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귀한 손자의 첫돌을 축하드립니다. 아기 선물로 책 한 권 써서 보내니 돌상에 올려주세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로서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1894~1956)에겐 아버지 같은 맏형이 있었다. 해공보다 31세 연상인 이복 맏형 규희씨. 어린 해공에게 직접 한학을 가르쳤고, 신동이라 불리던 막냇동생 해공을 서울과 일본으로 유학 보낸 스승이기도 했다. 일본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졸업한 해공은 귀국 후 규희씨의 장손(長孫)이 태어나자 기뻐하며 아기를 위한 한문 몽학서(蒙學書)를 쓰기 시작했다. 4자 2구씩, 총 1440자(字)를 중복된 글자 없이 써내려갔고, 공들여 장정까지 마무리해 본가에 있는 형에게 보냈다.
1917년 해공 신익희가 약관이 갓 넘은 23세에 맏형 규희씨의 장손이자 자신의 종손인 창현(1916~2004)의 첫돌을 축하하며 돌잡이 선물로 쓴 책이 105년 만에 처음 공개됐다. 천자문처럼 어린아이 교재용으로 쓴 친필 서적 ‘일분몽구(一分蒙求)’다. 현승일 해공신익희기념사업회장(전 국민대 총장)은 “가보로 소중히 간직해오던 책을 지난해 4월 창현의 아들 학영씨가 기념사업회에 기증하면서 이 책의 존재가 드러났다”며 “100여 년 전의 가르침을 현재에 고스란히 전하고자 친필 영인본과 함께 이를 풀이하고 해석을 곁들인 역주서를 한데 묶어 출간했다”고 본지에 밝혔다.
◇“하루가 1440분이니 1분에 한 자씩 익혀라”
해공은 서문에 초서체로 “일분몽구는 어린아이를 가르치기 위해 지은 교재다. 책 이름을 ‘몽구’라 이른 것은 번갈아 가며 이를 익혀 스스로의 도를 이루도록 하기 위함”이라며 “1440자라는 글자 수는 하루 1440분과 서로 부합하니 이 교재를 공부하면서 이 뜻을 알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하여, 분음(分陰)을 아껴 취하도록 한 것”이라고 썼다.
책을 선물받은 주인공인 창현씨는 실제로 이 책을 교재 삼아 공부했다고 한다. 훗날 국회의장 신익희를 최측근에서 보좌하며 수석비서관으로 활약하는 인물이 바로 창현씨다. 그가 1989년 해공의 생애와 사상, 일화를 정리해 펴낸 ‘해공 신익희’에 ‘일분몽구’와 관련된 회고가 남아있다. “조부(신규희)께서는 천자문을 뗀 다음날 밤중에 책탁자 깊숙이에서 ‘일분몽구’를 꺼내어 말씀하셨다. ‘이 책은 네 첫돌 돌상에 올려 놓으라고 네 막내종조가 공들여 쓰고 정성껏 장정해서 보낸 것이다. 왜경(倭警)이 이 책을 보면 당장 압수해 갈 것이니, 빨리빨리 읽어서 떼도록 하자.’ 그래서 하루에 한 장, 32자씩 공부했다.” 창현씨는 같은 책에서 “‘일분몽구’의 전체 글자 수는 1440자로, 한 시간이 60분이고 하루가 24시간이니까 분으로 계산하면 하루 1440분이 되므로 1분에 한 자씩 익히면 하루 동안이면 익힐 수 있다는 뜻으로 책 제목을 붙인 듯했다”며 “한편으로는 1분이라도 분음을 아껴 공부하라는 뜻 같기도 했다”고 해석했다.
해제를 맡은 임동석 건국대 명예교수는 “당시 해공은 23살이었는데 약관을 겨우 넘긴 나이에 이처럼 완벽에 가깝게 중복된 글자 없이 창작했다는 것도 놀라울뿐더러, 내용 또한 풍부하면서 아동의 교양 함양을 위한 학습서로 손색이 없다. 평생 한학에 매달려 온 학자라 해도 쉽게 해낼 수 없는 경지”라며 “해공 신익희에 대한 연구뿐 아니라 우리나라 몽학서의 일면을 살펴보는 데도 귀중한 자료”라고 했다.
단정하고 힘찬 서체도 주목된다. 서문은 초서체로, 본문은 단아한 해서 안진경체로 썼다. 임 교수는 “약간 가늘고 정미(整美)한 대자(大字)로, 아이들의 습자체본(體本)으로 썼지만 서체 감상용으로도 예술의 경지에 올라있다”며 “인쇄가 아닌 자필본으로 해공의 묵취를 느낄 수 있는 자료”라고 했다.
