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 속 배경이 화제다. 엔딩 장면의 안개 자욱한 ‘이포 바다’는 지도에는 없는 영화 속 가상 공간으로 강원도 삼척 부남해변 등에서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매의 눈’을 가진 예리한 관객들 눈에 띈 공간이 또 하나 있다. 송서래(탕웨이 분)와 장해준(박해일 분)이 ‘우중 데이트’를 즐기며 서로를 알아가는 낭만적 장면의 배경이 된 곳, 전남 순천의 천년 고찰 ‘송광사’다. 영화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송광사는 때아닌 ‘헤어질 결심 촬영지 투어’ 명소로 떠올랐다. ‘헤어질 결심’뿐 아니라 순천은 OTT 드라마 ‘파친코’의 촬영지로도 주목받고 있다. 가을 문턱에 남도의 바다 도시로 떠난 이유다.
◇'헤어질 결심’ 속 그 고찰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고 여운이 쉬이 가시지 않아 친구들과 함께 찾아왔어요. 영화 속 두 주인공 서래와 해준이 데이트를 즐긴 공간들을 따라가니 감동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네요. 송광사 자체가 아름다워 가을에 다시 한번 와보고 싶어요. 영화에서처럼 비가 내리면 어떤 풍경일까 궁금하기도 하고요.”
지난 15일, 송광사를 찾은 김혜정(34·충남 아산)씨 손에는 ‘헤어질 결심’ 대본집이 들려 있었다. 김씨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는 영화 배경음악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이 흐르고 있다고 했다. 김씨뿐 아니라 송광사는 요즘 불심보다 영화에 대한 팬심으로 찾는 이가 적지 않다. 송광사 연등 스님도 “‘헤어질 결심’이 흥행하면서 영화 배경으로 나온 공간에 대한 문의가 부쩍 늘었다”고 했다.
영화 ‘헤어질 결심’은 바위산에서 떨어져 죽은 남자의 중국인 아내 송서래와 이를 수사하는 형사 장해준의 복잡 미묘한 사랑을 그린 영화다. 타살 의혹을 품은 해준은 변사자의 아내 서래를 ‘의심’하며 용의선상에 둔다. 감시에서 시작해 관찰, 관심으로 확장된 시선이 마침내 닿은 곳은 비가 내리는 고찰, 송광사였다. 두 사람은 우산을 나눠 쓰고 고찰 이곳저곳을 거닐며 진솔한 대화를 이어간다.
◇송광사 랜드마크 ‘우화각’, 전망 좋은 ‘감로탑’
순천 조계산 서쪽에 자리 잡은 참선 도량 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 선사가 창건했다.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해 16국사를 배출한 유서 깊은 절이다. 불(佛)의 통도사, 법(法)의 해인사와 함께 승(僧)의 송광사라 하여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 중 하나로 꼽힌다. 훌륭한 스님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라 하여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고도 한다.
