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남자들’은 박창근과 김성주의 ‘케미’ 덕분에 탄생했다. 지난 16일 ‘바람의 남자들’ 촬영이 진행되고 있던 강원도 화천군에서 만난 박창근은 “성주가 없었다면 시작조차 못했을 프로”라고 했고, 김성주는 “창근이가 좋은 가수가 아니었다면 (프로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웃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뭉게구름 떠가는 파란 하늘, 강이 내려다보이는 너른 잔디밭, 삼삼오오 모여 앉은 사람들. 잠시간의 소란이 그친 자리에 꿈결 같은 선율이 흘렀고, 흥겨운 노래가 시작됐다.

네가 기쁠 땐 날 잊어도 좋아/ 즐거울 땐 방해할 필요가 없지/ 네가 슬픈 땐 나를 찾아와줘/ 너를 감싸안고 같이 울어줄게…’.

청량한 미성에, 사람들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어깨동무를 한 중년 부부는 리듬에 맞춰 고개를 까닥거렸고, 유모차를 끌고 온 젊은 엄마는 박수를 치며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노래가 끝나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반응이 너무 뜨겁네요. 박창근씨가 불러준 산울림의 ‘무지개’, 함께 들으셨습니다!” 노래의 주인공은 ‘국민가수’ 박창근, 그를 소개한 이는 ‘국민MC’ 김성주였다.

오래도록 변방에 머무르다 오디션 프로그램 ‘내일은 국민가수’로 벼락 스타가 된 박창근과 아나운서 출신 베테랑 방송인 김성주는 1972년생 동갑내기다. 두 사람은 현재 방송 중인 TV조선 음악쇼 ‘바람의 남자들’을 함께 하고 있다. ‘힐링 음악 여행’을 표방하는 이 프로그램에서 이들은 아름다운 풍광이 있는 곳을 다니며 길거리 공연을 한다. 사전에 촬영지를 공개하지 않는데도 매회 100명 남짓 관객이 몰려든다고 한다.

나이 빼곤 별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은 이 프로에서 함께 노래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김성주가 박창근보다 20여 일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김성주가 형이라는 얘기, 운전면허시험에서 박창근은 9수를 했고 김성주는 3수를 했다는 얘기 등을 하며 시시덕댄다. 방송에 나가진 않지만, 사뭇 속 깊은 대화도 나눈다고 한다. 서로를 “성주야” “창근아”라고 부르는 이들을 두고, 방송 관계자는 “둘 사이에 방송 콘셉트 이상의 것이 있다”고 했다.

지난 16일 강원도 화천 거례리수목공원에서 이들을 만났다. 31일(수) 밤 10시 방송 예정인 ‘바람의 남자들’ 7회분 촬영을 위한 버스킹 공연이 한창이었다. 친구들과 공원을 찾았다가 우연히 공연을 본 강모(61)씨는 박창근이 부른 ‘제비꽃’을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 “너무 좋아요. 어렵고 힘든 시기에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선물을 받은 것 같네요.”

강원도 화천에서 진행된 ‘바람의 남자들’ 버스킹 공연 모습. 김성주(무대 맨 왼쪽)는 진행자, 박창근(왼쪽에서 둘째)은 가수지만 이들은 함께 진행하며 노래한다. 박창근 오른쪽부터 가수 JK 김동욱, 김채원, 그룹 펜타곤의 진호, 키노. 이날 공연은 31일 밤 10시 TV조선에서 방송된다.

◇다르면서도 닮은, 바람의 남자들

-공연을 보면서 웃는 사람, 우는 사람도 있더라. ‘바람의 남자들’은 어떤 프로인가.

김성주(이하 김): “바람 따라 정처 없이 다니며, 발 닿는 곳에서 버스킹을 하는 프로. 공연하는 우리도 힐링되고, 보는 분들도 힐링이 되는. 촬영이 늘 기다려진다. 대본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고, 좋은 노래도 듣고!”

박창근(이하 박): “풍경이 있고, 노래가 있는 두 남자의 방랑기라고 하면 어떨까. 촬영지를 안 알려도 귀신같이 찾아오는 분이 많아 신기하기도 하다, 하하!”