◇“단군이 세운 나라” 우리 역사 기록해
원래 ‘몽구(蒙求)’는 중국 당나라 때 이한(李瀚)이 지은 문자교육용 교재로, 송대에 서자광(徐子光)이 주석을 달아 편찬해 오랫동안 아동 교육에 널리 활용됐다. 임 교수는 “중국의 ‘몽구’가 경사(經史·경서와 사기) 가운데 뛰어난 인물들의 언행과 고사를 소개하고 있는 데 비해, 신익희의 ‘일분몽구’는 이를 모방해 지은 것이 아니라 형식은 오히려 ‘천자문’에 가깝고 내용도 고사보다는 어린아이 눈높이에 맞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고 했다.
내용은 ‘천지초개(天地初開·하늘과 땅이 처음 열리니)’로 시작해 우주 만물, 인륜과 사회 공동체, 동양 사상을 비롯해 중국사, 한국 역사까지 담고 있다. 특히 ‘옛날 우리 조선은 단군께서 비로소 나라를 세우셨고(昔者朝鮮 檀始建國)/(중략)/그 좁은 땅에서 마치 놀이하듯, 고구려와 백제가 승패를 다투다가(尺寸似戲 句濟差勝)/신라가 강하여 그 말기에 통합하였고, 고려가 그 속루함을 이어받았다(羅彊末合 麗承俗陋)’ 등 우리 역사를 서술한 구절이 눈에 띈다. 비록 지금 나라 잃고 일제의 압제를 받고 있지만, 희고 단단한 모습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자는 메시지도 있다. ‘아름답도다, 우리나라여, 이름난 교화가 융성하고도 무성하였도다(猗歟我邦 名敎隆茂)/모두가 이어서 서로 물에 빠져들었지만, 그래도 큰 인재가 되어 홀로 독립하여 존재하여라(率普胥溺 碩果獨存)/의당 각기 삼가고 힘써, 희고 단단한 모습 그대로 곱절로 노력해야 하리라(宜各惕勉 倍加白堅).’
현승일 회장은 “처음 책을 기증받았을 때는 해공이 중국의 어느 원전을 필사했나 보다 하고 넘겨보다가 ‘단군’ ‘신라’ 등이 언급되는 구절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해공이 직접 창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피어올랐고, 여러 한문학자에게 자문한 결과, 99% 해공의 창작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며 “혹시 모를 다른 가능성 1%는 미래의 과제로서 전문가들에게 맡겨 두기로 하고 이사회 논의 끝에 ‘일분몽구’를 간행하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마지막은 면학을 당부하는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아! 너 아직 어린아이여, 외우고 익혀 싫증을 내지 말도록 하라!(嗟汝小兒 誦習毋斁)’. 그리고 끝에 ‘1917년 동짓달, 창현의 첫돌에 써서 주노라(丁巳至月, 書贈昌鉉初度)’라고 기록해 저술 날짜와 동기를 밝히고 있다. 임 교수는 “촌음을 아껴 써서 면학에 매진할 것을 간곡히 부탁한 것은 보편적 몽학서의 가치를 놓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고 덧붙였다.
◇국민대 설립한 교육자 해공
신익희는 경기도 광주에서 6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두뇌와 재주가 남달리 뛰어났다고 한다. 다섯 살 때부터 맏형 규희씨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8~9세 때에 이미 ‘시전(詩傳)’을 읽기 시작했다. 당시 규희씨의 친구인 외부대신 이도재가 집을 방문했다가 어린 해공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질문을 던졌다. “‘시(詩)’의 진풍 사마편과 소융편 두 편을 암송하고 뜻을 해석할 수 있겠는가?” 해공이 신바람 나서 두 편을 모두 외우고 뜻을 말하자 이 대신이 칭찬하며 돌아갔고, 다음 날 하인을 보내 두루마리 종이와 향내 나는 묵, 좋은 붓을 보내줬다고 한다. 글씨 또한 명필이라 동네 어른들이 그의 묵자(墨字·먹으로 쓴 글)를 받아갔다는 기록도 있다.
