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행로는 정해져 있다. 자연의 길은 하나뿐이며, 그 길은 단 한 번만 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인생의 각 단계에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 소년은 허약하고, 청년은 저돌적이고, 장년은 위엄 있고, 노년은 원숙하다. 이 특징들은 제철이 되어야 거둘 수 있는 자연의 결실이다.” -키케로 ‘노년에 관하여’ 중에서

페르디난드 호들러(1853~1918)의 '삶에 지친 자들(Die Lebensmüden·1892)'. 고개를 아래로 떨군 남자를 가운데 두고 주름이 깊게 팬 남자 넷이 손을 기도하듯 모은 채 나란히 앉아있다. /위키미디어

오늘날처럼 사람들이 노후 대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하면, 16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는 중얼거렸을 것이다. 당신이 늙어 죽는다는 보장이 어딨어. 그가 보기에, 노년을 맞는다는 것은 희귀하고 특별한 일이다. 인간은 사고로든 질병으로든 혹은 알 수 없는 이유로든 아무 때나 죽을 수 있다. 마치 자기만큼은 자연스레 늙어서 죽을 것처럼 구는 것은 터무니없다.

인생이 고해라고 말들 하지만, 대개 죽기 두려워서 늙도록 오래 살고 싶어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인생이 고해라면서 오래 살고 싶어 하다니. 영화 <애니홀>의 대사처럼, 그것은 음식이 맛없다면서 더 먹고 싶어하는 것과 같다. 현자들이 말했다. 죽음은 두려워할 만한 게 아니라고. 살아있을 때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고, 정작 죽으면 죽음을 경험할 사람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노년은 두렵다. 고대 로마의 사상가 루크레티우스는 말한다. “시간의 가혹한 공격이 우리 육신을 후려치고/ 사지는 허약해서 지탱할 힘이 없고/ 판단력은 오락가락하고 정신은 헤맨다.” 노년이 두려운 것은 그것이 쇠퇴와 허약과 결핍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한 명의 로마 사상가 키케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삶의 이점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삶이란 오히려 노고 아닌가.” 청년들에게는 넘치는 에너지가 있지만, 그 에너지를 소진하며 살아가야 할 고된 삶이 남아 있다. 노인은 바로 그 노고로부터 면제된 것이다.

키케로는 그러한 노년을 변호하는 과업에 착수한다. 그에 따르면, 육체적 활력은 관리만 잘하면 노년에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육체적 활력 없이도 노인이 잘해낼 수 있는 여러 활동이 있다. 특히 “계획과 명망과 판단력”이 필요한 일들. 공부랄지, 교육이랄지, 상담이랄지 하는 것들. 한가해졌으므로 그런 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너무 즐거운 나머지 “공부와 연구를 하는 사람에게는 노년이 언제 슬그머니 다가오는지 알아차리기 어렵다.” 과연 그런가. 세상에는 공부와 담을 쌓은 노인들이 적지 않던데.

사람들이 젊음을 동경하는 이유는, 그 시절 특유의 활력과 감각적인 쾌락 때문이다. 키케로가 보기에, 활력과 쾌락은 오히려 족쇄다. 욕망은 존재하는데 그 욕망을 채우지 못할 때가 많으므로. 노인이 되면 욕망 자체가 줄어들기 때문에, 욕망의 족쇄로부터 해방된다. 쾌락을 그다지 원하지 않게 되므로 아쉬움도 크지 않단다. 과연 그런가. 세상에는 노욕으로 가득한 원로들이 적지 않던데. 키케로인들 고약한 노인네들을 겪어 보지 않았겠는가. 그 역시 고집 세고, 불안하고, 걸핏하면 화를 내는 괴팍한 노인을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키케로가 보기에, 그건 그 사람의 성격상 결함이지 노화 때문에 생긴 문제가 아니다.

키케로는 노인이 결핍 상태에 있다는 것도 부정한다. 젊은이는 뭔가를 원하지만, 노인은 그 청년이 원하는 걸 이미 얻은 상태다. 젊은이는 오래 살기를 원하지만, 노인은 이미 오래 살았다. 게다가, 노인들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명망이나 권위 같은 것들. 명망이나 권위는 쌓는 데 시간이 걸리므로, 청년은 쉽게 누리기 어렵단다. 과연 그런가. 세상에는 무시당하는 노인이 적지 않던데. 내가 아는 대기업 임원 한 분은, 은퇴를 앞두고 미리 모욕당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직함을 내려놓는 순간 그간 받아왔던 대접들이 일제히 사라질 테니까. 교수들도 마찬가지다. 은퇴와 동시에 아무도 당신의 재미없는 아재 개그에 웃어주지 않을 것이다. 누가 당신에게 섭섭한 소리를 했다고 느닷없이 울지 않도록 훈련해야 한다.

키케로에 따르면, 노인들만 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특권이 있다. 다름 아닌 훌륭하게 살았다는 기억이다.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도 말하지 않았던가. 행복에 대한 기억도 행복일 거라고. 젊은이는 일단 기억해야 할 내용을 쌓아야 하는 나이이니, 이러한 성취와 행복에 대한 회고의 즐거움이 잘 허락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노년의 변호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이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자네들은 내가 칭송해 마지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젊었을 적에 기초를 튼튼하게 다져놓은 노년이라는 점을 명심해두게나.” 그렇다. 노년에 건강하려면 젊은 시절부터 건강 관리를 잘해야 한다. 노년에 공부를 즐기려면, 젊은 시절부터 공부에 습관을 들여야 한다. 노년에 청년들을 가르치려면, 젊은 시절부터 지식을 쌓아야 한다. 노년에 쾌락에 빠지지 않으려면 젊은 시절에 놀 만큼 놀아 보아야 한다. 노년에 멋진 추억에 잠기려면 젊은 시절에 멋지게 살아야 한다.

이처럼 키케로는 노인도 퇴행하지 않거나, 퇴행을 보완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늙으면 퇴행한다. 퇴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퇴행을 적극적으로 즐길 필요가 있다. 바로 그 점에 노년 특유의 즐거움이 있다. 어떻게 퇴행을 즐길 수 있느냐고? 자신이 이미 이룬 것을 새삼 바라는 것이다.

박사 노인은 제발 박사학위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거다. 그런데 이미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다! 추가로 더 수고하지 않아도 학위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얼마나 즐거운가. 기혼자 노인은 아내와 평생을 같이하고 싶다고 아내에게 청혼하는 거다. 제발 나와 결혼해줘. “이 사람이 노망 났나. 우린 부부잖아.” 이미 결혼했다니! 이미 평생을 같이했다니! 청혼을 거절당할 두려움을 느낄 필요도 없고, 애써 짝을 찾아 헤맬 필요도 없다. 얼마나 즐거운가. 오랜 친구에게 간청하는 거다. 나와 사귀어주게. 친구가 당황하며 대꾸한다. “우린 이미 친구잖아!” 우린 이미 친구였다니! 얼마나 즐거운가. 칼럼 마감을 연장해달라고 신문사에 요청한다. “무슨 소리 하세요. 칼럼 원고 이미 보내주셨어요.” 이미 원고를 보냈다니! 너무 즐겁다. 이미 이루어진 것을 소원으로 빌기. 그것이 내가 노년에 기대하는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