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아메드에게 이네스 선생님은 평생의 은인이다. 난독증 때문에 읽지 못하던 아메드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수학도 가르쳐주었다. 아메드는 남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공부를 잘한다. 그런데 요즘은 이상하다. 이네스 선생님에게 차갑고 무뚝뚝하게 대한다. 눈을 피하고 손도 잡지 않는다. 이유를 묻자 아메드가 하는 말. “진정한 이슬람교도는 여자랑 악수 안 해요.”

다섯 살부터 너를 가르쳐준 분께 무례하게 굴지 말라고 엄마가 혼을 내도 아메드는 듣지 않는다. 오히려 엄마를 술주정뱅이라 욕하고, 평범한 벨기에 소녀처럼 입고 다니는 누나를 향해서는 더 심한 말까지 내뱉는다. 열세 살 아메드가 이슬람 극단주의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아메드는 급기야 이네스 선생님을 죽이기 위해 칼을 빼들고 덤벼든다. 벨기에의 영화감독 다르덴 형제의 2019년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소년 아메드>의 이야기다.

일러스트=유현호

아메드는 왜 이럴까? 세속화된 무슬림 가정에서 아버지 없이 자란 소년에게는 남자로서의 역할 모델이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아메드의 사촌형이 자살폭탄 테러를 저지르며 죽었다. 인근 상가에서 작은 사원을 운영하는 이맘(이슬람 종교 지도자) 유세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참된 무슬림이 되고 싶다면 이슬람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저들, 특히 여자들을 멀리하며 필요하다면 폭력을 휘둘러도 좋다고 부추기고 있었다. 이슬람 극단주의, 더 나아가 모든 극단주의가 세력을 확장하고 방황하는 청년들을 꼬여내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극단주의(Extremism)는 넓은 개념이다. 그 자체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종류의 이념, 사상, 이데올로기는 극단화될 수 있다. 어떤 이념의 일부를 부풀린 후, ‘우리’와 맞서는 ‘적’을 설정하고,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사고방식과 행동 규범이 바로 극단주의이기 때문이다. 극단주의는 내용이 아니라 행동 방식인 셈이다.

<소년 아메드>로 돌아가 보자. 벨기에에 사는 무슬림들은 대부분 아랍어를 모른다. 이네스는 그 아이들을 위해 아랍어 동요를 가르치려 한다. 유세프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이네스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그래서다. 온전한 아랍어는 오직 코란에 적힌 아랍어뿐이며 다른 방식으로 아랍어를 배우는 것은 이슬람의 순수성을 해치는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무슬림 이민자들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사람은 유세프가 아니라 이네스일 테지만, 극단주의자들에게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우리 대 그들’의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다.

이는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일이다. 지난 정권 당시 문재인 전 대통령,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등이 부추기던 극단적인 반일주의를 떠올려 보자.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는 둥,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는 둥, ‘우리 대 그들’의 사고방식을 전제한 적개심을 부추기면서 정치적 이득을 누리고자 했다. 정작 그 반일 선동으로 인해 반도체를 비롯한 한국의 산업 영역들은 큰 피해를 보았다. 남에게 휘두르는 도끼에 제 발등을 찍히는 극단주의의 흔한 패턴이다.

반일주의 선동가들은 일본 과자를 먹고 고급 일제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이중적 행태를 보여주었다. <소년 아메드>의 선동가 유세프 역시 마찬가지다. 이네스를 향한 증오를 부추기던 유세프는 아메드가 정말 ‘사고’를 치자 발뺌하기 급급하다. 세속화된 현대 국가인 벨기에를 증오하면서도 벨기에에서 강제 추방당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극단주의자들은 민주주의와 문화적 다양성, 관용과 자유를 만끽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파괴하려 하는 것이다.

극단주의는 모든 이들에게 해롭지만 특히 젊은 남자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남자들은 사춘기와 2차 성징 이후 남성호르몬에 사로잡힌다. 몸이 커지며 힘이 세진다. 세상 모든 것을 향해 도전하고 싶고 경쟁하고 싶은 마음에 불타는 것도 그 나이대의 일. 반면 자신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전두엽은 20대 중반까지 천천히 발달한다. 세상을 ‘우리 대 그들’로 보게 만들고, 폭력성을 부추기며, 주변과 갈등할 때 박수를 쳐주는 극단주의는, 이렇듯 몸은 컸지만 마음은 어린 젊은 남자들에게 특히 위험하다.

지난 8월 12일, 뉴욕에서 강연을 앞두고 있던 작가 살만 루슈디가 칼을 든 괴한에게 습격당했다. 1988년 <악마의 시>를 발표하고 이란의 종교 지도자 호메이니가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지 33년 만의 일이다. 현장에서 체포된 범인의 정체는 24세의 하디 마타르. 레바논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시아파 극단주의에 동조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마타르는 본래 사교적이고 활발한 성격이었지만, 2018년 한 달 동안 레바논에 여행을 다녀오더니 성격이 변했다. 가족과 대화를 끊고 지하실에 틀어박혔다. 왜 자신에게 이슬람 교육을 시키지 않았느냐고 부모님에게 따지고 덤볐다. 소수자로서 겪는 소외감과 울분을 미국 사회 전반을 향한, 심지어 자신의 가족을 향한 적개심으로 승화시키면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에 소속감을 느끼고 그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마치 영화 속 아메드가 유세프의 인정을 받기 위해 어머니에게 욕을 하고 이네스 선생님에게 칼을 빼 들었듯 말이다.

다르덴 형제는 리얼리즘의 거장이다. <소년 아메드> 역시 마찬가지다. 아메드는 이네스를 향한 공격심을 꺾지 않으면서 나쁜 선택을 계속해 나간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소녀의 관심도 억지로 뿌리친다. 하지만 다르덴 형제의 시각은 냉철하면서도 따스하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만 두 번을 수상한 그들은 최악의 순간에 한 줄기 희망을 남겨둔 채 영화를 마무리 지으며 감동과 경탄을 동시에 자아낸다.

문제는 우리의 현실이다. 한국은 어느덧 다양한 문화와 배경, 종교를 가진 이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야만 하는 다민족 국가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가 먼저 그들을 환대하면 된다’는 입바른 소리나 하며 도덕적인 자위를 할 때가 아니다. 살만 루슈디의 쾌유를 기원하며, 개방적이면서도 안정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이민자들과 그 자녀들, 더 나아가 우리의 20대 청년들을 어떻게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할지, 치열한 고민을 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