두 사람은 서로가 아니었다면 ‘바람의 남자들’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가장 좋았던 순간이 언제냐고 묻자 김성주는 “창근이가 ‘하얀 비행기’를 불렀을 때”라고 답했다. 박창근이 마음이 통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 성주가 역시 이런 노래에 감동할 줄 안다니까!” 하얀 비행기는 1970년대 유년 시절을 보낸 이들이라면 공감할 만한 정서가 녹아있는 안치환의 노래. 김성주가 말을 이었다. “창근이가 이런 노래를 정말 잘한다. 사람을 몰입시키고, 감동을 주고…. 부끄럽지만, 창근이 노래를 듣고 운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박창근이란 사람이 처음 (‘국민가수’에) 나와 기타 치고 노래 부를 때, 내 마음속에선 이미 1등이었다.”

-둘이 정말 친한가. 혹시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 아닌가.

김: “방송에서 만났으니, 당연히 처음엔 비즈니스였다. 나는 진행자였고, 박창근은 방송적으론 아마추어지만 매력이 많은 출연자였다. 진행자로서 재밌는 것을 끌어내려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친해졌다. 동시대를 살아와서인지 겹치는 것도 많고. 지금은 친구가 돼 가는 중이랄까. 꾸밈도, 계산도 없는 친구라 끌렸다.”

박: “방송을 처음 하면서 ‘여기가 어디지?’ 하며 어리바리하게 있는데, 성주가 말을 걸어주고 친근하게 대해주더라. 제작진에게 ‘저 사람이 왜 나한테 잘해줄까’ 묻기도 했다. ‘친구가 돼 가는 중’이란 말이 딱 맞는다. 내 아웃사이더 기질이 없어지진 않겠지만, 성주와는 더 많이 얘기하고, 더 많이 마음을 열고 싶다.”

김: “내가 완전히 마음을 열게 된 때는 창근이 집에 갔을 때다. 창근이가 우리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노래 ‘사랑하는 이에게’를 불러주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런데 창근이도 같은 눈을 하고 있더라. 둘 다 엄하셨던 아버지 얘기를 하면서 많이 가까워졌다.”

위 사진은 ‘내일은 국민가수’ 1위 발표 직전의 모습. 왼쪽이 진행자 김성주, 오른쪽이 박창근이다. 가운데는 최종 2위를 한 김동현. 아래 사진은 박창근이 자신의 집을 방문한 김성주에게 기타를 가르쳐주는 모습. /TV조선

-서로의 첫인상은 어땠나.

박: “성주는 텔레비전을 틀기만 하면 나와서….

: “식상했어? 하하!”

: “방송국엔 이 사람밖에 없나, 했다. 스마트하고, 말을 참 잘한다고 생각했다. 겪어보니 실제로 그렇다. 카메라가 꺼져도 켜져 있을 때랑 똑같다. 흐트러짐이 없는 사람이다. 보여지는 모습 그대로라서 경계심이 풀린 것도 있다.”

김: “창근이 첫인상은 ‘방송엔 좀 안 어울릴 것 같은데?’였다. (‘국민가수’에서) 김광석의 ‘그날들’로 최단 시간 올하트를 받았는데, 별로 기뻐하지 않더라. 지나치게 겸손해서 ‘이 사람 뭐야? 연기인가?’란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은 ‘이렇게 솔직한 사람이 방송가에 있을까?’ 싶다. 방송 중에 ‘나 오줌 마려워’ 하는 사람이 어딨나, 하하!”

김성주는 박창근을 “보호해주고 싶은 친구”라고 했다. “내가 방송을 좀 더 오래하지 않았나. 혹시 창근이 주변에 나쁜 놈이 있지는 않은지 늘 살펴본다”면서. 박창근을 보면 자신이 처음 예능판에 왔을 때가 떠오른다고도 했다. “정말 우왕좌왕했는데, 도와주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정글 같은 곳에서 혼자 버텨내기가 정말 힘들었다. 창근이가 나처럼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성주는 이런 말도 했다. “창근이가 본의 아니게 받았던 오해와 편견이 있다. ‘박창근은 운동권이라서 무조건 싫다, 절대 1등 하면 안 된다’는 사람도 많았다. 나라고 편견이 없었을까. 겪어보니 창근이는 어떤 한 이념에 심취해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 그냥 노래를 좋아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위안이 되는 노래를 하고 싶다

1999년 데뷔한 박창근이 대중에게 각인된 것은 지난해 10월 7일 방송된 ‘내일은 국민가수’에서였다. 방송 말미 무대에 올라 김광석의 ‘그날들’을 부른 그에게 폭발적인 관심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가 과거 박근혜 정권 퇴진 집회 등에 참가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었다. 그로부터 두 달 반, 박창근은 ‘국민가수’의 최종 우승자가 됐다. 우승 소감은 담담했다. “제가 이 나이 먹도록 참 변변치 않다. 자존심 하나로 음악한다고, 주변을 힘들게 했다. 큰 방송에 한 번 나와서 얼굴 보여드리는 생일 선물을 (어머니에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너무 많이 온 것 같다. (1등이 된 것은) 앞으로 최선을 다해서 (사람들을) 위로해달라는 말씀인 것 같다. 저는 하여튼 죽을 때까지 노래하겠다.”

