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가 없는 청년. 게리 ‘에그시’ 언윈(태런 에저턴 분)에게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어머니와 재혼한 동네 조폭 두목 딘의 부하들과 시비가 붙었다가, 그 차를 훔쳤다가, 경찰서에 갔다. 18개월 정도는 갇혀 있어야 한다는 말에 에그시는 비장의 카드를 꺼낸다. 해리(콜린 퍼스 분)가 준 메달의 뒷면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고 키워드를 말한 것이다. ‘브로그 없는 옥스퍼드.’
경찰서에서 당장 석방되어 어리둥절한 에그시는 해리의 손에 이끌려 펍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해리는 비밀 작전 중 에그시 아버지의 희생 덕분에 목숨을 건진 사이다. 그는 아버지를 칭찬하더니 곧 아들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너는 지능지수도 높고 10세 이하 주니어 체육대회에서 두 차례나 연속 우승한 장래가 촉망받는 소년이었어. 건달 새아버지랑 산다는 게 모든 것을 포기할 이유가 되나? 해병대에 입대해서도 성적이 좋았지만 금방 그만두고 말았잖아.”
에그시는 울컥한다. “엄마가 말렸어요. 아빠처럼 총알받이로 죽을 거라면서. 아저씨처럼 잘난 샌님들은 나 같은 놈 깔볼 줄이나 알지 왜 이렇게 사는지 개뿔도 관심 없죠.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알겠어요? 나도 아저씨처럼 부잣집에서 태어났으면 훨씬 더 잘살았을 거라고요.” 매슈 본 감독의 영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의 한 장면이다.
에그시는 좋은 자질을 타고났지만 불운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해리에게 딘의 똘마니들이 시비를 건다. 해리를 동성애자 취급하는 욕설까지 내뱉는다. 그러자 해리는 차분하게 펍의 문을 잠그며 깡패들을 향해, 에그시도 들으라는 듯, 질문을 던진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s, Maketh, Man). 무슨 뜻인지 아나? 내가 가르쳐주지.”
영화의 전개가 이렇게 된 탓에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마치 누군가를 두들겨 패주기 전에 내뱉는 경고음처럼 여겨지는 듯하다. 그렇지 않다. 영국의 신학자이자 교육자였던 위컴의 윌리엄이 한 이 명언 속에는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함축되어 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가? 사람의 내면에는 악으로 향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사회적 존재인 인간을 올바로 길러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주제에 대해서는 서양철학보다 동양철학에서 더 좋은 논의를 찾아볼 수 있다. 흔히 ‘성악설’로 알려진 순자의 사상을 살펴보자. “인간의 본성은 악한데, 인간이 선하게 됨은 인위 덕분이다.” 여기서 앞부분에 주목하면 ‘성악설’이지만, 뒷부분에 무게를 둔다면 ‘적극적 교육관’으로 볼 수 있다. 순자에게 도덕이란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도덕은 사회 속에 존재하며, 사회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산물이므로, 사람은 배우고 가르치면서 도덕적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순자의 사상은 법가(法家)의 원류가 되었다. 법치의 힘으로 춘추전국시대의 끝없는 전란을 종식시키며 중원을 통일한 진나라. 그 진나라의 명재상 이사가 바로 순자의 제자인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나 본성 그 자체는 선하지 않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교육을 통해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 사회가 인위적 노력을 통해 ‘사람다운 사람’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말은 다르지만 내용은 비슷하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교육 이념도 그렇다. 서유럽의 작은 섬나라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교육철학 영역으로 넘어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성악설보다는 성선설을, 인위적 교육보다는 자연적 방임을 중시하는 견해가 주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 프랑스의 철학자 루소가 펴낸 <에밀>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마리아 몬테소리, 장 피아제 등 우리에게도 친숙한 교육철학자들은 대체로 루소의 편에 섰다. 그러한 사상적 흐름의 결정판은 브라질의 교육사상가 파울루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레이리는 학생들 머리에 지식을 넣는 것을 ‘은행 저금식’ 교육이며 억압의 도구라고 비난하고, 대신 자유를 실천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소리 아닌가? 그렇다.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진보 교육’의 경전과도 같은 책이다. 아이들 머리에 지식을 집어넣고, 몸에 단정한 품행을 익힐 때까지 다그치는 것은 억압이다. 대신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놀면서 내면의 선한 마음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전교조 교육관의 뿌리가 바로 여기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표류하고 있는 우리의 공교육을 보고 있노라면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지난 8월 26일,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 ‘틱톡’에 올라온 영상에 담긴 우리 교육의 현실은 경악스럽기 짝이 없다. 휴대폰 사용이 금지된 수업 시간에, 남자 중학생이 교단에 드러누워 여자 선생님을 촬영한다. 다른 학생들은 재미있다고 그 모습을 찍으면서 낄낄거린다. 체벌이 금지된 교실에서 벌점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남학생을 여선생이 통제할 방법이란 사실상 없다.
이번 경우가 유독 심각해 보이지만, 비슷한 사건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도 우리는 무책임한 성선설을 믿어야 하는가. 공교육 현장에서 터져 나오는 불만은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 학생 인권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교권, 아니 교사의 인격권마저 부정당하고 있는 현실은 왜 도외시하는가. 심지어 이렇게 공교육이 무너지면 학생 인권 증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성장 단계에 맞는 교육을 받고 사회 일원으로 커나가는 것은 가장 핵심적이며 기초적인 인권일 테니 말이다.
<킹스맨>으로 돌아가 보자. 에그시의 훈련 혹은 교육과정은 쉽지 않았다. 한동안 손 놓고 있었던 공부를 해야 하고, 귀족 자제들의 텃세와 따돌림도 견뎌야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통과한 후 에그시는 어엿한 신사로, 킹스맨 특수 요원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고향의 펍으로 돌아온 에그시는 딘과 깡패들을 대면한다. 그러고는 마치 해리가 했던 것처럼 펍의 문을 잠그며 의미심장한 말을 한마디씩 내뱉는 것이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