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1983년생, 동갑내기 두 남자가 있다.
한 남자는 초등학교 때부터 성악을 했다. 부모의 기대에 맞춰 예중·예고를 갔고, 안정적 일자리를 얻기 위해 사범대를 다녔다. 이대로 졸업했으면 클래식을 전공한 음악 교사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좋아했던 건 힙합. 어릴 때부터 틈틈이 작곡하며 기회를 엿봤다.
다른 한 남자는 초등학교 때부터 춤 하나만 바라보고 직진했다. 현진영의 ‘흐린 기억 속의 그대’ 무대를 보고 춤의 매력에 빠졌고, 장기자랑에 나가 공연을 한 후 무대에 서는 재미를 알아버렸다. 그때부터 고등학교만 네 번 옮겨 가며 댄서의 길을 걸었다.
각자의 삶을 살던 둘은 어느 날 방시혁 현(現) 하이브 의장을 만났고, 이 셋이 의기투합해 만든 그룹이 방탄소년단(BTS)다. 전자는 하이브 수석 프로듀서이자 작곡가로 ‘봄날’ ‘작은 것들을 위한 시’ ‘DNA’ ‘피 땀 눈물’ 등 BTS 대부분의 히트곡을 만든 피독(강효원), 후자는 하이브 수석 안무가이자 퍼포먼스 디렉터로 ‘봄날’ ‘아이돌’ ‘피 땀 눈물’ ‘DNA’ 등 BTS 안무를 만든 손성득이다. 방시혁의 최고 측근으로, 방 의장이 BTS 아버지라면, 피독은 어머니, 손성득은 삼촌으로 불린다.
‘하이브 83즈’라고도 불리는 두 사람이 최근 다시 뭉쳤다. 하이브 자체 오디션인 ‘앤오디션-더 하울링’ 심사를 위해서다. ‘앤오디션-더 하울링’은 지난달 9일부터 하이브 레이블즈 공식 유튜브 채널과 일본 스트리밍 채널 훌루를 통해 방영 중인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데뷔가 확정된 4명의 연습생과 미확정된 11명의 연습생이 함께 펼치는 오디션이다. 방탄소년단이 챕터1의 막을 내린 지금, 이들은 앤오디션으로 방탄소년단의 후계자를 찾을 수 있을까. 최근 서울 용산구 하이브 본사에서 이들을 만났다.
독설의 시대는 갔다
하이브 본사 5층 ‘SO1’이라고 적힌 방이 피독의 작업실이다. 작업을 위한 10여 대의 키보드들과 스피커들로 가득했다. 한 흰색 키보드 위에는 “고마워! 내 형제”라고 적힌 영국 록밴드 ‘콜드플레이’ 리더 크리스 마틴의 사인이 있었다. 피독은 “가난해지면 장비 하나씩 팔면 된다”며 농담했다. 손성득이 사용하는 안무 연습실은 건물 2층에 있다.
-‘앤오디션-더하울링’은 무엇인가?
피독(이하 피): “2020년 하이브가 주최하고 CJ E&M이 기획한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아이랜드’에서 당시엔 최종 멤버로 뽑히진 못했지만 상위권에 있던 케이, 니콜라스, 의주, 타키를 새로운 보이그룹 데뷔 멤버로 확정하고 이들과 함께할 나머지 멤버들을 찾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제2의 방탄소년단을 찾는 건가?
피: “사실 넥스트 방탄소년단이라는 게 의미가 없다. 방탄소년단이 데뷔한 지 10년 가까이 흘렀다. 당시와 비교해 아이돌 시장도, 세대도, 시대도 바뀌었다.”
손성득(이하 손): “난 오디션 참가자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에게도 ‘어떤 아티스트가 돼’라는 말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기준을 주면서 ‘넌 적어도 저 정도는 돼야 해. 음반은 얼마 이상 팔려야 하고, 어떤 공연장에서 공연할 수 있어야 되고, 그 정도는 돼야 너흰 성공한 거야’라고 말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냥 이 친구들이 진정성 있게 음악을 하고, 무대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그들의 무대로 인해서 행복한 에너지가 대중과 팬들에게 잘 전달되길 바란다.”
-앤오디션에서 가장 중시하는 건?
피: “데뷔가 확정된 멤버들과의 조화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불렀을 때 가장 하모니가 좋은 멤버들을 찾는 것이다.”
손: “사실 이건 방탄소년단을 만들 때와 비슷하다. 그때도 RM이라는 데뷔가 확정된 멤버가 있었고, 다른 멤버들이 추가로 뽑히면서 그룹이 만들어졌다. 나 역시 기존 멤버들과 잘 어울릴 수 있고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사람을 오디션에서 찾는다. 재능보다는 가능성을 많이 본다.”