-‘국민가수’이후 달라진 것이 있나.

“알아보는 분이 많아진 것? 내가 그동안 해온 음악과 대중이 원하는 음악을 어떻게 하면 잘 섞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생겼고.”

-상금 3억원은 어디에 썼나.

“전세로 집을 옮겼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이라 매니저들이 정말 좋아한다, 하하. (기부나 후원 등) 나누고 있는 것들을 자잘하게 했고, 곧 대구 어머니댁 집수리를 할 것 같다.”

-‘박창근이 자본주의에 물들어 변했다’는 평도 있더라.

“물들 정도로 (돈을) 벌지 못했다, 하하! 뭐랄까. 나는 태생적으로 남들이 혹할 만한 게 주어지고, 진수성찬이 차려진다 해도 거기에 빠져서 즐거울 수 있는 사람이 못 되는 것 같다.”

박창근은 '인기가 많아졌으니 기쁠 것만 같다'는 말에 "감사한 마음이 크지만, 불편한 것도 있다"고 했다. "평생 갈고 닦으면서 스스로를 괴롭히면서까지 창작을 해온 많은 선배 동료들이 있는데, 내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 "(자신의) 인기에 '거품'이 있는 것도 잘 안다"고도 말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운동권’이란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데.

“‘이건 고쳐야 하지 않나요?’ ‘이건 아니지 않은가요?’라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게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상식과 동떨어진 언행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판하고, 좋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서로의 지향들을 나누는 게 운동이고 정치다. 그런데 뜻을 관철시키는 과정에서 폭력이 따르는 것엔 단호히 반대한다. 자기들만의 이념에 갇히거나, 투쟁을 위한 투쟁을 하는 것도 굉장히 싫어한다.”

‘소외된 이들, 약한 존재들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것 같다’고 하자 박창근은 “아주 단순한 얘기”라고 했다. “내가 지금 밥을 먹고 있는데,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 먹고 있다고 치자. 저 사람이 옳고 그른 것을 떠나서 ‘저 사람이 밥은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환경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생겼다. 거대하거나 별난 생각이 아니다. 많은 이가 품고 있는 평범한 생각이다.”

-노래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고 싶나.

“그렇기도 한데…. 처음엔 큰 반향을 일으키는 가수를 꿈꿨다. 그런데 내 노래를 듣고 ‘기분이 좋아진다’ ‘위로가 된다’는 사람들을 보니, 이게 내가 사회에 줄 수 있는 좋은 영향이 아닐까 생각한다. ‘창근이 노래 듣고 아픈 게 나아졌다’는 분들이 있다. 이분들을 보면, 내가 좀 힘들더라도 참고 노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애초부터 스포트라이트 받는 것엔 관심이 없었다. 이상하게 김민기, 한돌 등 ‘나만 행복한 것이 진짜 행복한 걸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노래들에 끌렸다.”

박창근의 자작곡은 300곡이 넘는다. ‘가장 소중한 노래’를 물었더니 “다 마음 줘가며 만든 것이라 답하기 어렵다”고 했다. 다만 자신이 예뻐하는 노래라며 ‘그대는 아직 소녀’라는 미발표곡을 들려줬다. 그는 이 다정한 노래에 대해 “모든 이가 할아버지·할머니가 될 때까지 동화를 잃지 않고 살면 좋겠다는 생각에 만들었다”고 했다. 동물권과 환경 문제 등을 다룬 ‘우린 어디로 가는 걸까요?’와 ‘2020 이야기’란 노래도 소개했다. “다소 불편한 이야기더라도 꺼내놓는 사람도 필요하지 않을까. 창작자에겐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게 내 신념”이라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아웃사이더의 길을 가겠다고 마음먹은 뒤부터 매 순간순간이 쉽지 않았다.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없어 힘들었고, 이건 지금도 진행 중이다. 현실적인 문제들을 맞닥뜨리기도 했다. 마흔쯤 되자 약간 징글징글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음 달에 누가 나를 불러줄까’ ‘내년엔 내가 생존이 될까’ 이런 생각들이….”

