실을 본 금액을 변제금에서 빼는 실무 준칙을 지난달 밝힌 바 있다. 이를 두고 ‘특혜’ ‘도덕적 해이’라는 비난이 있었지만 15년간 회생·파산 실무 업무를 대리한 한 법무사는 조심스럽다고 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회생 제도 자체가 경제적 활동이 불가능해진 사람들에게 빚을 면제해 주는 측면이 있다”면서 “세간에서는 ‘투기’라고 하지만 대출 이자를 상환하면서 하루 지내는 돈으로 버틸 기미가 보이지 않아 파생 상품이나 주식에 손을 대 수렁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백주선 한국파산변호사회 정책이사는 “회생법원이 빚을 못 갚게 된 파산자들을 상대로 부동산 같은 자산을 처리할 때 적용하던 재산 산정 방침을 코인·주식에도 적용한 것”이라며 “결국 빚더미에 오른 신용불량자들을 방치하는 것보다, 경제 시스템의 지속을 위해 이들이 빚을 조금이나마 갚아 나가거나 경제활동을 하도록 돕는 게 사회적으로 더 큰 이익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