전문가들은 “‘일분몽구’에 우주 만물부터 동양 사상, 중국사와 한국사까지 포함하는 내용을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은 해공이 한학과 신(新)학문을 두루 섭렵해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 역사 등에 해박한 식견을 쌓아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1908년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했고, 1912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세이소쿠 영어학교를 거쳐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귀국 후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로 부임해 비교정부론, 만국공법, 재정학 등을 가르쳤다. 현 회장은 “일분몽구를 지어 종손의 돌잔치에 보낸 것이 바로 이때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시기이자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1919년)하기 2년 전이었다”고 했다.
해공은 3·1운동 당시 해외 연락 임무를 맡았고, 임시정부의 핵심 직책인 내무총장·법무총장과 의정원 부의장 등을 지냈다. 이승만의 뒤를 이어 제헌의회의 국회의장을 지냈고, 야당의 지도자가 돼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의 유력 후보자로 출마했다. 당시 민주당 후보 신익희가 내건 선거 구호가 저 유명한 ‘못살겠다 갈아보자’였다. 여당인 자유당은 “갈아봤자 별수 없다”로 맞섰지만 독재에 지친 국민들은 5월 3일 신익희의 한강 백사장 연설에 30만 명이 운집할 정도로 뜨겁게 호응했다. 그러나 이틀 뒤인 5일, 신익희는 유세를 위해 호남으로 가던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서(急逝)했다.
현 회장은 “상해 임시정부를 세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임시정부의 헌법 초안을 만든 분”이라며 “특히 교육자로서의 면모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안타깝다”고 했다. 해공은 독립 국가 건설을 위해 절실히 필요한 것이 교육이라고 믿었다. 광복 후 환국하자마자 국민대학교 설립 준비를 시작해 1946년 개교 후 초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20대에 종손의 첫돌에 몽학서를 지어 선물한 것도 인격과 품성의 도야를 중시했던 교육자로서의 일면이라는 것이다.
◇수재·전쟁·화마에도 살아남은 책
책이 흠결 하나 없이 100년 넘게 남아있기까지 여러 번 위기가 있었다. 현 회장은 “창현이 자라기도 전인 1919년 3월 초 해공은 3·1운동으로 지명수배를 받았고 그 직후 중국으로 망명했으므로 분명 생가에 대한 가택수색이 있었을 것이고, 그 후에도 독립운동가들과의 접촉 여부를 캐기 위해 집안에 대한 수색이 그치지 않았을 텐데, 그때마다 규희씨가 위기를 무사히 넘긴 것으로 추측된다”고 했다.
1925년 을축대홍수로 수재(水災)가 경기도 광주 서하리 생가를 덮쳤을 때도 사랑채만은 침수를 면했고 서고의 문집들은 피해가 없었다. 1939년 규희씨와 그 일가는 일제의 등쌀을 견디지 못하고 생가를 떠나 서울 왕십리 빈민촌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때 서하리 생가를 동네 친지들에게 맡기면서 책을 사랑채 서고에 그대로 두었는데, 친지들이 근 10년간 가옥과 서고를 온전히 지켜줬다고 한다. 6·25전쟁 때는 생가에 인민군이 밀어닥쳤다. 당시 4살이었던 신학영(신창현의 아들·76)씨의 기억에 따르면 “우리는 생가로 피란을 갔었는데 인민군들은 남한 정부 요인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어른들을 결박해 문초했지만, 다행히 서고의 고서(古書)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2002년 12월에는 신익희 생가에 화재가 났다. 당시 86세였던 창현씨가 생가에 머물고 있었다. 불은 삽시간에 본채를 삼키고 한 사람의 인명까지 앗아갔으나, 불길이 사랑채로 건너붙기 전 진화돼 서고는 무사할 수 있었다. 학영씨는 “화재로 폐허가 된 생가를 보니 불안해서 사랑채 서고의 책들을 모두 서울의 제 아파트로 옮겼다. 이후 서너 차례 이사를 할 때도 수십 상자의 책들을 제일 먼저 조심스럽게 옮기고 보관해왔다”며 “당연히 모시고 다녀야 할 선대의 유품”이라고 했다.
기념사업회는 “책의 힘들고 고달픈 유전(流傳)은 가족의 근현대사를 그대로 간직한 것”이라며 “책을 기증한 것도, 출판을 가능케 한 것도 모두 창현가(家)”라고 밝혔다. 창현씨의 둘째 사위인 지춘호 경풍약품 회장이 출판비 일체를 부담한 데 이어 “해공을 알리는 데 써달라”며 5억원을 기념사업회에 희사했다. 현승일 회장은 “105년의 시간을 건너 공개하는 ‘일분몽구’를 통해 해공 신익희의 진면목이 널리 알려지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