-왜 포기하지 않았나.

“나는 노래가 아닌 다른 것으로는 살 수가 없는 사람인 것 같다. 안 할 수가 없었고, 안 하게 되지 않더라. 언젠가 누군가는 내 진심을 알아봐줄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박창근은 1999년 발표한 1집 앨범 수록곡 ‘내 노래는’에 자기가 노래하는 이유가 담겨 있다고 했다. ‘내 노래는/ 긴 슬픔의 거치른 들판을 바람처럼 떠돌아/ 당신 곁으로/ 메마른 당신 가슴 속으로/ 목마른 당신 입술 속으로/ 넘어가는/ 한 모금 물로…’ . 이 노래를 속삭이듯 부르는 그는 “사람들의 해소되지 않는 갈증을 풀어주고, 그들의 삶에 작은 위안이 되고 싶다”고 했다.

-김성주와 아버지 얘기를 나누며 가까워졌다고.

“내 아버지는 그 시대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아버지셨다. 내가 중학생 때 미술에 관심을 보이니까, 아버지는 예체능은 마치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인 것처럼 펄쩍 뛰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는 고스란히 집안의 불화가 됐다. 불편한 관계가 오래 갔다. 내가 마흔 넘을 때까지 ‘이제 정신 좀 차리고,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라’고 하셨으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수발을 들었는데, 그때 화해를 한 것 같다. 제대로 거동하지도 못하면서 나를 안아보려고 하는 모습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느꼈다.”

◇스포츠와 오디션, 승부에 설렌다

2000년 MBC에 아나운서로 입사한 김성주는, 2006년 독일 월드컵 중계 캐스터로 활약하면서 전 국민적인 인기를 얻었다. 2007년 MBC를 퇴사한 뒤 현재까지 프리랜서 방송인으로 활동 중이다. 아나운서 출신 중 가장 성공한 방송인으로 꼽히는 그에 대해 ‘국민 MC 반열에 올랐다’는 평가도 나온다. 2020년 ‘내일은 미스터트롯’ 최종 우승자 발표 때 그의 진가를 봤다는 시청자가 많다. 대국민 문자투표에 770만건이 몰리면서 서버가 마비됐고, 결국 우승자를 발표하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다.

-그야말로 위기였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저 좀 살려주세요’란 말이 절로 나오더라, 하하! 20년 넘게 방송을 해오면서 터득한 것 중 하나는 위기엔 솔직한 것이 최선의 방법이란 것이다. 당시 상황을 있는 그대로 설명했고, 그래서인지 시청자들이 잘 봐주셨다.”

베테랑 방송인 김성주는 '방송을 하면서 가장 행복했을 때는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예전에 내가 했던 방송을 잘 봤다고 해주는 분들을 만날 때? 최근에 어떤 분이 ‘97~98년쯤에 김성주씨가 한 스포츠 중계를 봤다, 너무 좋았다’고 하더라. 제가 한 방송을 보고, 오랜 시간 기억해주는 분들 덕에 내 일이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인생 프로’를 꼽는다면.

“‘미스터트롯’ ‘슈퍼스타K’ 등 시청자들이 많이 사랑해주신 프로들이 다 소중하지만, ‘사과나무’라는 교양 프로를 꼽고 싶다. 방송하는 자세를 배운 프로다. 그 프로에서 말기 암환자 옥경씨를 만났다. 옥경씨 소원이 남편에게 미역국을 끓여주는 거였다. 그런데 촬영 날 옥경씨가 통증이 심해서 촬영을 못 했다. 방송을 해야 한다는 마음에 ‘그래도 어떻게 안 되실까’ 생각했다. 결국 며칠 뒤 촬영을 했고 방송이 나갔는데, 옥경씨가 2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쇼크였다. 내가 하는 방송이 ‘보여주기식’ 방송이 아닌가 회의도 들고, ‘내가 방송을 왜 하는가’란 고민을 많이 했다. 무엇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진행자가 되자는 다짐을 했다.”

-일을 너무 많이 하는 건 아닌가.