-가능성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나?
피: “확신이 드는 친구들이 있다. 친구인 래퍼 슬리피에게 RM을 소개받았을 때가 그랬다. 당시 RM은 겨우 고1이었는데 ‘이 나이에 이런 목소리 색깔을 가지고 있으면서, 곡도 이렇게 잘 쓴다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로 방시혁 의장에게 소개했다. ‘이 친구는 뭔가 무대에서 확실히 사람들의 눈길을 끌겠구나’라는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손: “당연히 보인다. 성격에서도, 행동하는 것에서도 보인다.”
-인성 같은 건가?
손: “그럴 수도 있고. 그런데 인성이 좋다고 가능성이 무조건 있는 건 아니다. 말투나 행동에서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매력이 묻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방탄소년단의 정국이 대표적이다. 가진 게 너무 많은 친구였는데, 초기에는 너무 어려서 노래나 춤을 잘하진 못했다. 빅히트(하이브 전신으로 BTS 소속사) 초기, 우리가 진짜 힘들었을 시기인데, 방시혁 의장은 힙합 음악을 하려면 미국을 알아야 한다고 일곱 명 중 딱 한 명만 데리고 미국 다녀오라고 하더라. 그때 난 정국을 데리고 미국을 갔다. 둘이 한 달간 민박집에 머물며 음악 스튜디오도 다니고, 미국 사람들의 문화를 경험했다. 그러고 나서 정말 잠재력이 터졌다.”
-‘앤오디션’을 봤더니 둘 다 너무 독설이 없더라.
피: “다들 기대치 이상으로 잘해서, 하하! 얼마나 고생해서 만든 무대인지 너무 잘 알고 있고, 실제로 너무 잘 준비를 해오다보니, ‘모진 소리 좀 해야겠다’ 마음먹어도 어쩔 수 없이 좋은 말이 나가더라.”
손: “독설은 진짜로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하는 거다. 독설로 트레이닝을 시키던 시대도 지났다. 이제는 이 친구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고, 왜 해야 하는지, 문제의식을 계속 던져주는 방식의 트레이닝이 필요하다. 요즘 연습생들에게는 밤샘 훈련을 시키지 않는다. 다른 연습생들과 비교해 부족하다 싶으면 스스로 하는 시스템이다. 물론 방탄소년단 때는 독설도 많이 하고, 혹독하게 연습시켰다. 방탄소년단이 그 마지막 세대가 될 것이다.”
피: “난 연습생들이 음악을 숙제처럼 할 때 혼을 낸다. 우리가 학원은 아니지 않은가? 다 자기 꿈을 향해 달리는 건데, 연습생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들이 학원 다니듯이, 숙제하듯이 하는 경우가 있다.”
-오디션 주최가 하이브 일본 본사인 하이브 재팬 산하의 레이블인데, 일본 무대에서 활동하는 건가?
피: “데뷔만 일본에서 하는 것일 뿐 공략은 전 세계다.”
손: “이제는 어디서 데뷔하는지가 상관없는 시대다. 목표는 늘 글로벌. 데뷔 확정 멤버들 중 두 명이 일본인이다 보니 일본 시장에서 데뷔하는 것뿐이다.”
달랐던 삶, 같은 곳에서 만나다
-어떻게 음악과 춤을 시작하게 됐나.
피: “초등학교 때 노래 부르면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어머니가 교육열이 좀 있었는데, 내가 공부 머리가 떨어진다는 걸 느끼고 성악도 가르치고, 플루트도 가르치고, 피아노도 가르친 후, 제일 괜찮았던 성악을 시킨 거다. 고향은 창원이다.”
손: “초등학교 때 부산 올림픽공원으로 소풍을 갔다가 형 친구들이 현진영의 ‘흐린 기억 속의 그대’를 후드티 입고 추는 걸 보고 너무 멋져 충격받았다. 그때부터 집에서 만날 가요톱텐 녹화해놓고 따라 췄다. 그러다 한번 학교 장기자랑에 나갔는데, 그때 사람들 앞에서 춤추는 즐거움을 알게 됐다. 그 후 집안 사정상 서울로 오게 되고, 프로 안무팀에 입단하게 됐다. 공식적으로 댄서라는 직업을 좀 일찍 가져서 고등학교 때도 계속 춤을 추고, 유승준, 신화, 젝스키스, 핑클 댄서 등으로 활동하다 여기까지 왔다.”
-방시혁 의장과는 어떻게 만났나.