“처음부터 좋았습니다. 날 책임진 형사가 품위 있어서”라고 서래가 해준에게 수줍은 고백을 한 장소는 송광사의 ‘우화각(羽化閣)’이다. 일주문으로 들어와 절로 들어가는 ‘무지개 다리(삼청교) 위의 집’으로, ‘우화’란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된다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을 줄인 말이다. 연등 스님에 따르면 우화각은 “송광사의 랜드마크와 같은 곳”이다. 우화각을 건너면 ‘침계루’가 나온다. 침계루는 정면 7칸, 측면 3칸의 2층 누각으로 우산을 쓰고 고색창연한 누각 아래를 다정하게 걸어가는 서래와 해준을 촬영한 곳이다. ‘종고루’에서 법고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서래와 해준은 그동안 아끼고 숨겨왔던 마음을 활짝 열고 서로 거리를 좁혀간다. 아쉽게도 종고루는 일반 탐방객은 올라가 볼 수 없어 멀찌감치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서래와 해준이 무선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 끼고 해준의 음성 녹음 파일을 들은 ‘대웅전’, 해준이 풀린 신발 끈을 묶은 ‘감로탑’ 계단까지 ‘헤어질 결심’의 촬영 코스인 공간을 둘러보다 보면 영화 속 장면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영화에선 배경으로 잠시 스쳐 지나간 곳이지만, 영화만큼이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공간도 있다. 서래가 해준의 주머니를 뒤져 립밤을 꺼내 발라주던 곳은 ‘관음전’ 뒤편이다. 관음전은 고종 황제의 51세 생일을 기념해 건립한 곳으로, 황실의 위패를 봉안하는 ‘성수전’으로 출발했다. 이후 1957년 옛 관음전을 해체하고 목조관세음보살을 옮겨 봉안하면서 관음전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여느 사찰의 관음전과 건물 구조나 구성, 내부 벽화가 다른 것도 이 때문이다. 내부엔 왕을 상징하는 용머리 조각상이 장식돼 있고 관음전 탱화 대신 파초, 소나무, 매화, 모란, 청둥오리 등 민화 같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가 부귀영화를 누리며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벽화를 배경으로 서래와 해준은 데이트를 즐긴다.
관음전 뒤편엔 보조국사 지눌의 부도가 있는 ‘순천송광사보조국사감로탑’이 있다. 부담스럽지 않은 높이의 계단을 오르면 송광사 전각의 기와들이 발아래로 겹겹이 펼쳐진다. 연등 스님은 “송광사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라고 소개했다. 감로탑을 포함해 송광사는 국보 4건, 보물 27건을 포함한 국가지정문화재 36건과 시도지정문화재 10건 등 지정문화재 46건을 보유한 곳이다. 시간이 있다면 송광사 안 숨은 보물찾기를 해보는 것도 즐겁다.
◇무소유길 걸어 불일암으로
송광사에 발걸음 했다면 법정 스님의 자취를 따라가 볼 수 있는 불일암(佛日庵)을 지나칠 수 없다. 1975년 서울살이를 정리한 법정 스님은 송광사 뒷산 불일암에 내려와 1992년 봄까지 17년간 머물렀다. 불일암은 송광사 16국사 중 제7대 자정 국사가 창건한 자정암 폐사 터를 법정 스님이 중건한 것이다. ‘무소유’ 등 법정의 주옥같은 책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대나무 숲 사이로 스님이 생전에 거닐던 ‘무소유길’을 따라 오르면 산 중턱에 단출한 암자가 나타난다. 야트막한 경사가 이어지는 길이 힘겹거나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길의 구간마다 법정 스님의 글귀가 동행한다. 암자 앞엔 스님이 생전에 가장 아꼈다는 후박나무가 마중 나온다. 후박나무 아래 스님의 사리가 안치돼 있다. ‘침묵’이란 글귀가 차지한 암자엔 새소리, 풀벌레 소리만 가득해 저절로 마음이 잔잔해진다. 다시 무소유길을 걸어 내려와 송광사 입구까지 이어지는 편백나무 길을 걷다 보면 반나절 짧은 수련을 마친 듯 정신이 맑아진다. 손에 들린 불일암 소식지에선 법정 스님의 글귀가 배웅했다. ‘더위를 원망하지 말라. 무더운 여름이 있기 때문에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오고, 그 가을바람 속에서 이삭이 여물고 과일에 단맛이 든다. 이런 계절의 순환이 없다면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제대로 삶을 누릴 수가 없다’.
