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전남 신안군 지도읍 선도리에 피어난 수선화들 앞으로 노을이 지고 있다. /신안군청 페이스북

필자의 서재 시골집 구들장 밑(방고래)으로 토종벌이 날아들었다. 신기한 일이다. 토종벌과 인연은 처음이 아니다. 20년 전, 필자는 다른 곳에 살았다. 그곳에서 토종벌을 두어 통 키웠다. 한적한 서재 마당은 봄부터 가을까지 벌들의 터전이었다. 2009년 전국에 퍼진 전염병(낭충봉아부패병)으로 벌들을 잃었다.

6년 전 필자는 이전의 서재를 떠나 지금의 집으로 옮겼다. 몇 년 동안 빈집으로 묵힌 폐가였다. 건물은 보지 않고 터만 보았다. 우거진 잡초를 걷어내고 마당 모퉁이에 수선화·모란·배롱나무·참나리·파초를 심었다. 배롱꽃이 한창이던 작년 7월 하순 벌들이 날아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보니 벌들이 집 기둥 틈새를 통해 방고래에 집을 지었다. 아예 이사를 온 것이다. 그렇게 필자는 다시 벌들과 ‘동거’를 하고 있다. 왜 벌들이 이곳으로 이소(移巢)하였을까? 10여 년 전 사라진 토종벌의 후손들일까? 아니면 ‘벌 들어오면 3년 안에 논을 산다!’는 속설이 있는데, 필자가 그 선택된 행운아일까? 아니다! 결정적 이유는 봄부터 피는 꽃들이었다. 게다가 탁 트인 마당을 가진 남향집에 사람 혼자 사니, 얼마나 조용할까! 풍수상 벌의 집터로 제격이다. 꽃이 벌을 불렀다.

지난달과 이번 달 두 번에 걸쳐 전남 신안군을 답사하였다. 신안군은 한반도 남서해안의 변방이다. 무려 1004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된 군이라 교통이 지금도 불편하다. 김대중·천정배와 같은 큰 정치인의 생가와 선영이 있는 데다가 송기숙 선생의 소설 ‘암태도’의 문학적 배경인 곳이라 20년 전에 몇 번 답사를 한 적이 있다. 이번 답사는 그때와는 성격이 달랐다. 수선화로 전국적인 관광 명소가 되었다는 소문이 답사 계기였다.

30여 년 전 현복순(92세, 현재 요양원 입원) 선생이 퇴직한 남편과 함께 시댁인 선도에 내려와 살면서 ‘일’은 시작되었다. 꽃을 좋아한 현 선생은 마당에 수선화를 심었다. 수선화는 해를 거듭할수록 퍼져나갔다. 마을 곳곳에 수선화가 무더기로 꽃을 피웠다. 박우량 신안군수가 선도의 수선화를 보았다. 거기서 군수는 지자체 ‘부활’ 가능성을 보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전통 농작물인 마늘·양파 대신 수선화 식재를 제안하였다. 마늘·양파값을 보상해주는 조건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선화 파종과 수확에 참여하면 인건비를 지불한다(할머니들에게 일당 9만원). 섬 전체가 4월이면 노란 수선화가 뒤덮였다. 인구 200명의 섬에 2021년 2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갔다. 꽃만 보고 가지 않았다. 농수산물과 수선화 구근을 사가고, 민박하고, 음식을 사 먹었다. 수선화 섬의 기적을 본 이웃 마을 병풍도가 ‘화딱지가 났다’. 병풍도 주민은 맨드라미를 심기 시작하였다. 신안군이 지원하였다. 맨드라미는 8월 농한기에 파종한다. 고령화로 묵혀둔 밭에 임대료를 받으니 그것도 소득이요, 파종 작업 인건비를 버니 그것도 소득이다.

‘수선화 섬의 기적’은 우연이 아니었다. 박우량 군수는 섬마다 특정 단일 품종 꽃을 심게 하였다(一島一花). 4계절 12달 신안군을 방문하면 꽃을 볼 수 있게 하였다. 1~2월은 애기동백, 3월은 홍매화, 4월은 수선화와 튤립, 5월은 라벤더….

그리하여 신안군 온 섬이 화원이 되어가고 있다. 코로나 이전에 신안군을 찾는 관광객수가 380만이었다. 코로나 기간인 금년에만 100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갔다. 농어촌 지자체 소멸은 필연적 대세이다. 그러나 신안군은 유일한 예외가 될 것이다. 신안군은 100년 후 ‘한반도 정원’을 넘어 ‘세계의 정원’을 꿈꾼다. 꽃은 벌만을 불러오지 않는다. 사람을 불러온다. 소멸 위기의 지자체를 살려냈다. 화초 한 그루의 기적이다. 나무를 심거나 연못을 파서 살기 좋은 땅으로 만드는 전통 비보(裨補) 풍수의 지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