피: “사범대 음악교육과를 다닐 때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힙합 음악이 하고 싶어, 혼자서 곡도 만들고 랩도 하며 취미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방시혁 의장이 운영하는 인터넷 작곡 카페에 가입하게 됐다. 가입하고 카페에 몇 곡 올렸는데, 그 곡을 보고 방 의장에게 연락이 왔다.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음악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그래서 대학 자퇴하고 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손: “군대 제대 후 ‘이젠 무대에 서는 것보다 누군가를 가르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즈음 같은 안무팀에 있던 동료가 방 의장을 소개해줘, 당시 연습생이던 에이트와 바나나걸을 가르치게 됐다. 빅히트 직원이 몇 명 없을 때인데, 방 의장이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난 앞으로 세계적인 뮤지션을 만들고 싶다.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더라.”
-부모님 반대는 없었나.
피: “극심했지. 힙합이 너무 하고 싶었지만, 반대하는 부모님을 설득할 명분도 없었다. 그런데 방 의장에게 내 곡을 그룹 에이트와 임정희 음반에 싣고 싶다는 말을 들은 후 부모님께 ‘이제 이 길을 가도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부모님도 방 의장의 명성은 알고 있었으니 ‘얘가 혼자서 끄적거리는 게 나름 의미가 있었구나’라면서 믿어줬다.”
손: “그 시절만 해도 춤춘다고 하면 혼날 때다. 그래서 한번은 가출을 하고, 사직운동장에서 형들과 밤새도록 춤연습을 했다. 여름밤이었는데, 중간에 누워서 하늘을 보며 쉬고 있는데 아버지가 딱 오더라. 새벽에 날 잡으러 오신 거다. 맞아 죽는구나 싶었는데, 아버지가 ‘저 밑에서 기다릴 테니 다 끝나면 내려와’ 하시더라. 그때 내 진심을 본 것 같다. 서울로 이사한 뒤에도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다. 온 가족이 단칸방에 살 때였는데 부모님에게 ‘나 진짜 이거 너무 하고 싶어. 꼭 성공할게’라고 설득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그럼 해봐. 최고가 안 돼도 좋으니깐, 최선을 다 해 부끄럽지 않는 사람이 돼. 그것만 약속해줘’라고 하셨다.”
-프로의 세계는 어떻던가?
피: “처음에는 내가 정말 잘하는 줄 착각했다. 방구석에서 혼자 하다가 방시혁이라는 유명 프로듀서에게 인정받다 보니. 그런데 막상 이 바닥에 들어와 보니깐, 정말 부족한 게 많고 아마추어더라. 그래서 일단 최대한 많이 들었다. EDM도 듣고, 하우스 음악도 듣고, 평소 안 좋아하던 장르들도 많이 들으며 스펙트럼을 넓혀 나갔다.”
-음악이 하기 싫었던 적은 없나?
피: “너무 많다. 특히 곡이 안 나올 때.”
-어떻게 극복하나?
피: “난 그냥 작업실에 앉아 나올 때까지 계속하는 스타일이다. 그러다 보면 하나 얻어 걸린다. 다른 작곡가들처럼 어느 순간 딱 영감을 받아 몇 분 만에 쓴 건 없었다. 한 곡 작업하는 데 사골 끓이듯이 오랫동안 작업한다. 한 곡 얻기 위해 평균 30~40곡을 작업한다. 가장 빨리 작업한 게 방탄소년단의 ‘불타오르네’로 한 달 정도 걸렸다.”
-춤에 대한 영감이 안 떠오를 땐?
손: “여행을 간다. 난 비워야 영감을 얻는 사람이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사소한 것에서 영감을 받는다. 그걸 체계적인 군무로 발전시킨다. 그러다 보니 완성되기까지 몇 달 정도 걸린다. 방탄소년단의 ‘DNA’가 잠도 못 자고 정말 힘들게 작업한 곡이다. 손목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동작은 혈관 주사에서 영감을 받았다.”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은?
피: “‘아이 니드 유’. 방탄소년단의 첫 지상파 1위 곡이기도 하고, 대중에게도 방탄소년단이라는 팀을 명확히 알릴 수 있었던 곡이다. 이 곡을 만들 때 심적으로도 많이 힘들었다. 생각보다 성과가 안 나오다 보니 ‘도저히 나는 이 팀을 맡아서 음악을 할 수 없겠구나’라는 고민을 많이 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첫 방송 보고 딱 ‘됐다’ 싶더라. 소름이 쫙 돋았다. 우리끼리는 막 박수 치고 그랬다.”
손: “난 데뷔곡 ‘노 모어 드림’. 그때부터 방탄소년단과 내 역사가 시작됐다.”
방탄소년단, 그 역사의 시작
-방탄소년단과 작업할 때 가장 중시한 부분은?