“나는 항상 방송이 우선이다. 승부가 있는 스포츠 프로나 오디션 예능 같은 것을 할 땐 전율을 느낄 정도로 설렌다. ‘이게 어떻게 이뤄질까?’ ‘어떻게 끌고 나가면 좋을까’ 상상도 하고. 이래서 일을 멈출 수 없는 것 같다.”

-2022 카타르 월드컵을 MBC에서 중계한다고.

“카타르에 한 달 동안 가는데, 모든 방송을 접고 월드컵 중계를 하러 가는 나를 이해 못 하는 분도 많다. 내게 스포츠 중계는 짜릿함이자 뿌듯함이다. ‘예능이나 하지, 왜 중계까지 하려고 욕심을 내냐’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사실 나는 스포츠 중계를 하기 위해 예능을 택했다. 예능 중에서도 스포츠와 관련된 프로를 많이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고. 나의 마지막 무대는 스포츠 중계석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곧 ‘미스터트롯2’가 시작된다. 제2의 임영웅이 나올까.

“워낙 특출한 멤버들이 시즌1에 나와서 ‘그만큼 잘하는 사람이 또 있겠어?’란 생각도 들지만, ‘슈스케’ 시즌2, 시즌3에서 어마어마한 가수들이 나왔다. 미스터트롯1을 할 때 반신반의했던 숨은 고수들이 칼을 갈고 나오지 않을까, 하하!”

◇노래에, 방송에 미친 두 사람

두 사람은 종종 비슷한 답을 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동안(童顔)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박창근은 “어머니가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잔주름이 없는데, 그걸 좀 닮았다”고 했고, 김성주도 “어머니로부터 좋은 피부를 물려받았다”고 했다. “철이 들지 않은 것 같다”는 말도 공통으로 했다. ‘일을 하면서 변하지 않은 한 가지?’란 질문엔 정확히 같은 답이 돌아왔다. “(음악·방송을 대하는)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고.

-천재형인가, 노력형인가.

김: “100% 노력형이다. 촬영 이외의 시간 대부분을 (방송) 모니터에 쏟는다. 집에 TV와 소파만 있는 작은 방이 있는데, 방송 없는 날엔 주로 그곳에 있는다고 보면 된다. 다른 MC나 캐스터의 방송을 보면서 ‘(장점을)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들까’ 계속 공부한다.”

박: “쉬는 날에도 기타 들고 노래한다. 하루에 몇 시간씩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노래를 짓고 부르고…. 대학생 때 노래패에 든 이후로 30년을 이렇게 살아왔다.”

'어렸을 때부터 재능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박창근과 김성주는 모두 "잘 모르겠다"고 답했지만, 뒤이은 답은 그들이 떡잎부터 남달랐다는 것을 방증했다. "중1 때 소풍에서 이선희의 '갈등'을 불렀는데, 친구들이 잘 부른다고 하더라. 그 이후로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무료하면 내게 노래를 시키곤 했다"(박창근) "나중에 동창들이 말하더라. '네가 우리 반 사회자였다' '축구하면 (말하느라) 목부터 쉬었잖아'라고, 하하."(김성주)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국민 가수’ ‘국민 MC’라고 불린다.

박: “국민가수라는 경연 프로그램에서 1등을 했을 뿐이지, 전혀 그런 위치가 아니다. 노래 부르는 나를 많이 좋아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

김: “모두가 인정하는 국민 MC들이 계시고, 나는 쫓아가는 입장이다. 무엇보다 성실히 하려고 노력한다. 아나운서 시절 배운 방송의 기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대중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

박: “동안 가수? 하하, 농담이다. 떠올렸을 때 엷은 미소가 지어지는 가수면 만족한다.”

김: “내가 ‘복면가왕’에서 출연자들에게 항상 묻는 마지막 질문인데, 막상 답하려니 쉽지 않다. 주어진 역할을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한 방송인으로 기억되고 싶다.”

박창근은 최근 ‘바람의 남자들’에서 김성주가 ‘숙녀에게’를 부르는 걸 보고 “기타를 가르쳐 줄 테니, 같이 공연을 다니자”고 제안했다. 김성주는 “진지하게 고민 중”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쎄시봉처럼 둘이 소박하게 다니면 좋을 것 같아요. 창근이는 노래를 하고, 나는 사회를 보면서 가끔 반주도 하고 화음도 넣고! 너무 좋은데, 지금은 창근이가 왕성하게 활동해야 할 때니까 몇 년 후쯤 해볼까봐요.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