◇ ‘파친코’ 촬영지도 있습니다
한국 근현대사와 4대에 걸친 자이니치(재일 동포)의 삶을 그린 드라마 ‘파친코’ 열혈 시청자에게 순천 조례동 순천 드라마 촬영장은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등용문 다리’와 ‘이코노구 천변’, 선자가 김치를 만들어 팔기 시작한 장터 등이 기다린다. 골목골목 1960~1980년대를 재현해놓은 공간은 시간 여행하기에 좋다. 주란희 문화해설사는 “이코노구 천변은 원래 1960년대 순천 읍내 천변 풍경을 재현해 놓은 곳인데, 파친코 촬영 당시엔 일본어 간판 등을 달아 감쪽같이 이코노구 거리로 변신했다”고 설명했다. 이 거리는 한효주·유연석 주연의 영화 ‘해어화’(2016년)에도 등장했다.
순천 드라마 촬영장은 군부대가 있던 자리에 2006년 SBS 드라마 ‘사랑과 야망’ 세트장이 조성되면서 개관했다. ‘파친코’뿐 아니라 ‘에덴의 동쪽’ ‘허삼관’ ‘제빵왕 김탁구’ 등 인기 드라마, 영화를 비롯해 개봉을 앞둔 류승완 감독의 영화 ‘밀수’까지 70여 편을 촬영했다. 백미는 촬영장 맨 위쪽에 있는 ‘1970년대 달동네’다.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달동네 풍경을 그대로 재현했다. 주 해설사는 “실제로 봉천동 달동네가 개발로 철거될 당시의 건축 폐기물을 그대로 가져와 꾸민 곳”이라고 했다. 담벼락 낙서 하나, 시멘트 바닥에 무심하게 찍힌 발자국 등 지금은 사라진 달동네의 사소한 흔적이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순천만 습지 등 세계유산 투어
순천은 ‘한국의 산사’ 중 하나인 선암사를 포함해 생태보전구역인 순천만 습지와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오른 낙안읍성 등 세 가지 세계유산을 보유한 도시다. 촬영지 투어 후 세계유산 투어를 이어가면 알차다.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열리는 순천만 습지와 순천만 국가정원 등을 보지 않고 순천 여행을 제대로 했다고 할 수 없다. 순천만 습지는 전남 고흥반도와 여수반도 사이에 있는 만에 있다. 우리나라 남해안에 있는 연안 습지 중 5.4㎢(160만 평)의 빽빽한 갈대밭과 22.6㎢(690만 평)의 드넓은 갯벌로 이루어진 대표 습지다. 숫자상으론 규모를 쉽사리 체감할 수 없지만, 매표소를 지나 습지에 들어서면 그 광활함이 실감 난다.
목책 탐방로를 따라 하염없이 걸으면 이름도 생소한 ‘큰볏말뚝망둥어’부터 ‘가지게’ ‘대추귀고둥’ ‘농게 새끼’를 습지 곳곳에서 마주친다. 노영미 자연생태해설사는 “불멍, 물멍도 있지만 갯벌의 생물들을 관찰하며 멍때리는 ‘갯멍’ 또한 기막히다”면서 “썰물 때에 맞춰 찾으면 더 다양한 생물들을 관찰할 수 있다”고 했다. ‘용산전망대’는 순천만 습지 전망을 감상하기 좋은 곳이다. 습지 탐방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1.3㎞, 20~30분 정도 걸어 전망대에 오르면 남해안의 바다와 섬, 순천만 습지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삘기· 갈대 군락과 함께 유려한 곡선의 ‘S 자 물길’을 볼 수 있다. 밀물보다는 썰물 때 ‘S 자 물길 곡선’이 더욱 선명하게 보여 일몰이나 일출, 썰물 때를 치밀하게 계산해 찾는 사진 동호인도 많다. 순천만 습지 입구 부근에 있는 ‘갈대 열차’와 무인 궤도 열차인 ‘스카이큐브’(유료)를 타고 순천만국가정원까지 오갈 수 있다.
◇일몰 땐 와온해변
일몰 무렵엔 와온해변으로 차를 달린다. 젊은 층 사이에서 우스개로 영화 ‘라라랜드’ 속 일몰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 해 ‘순천의 라라랜드’라 한다. 일찍이 곽재구 시인이 ‘해는 이곳에 와서 쉰다’고 한 ‘와온 바다’ 아니었던가. 솔섬 뒤 겹겹이 이어지는 산 능선을 물들이며 떨어지는 낙조를 만날 수 있다.
