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밤 9시, 서울 사당역에서 저녁 약속을 마친 김대현(28)씨가 식당 문을 열고 나오자 발목까지 물이 차올랐다. 빗줄기가 더 거세지기 전에 걸어서 15분 거리 집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10분도 안 돼 빗물이 허리춤까지 차올라 헤엄치듯 빠져나가야 했다. 꼬박 1시간 ‘대장정’을 마치고서야 귀가한 김씨는 탁한 물속 보이지 않던 도로, 과자가 바스러지듯 무너져내린 아스팔트 바닥, 물에 떠내려가는 경비 초소 등 도로 상황을 친구들과 공유한 뒤 폭우 대처법을 소셜미디어(SNS)에서 검색했다.

#같은 날 밤 9시 30분, 서울 서초구 서초역에서 양재역 방향으로 운전해 퇴근하려던 이모(32)씨는 도로에 빗물이 차오른 것을 보고 당황했다. 도로 곳곳엔 침수 차량이 중앙선을 가로지른 채 멈춰 서 있었다. 부모에게 연락해 도로 CCTV 현황을 묻고, 침수되지 않은 도로와 고지대를 찾아 1시간여 우회한 끝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난 8일 쏟아진 폭우로 서울 관악구 도림천이 범람해 시민들이 물살을 헤쳐 길을 건너고 있다./뉴스1

115년 만에 처음 겪는 폭우가 중부 지역을 뒤덮었다. 지난 8일 기상청에 기록된 하루 강수량은 381.5mm, 서울 연간 강수량인 1417.9mm의 4분의 1이 단 하루 만에 쏟아진 것이다. 이례적 집중호우로 10여 명이 사망·실종됐고, 서울 강남·관악·동작구 일대가 침수됐다. 호우 대비 시설도 하루 100mm 강수량을 기준으로 설계된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속수무책일 정도의 ‘물 폭탄’이었다. 갑작스럽게 거리·도로·건물에 고립된 시민들은 이른바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각자도생’ 상황에 놓여버렸다.

이번 폭우뿐만이 아니다. 이상 기후는 어느덧 일상적 현상이 됐다. 봄에는 동해안 지역에서 대형 산불, 여름에는 폭염과 물 폭탄, 겨울에는 한파와 눈 폭탄 등 자연 재난이 사시사철 발생하고 있다. 기상청의 예측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물론, 정부의 시스템이 돌아가도 손쓸 수 없는 ‘도시 재난’이 일상을 흔들고 있다. 최악의 기상 상황을 전제하고 설계해둔 시스템조차 이상 기후 앞에선 무용지물이라, ‘무정부 상태’와 같은 대혼돈이 반복되고 있다.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시민들은 ‘각자도생법’을 찾고 서로 공유하는 중이다. 매번 늑장 작동하는 정부의 시스템만 탓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번 폭우에도 시민들은 일종의 ‘재난 자경단’으로 변신했다. 휴대폰 SNS를 중심으로 저마다 ‘슬기로운 재난 생활 팁’을 공유하며 대처법을 찾아나갔다.

지난 8~9일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는 ‘지하철침수’ ‘맨홀뚜껑’ ‘서울물난리’ ‘지하철역’ 등의 정보가 해시태그(#)를 달고 시민들에게 실시간으로 공유됐다. ‘지하철 침수 관련 종합안내’가 대표적이다. 1호선, 4호선, 7호선, 9호선, 신림선 등 각 노선에서 침수 피해를 봐 무정차로 지나가는 구간을 시민들은 실시간으로 공유했다. 폭우 상황에서 피해야 할 곳을 정리해주거나, 오염된 물에 상처가 노출됐다가 ‘조직염’에 걸려서 고생했던 경험을 들려주며 “폭우엔 샌들, 고무 장화 대신 버려도 되는 운동화를 신으라”는 요령을 공유하기도 했다. 물이 차오른 도로를 지나갈 때는 맨홀 뚜껑이 날아간 곳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몸을 의지할 수 있는 벽에 바짝 붙어서 스파이더맨처럼 이동하라는 팁이 공유됐다. 신림동 반지하의 비극적 사건을 공유하며 ‘지하 공간에서는 물이 무릎에 차오르기 전 무조건 탈출해야 한다’는 지침도 급속히 퍼져 나갔다.

침수 피해를 본 동작구 숭실대는 학생회에서 인스타그램을 통해 단과대 건물별 정전·누수·침수 상황을 정리해 공유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초 캠퍼스는 사물함에 있는 악기들이 침수됐다는 내용을 학생들이 학교 커뮤니티에 알려 ‘악기 구출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시민들 사이에선 “정부의 재난 문자가 아닌 소셜미디어를 통해 폭우 관련 정보를 알아가고 있다” “SNS를 보고 나서 뉴스를 확인한다”는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몇몇 시민은 아예 구조대로 나섰다. 배수로에 쌓여있는 쓰레기를 장갑도 없이 손으로 치워서 물길을 뚫어내 ‘의인’으로 추앙받은 중년 남성이 있는가 하면, 침수된 자동차 안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여성을 헤엄쳐서 구해 온 청년도 찬사를 받았다. 침수에 대비해 일찌감치 방수 철문을 설치한 강남의 한 빌딩은 이번에도 폭우 재앙을 피했다.

배수로에 쌓인 쓰레기를 맨손으로 치우는 사진. 온라인에선 그를 '강남역 수퍼맨'이라고 부르고 있다./온라인 커뮤니티

“더 이상 국가 시스템만으로는 도시 재난을 막을 수 없다”는 각성에 민간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도시재난연구소 우승엽 소장이 대표적이다. ‘재난 시대 생존법’이란 책을 펴내기도 한 그는 “인재(人災)는 물론, 사람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와 재난이 점점 늘어나 도처에 재난이 일상화된 ‘생존의 시대’라 개개인이 일상에서 늘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외국계 기업에 다니던 그가 정부 시스템이 마비된 상황에서 재난에 대처하는 방안을 연구하는 민간 재난 전문가의 길을 택한 이유다. 우 소장은 “가방에 작은 주머니 칼, 미니 LED 플래시, 호루라기, 휴대폰 충전기, 포도당 캔디, 반창고 등을 넣고 다니면 비상 상황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다”고 했다.

음식과 물, 보온 용품, 생존 용품 등을 보관하는 생존 배낭.

‘재난 생존 매뉴얼’ ‘생존 매뉴얼 365′ ‘SAS 서바이벌 가이드’ ‘생활 속 재난 대비 생존 매뉴얼’ 같은 재난 관련 서적도 수두룩하다. ‘생존 배낭’ 구비도 필수인 시대. 어둠 속에서 길을 밝히는 랜턴, 바깥 날씨가 험할 때 몸을 지켜주는 은박 담요, 고열량 비상식량 등이 담긴 배낭으로 가스·전기·통신 등이 끊겼을 경우에 대비한다.

국립재난연구원 방재연구실 최창원 시설연구사는 “폭우 땐 야외 활동을 피하는 게 최선”이라며 “지하 주차장, 하천 산책로, 천변에 있는 주차장, 급경사지, 옹벽 축대가 있는 붕괴 위험 지역, 저지대, 상습 침수 구역 등은 가급적 피하라”고 했다. 그는 또 “차량은 바퀴가 절반 이상 잠기면 통제력을 잃기 때문에 그 전에 이동하고, 이동 중 물살이 차오르면 창문을 깨고 탈출하거나, 바깥과 안의 물 높이 차가 줄어드는 순간에 문을 열고 탈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