피: “자기가 겪고 있는 이야기들을 어떻게 잘 풀어낼 수 있는가이다. 사소한 거라도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표현해야만, 듣는 이가 공감한다. 그것을 음악적 트렌드에 뒤떨어지지 않으면서 세련되게 만드는 것에 집중한다.”
손: “춤도 마찬가지다. 그냥 멋진 안무는 좋은 안무가 아니다. 아티스트가 음악을 통해 대중에게 알리려는 메시지와 생각을 잘 전달하는 안무가 좋은 안무라고 생각한다.”
-방탄소년단은 어떻게 월드스타가 됐을까.
피: “음악을 굉장히 사랑하는 친구들이다. 투어 다닐 때도 비행기 안에서 혼자 작업하고, 호텔 방에서도 계속 작업하고 있다. 그게 누가 시킨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연차에도 본인들이 먼저 ‘이거 하고 싶다, 계속 작업하고 싶다’고 말한다. 멤버들마다 음악에 대한 욕심이 크고, 나도 자극을 받고, 결국 그런 요소들이 대중에게 진정성 있게 다가갔던 것 같다. 방 의장 역량도 크다. 멤버들이 연습생일 때부터 방 의장은 ‘자기가 겪고 있는 이야기는 스스로 풀어야 한다’는 걸 강조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우린 아직 아무것도 아니야. 뜬 것도 아니야. 더 겸손해야 하고,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해’라는 말을 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진짜 신념이었다.”
손: “매 앨범을 할 때마다 방 의장은 ‘이번에는 진짜 다 쓰러지게 만들어야 해’라며 기준치를 끌어올린다. 욕심이 정말 많다. 깐깐하고, 완벽주의자다.”
-방탄소년단이 최근 완전체 활동을 줄이고 솔로 활동을 늘리는 챕터2를 시작했다. 미리 의논했었나?
피: “작업할 때,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 이런저런 이야기는 한 적이 있다. 멤버 각자가 하고 싶은 음악 세계라는 게 분명히 있는 거니깐. 팀으로서 계속 원동력을 가지려면 개인이 중심이 돼 음악적으로도 아이덴티티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 뭉쳤을 때 더 시너지가 나는 거고. 챕터2라는 말이 거창하지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과정 아닌가 싶다.”
-솔로 활동 첫 주자가 제이홉이다.
피: “홉이가 오랜 시간 동안 혼자서 쫙 만들어서 왔다. 이번 앨범에 내가 곡을 많이 써주진 못했지만 전반적인 프로덕션이나 퀄리티 관리는 같이했다.”
-제이홉을 제외하고는 원래 춤을 안 췄던 멤버들을 데리고 고난도 춤 연습을 한 건데.
손: “독설도 많이 하며 진짜 혹독하게 연습시켰지. 그렇게 따라와준 것이 너무 고맙다. 그때 그 시절의 혹독함이 지금까지도 자극이 되고 밑바탕이 된다. 자는 시간, 노래 연습하는 시간 빼고는 다 춤연습이었다.”
-방탄소년단 전과 후, 삶이 어떻게 변했나.
피: “별로 없다. 먹는 걸 좋아하다 보니 먹고 싶은 걸 가격 고민 없이 먹을 수 있다, 그 정도? 요즘은 평양 냉면을 즐겨 먹는다. 술도 좋아하는데, 최근 코로나 때문에 주로 집에서 와인이나 위스키로 혼술을 즐긴다.”
손: “부모님이 뿌듯해하시는 정도? 물론 내가 트레이닝한 아티스트가 국내 최초로 그래미 무대에서 안무를 구현한다는 사실에 대한 뿌듯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방탄소년단을 담당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피: “코로나 시기다. 방탄소년단 음악을 만들 때는 늘 무대를 생각하고, 콘서트를 생각하고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공연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에너지가 확 떨어지더라. 처음으로 되게 우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미 수상 불발도 물론 아쉬웠지만 이미 멤버들이 아티스트로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손: “매 앨범 에너지를 쏟아붓고, 또 쏟아부었을 때. 모든 과정이 내겐 힘들었다.”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은?
피 : “앨범마다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순간순간들!”
-피독의 경우 지난해 보수(연봉·상여금·스톡옵션 포함)가 국내 대기업 오너와 CEO를 제치고 약 400억원으로 국내 최고였다. 비결은?
피: “줄을 잘 섰다? 하하! 아이돌 콘텐츠 사업이라는 게 나 하나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다. 방탄소년단 같은 좋은 아티스트가 있어야 하고, 좋은 회사와 스태프, 뮤직비디오 감독, 손성득 안무가 같은 퍼포먼스 디렉터, 각자 모든 분야에서 최고로 잘하는 사람들이 뭉쳐서 나오는 결과물이기 때문에, 난 그냥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