갈대, 철새, 낙조 어느 하나 놓치지 않는 풍경은 그림 같다. 왼쪽으론 선착장이, 오른쪽으론 갈대밭 사이 해안 탐방로가 이어진다. 바닷가엔 ‘카페 와온’ 등 와온 바다를 조망하기 좋은 공간이 생겨났다. 일몰이 시작되면 바닷가 주변에 있던 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둘, 해바라기처럼 해를 향해 선다. 태양의 따스한 온기가 펄을 물들이며 눕기 시작하면, 왜 와온(臥溫)인지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순천만에서 짱뚱어탕 한 그릇, 달밤 야시장에서 ‘와온’ 맥주 한잔]
여행지 주변 ‘순천’ 담은 맛집
‘순천만’ 하면 꼬막 요리부터 떠올리지만 한여름에 남도 사람들은 꼬막보다 짱뚱어탕을 많이 먹는다. 짱뚱어를 갈아 우거지 등을 넣고 추어탕처럼 걸쭉하게 끓여낸 짱뚱어탕은 비리지 않고 담백한 맛이 난다. 순천만습지 주변 식당에선 짱뚱어탕을 어렵지 않게 맛볼 수 있다.
강변장어는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30여 년 전통의 짱뚱어탕, 장어 맛집이다. 관광객보다 현지 단골이 대부분인 집이다. 짱뚱어탕(2인분·3만원)을 주문하면 한정식 상 못지않은 깔끔한 반찬과 함께 뚝배기에 팔팔 끓는 탕이 나온다. 제피가루 살살 뿌려 먹으면 은은한 향이 더해져 풍미가 깊어진다. 장어(1마리 3만원부터)를 곁들이면 보양식이 따로 없다.
송광사 부근에서 가성비 밥집을 찾는다면 조계산 원조 보리밥집이 유명하지만, 산 중턱까지 등산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순천드라마촬영장’ 부근 조례동 봉화식당이 만만하다. 불고기 백반(9000원)부터 생선구이·돌게장·서대회 백반(모두 1인 1만2000원·2인 이상)을 주문하면 마치 새참처럼 커다란 대나무 채반에 메인 반찬과 9가지 밑반찬이 푸짐하게 담겨 나온다. 베스트셀러는 생선구이 백반. 생선은 그때그때 달라지지만 두툼한 갈치와 가자미, 삼치 등 3~4종류의 생선이 오른다.
순천 종합버스터미널 인근에 자리 잡은 풍미통닭은 1984년에 문 열어 2대째 대를 잇는 통닭집. 김치를 올려 먹는 마늘 통닭(2만원)이 이색적이다. 당일 염지한 생닭을 압력솥에 통째로 튀긴 후 다진 마늘을 듬뿍 발라 상에 올린다. 안 그래도 마늘향이 물씬 풍기는데 마늘 기름장에 찍어 먹거나 김치와 주먹밥을 곁들여 ‘치밥’ 형태로도 즐길 수 있다.
순천 동천변 저류지 부근 ‘순천만 달밤 야시장’에서는 11월까지 20여 대의 푸드트럭을 만날 수 있다. 길거리 버스킹 공연이 더해져 늦여름 밤의 운치를 느낄 수 있다. 푸드트럭 끄트머리쯤에 ‘순천 수제 맥주’로 유명한 순천 브루어리의 야시장점이 있다. ‘순천 특별시’를 비롯해 ‘와온’ ‘순천만’ ‘낙안읍성’ 등 지역 명소를 딴 맥주를 사 야외석에서 자유롭게 맛볼 수 있다. 안줏거리는 초입의 ‘룰루랄라’ 갈릭쉬림프가 꿀조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