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오후, 광주광역시 북구의 한 보육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셋이 하굣길인지 가방을 메고 대문으로 들어섰다. 마당엔 예수상이 서 있고, 축구 골대와 농구 코트도 보였다. 붉은 꽃 만개한 배롱나무를 지나 아이들이 생활관으로 뛰어들어갔다. 지난달 18일 광산구 한 대학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A(19)군도 이곳에서 2년 1개월을 살았다.
22학번 새내기였던 A군은 ‘아직 읽지 못한 책이 많은데’라는 메모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엿새 뒤인 24일, 광산구 한 아파트 화단에서 B(20)양이 숨진 채 발견됐다. 유서엔 ‘그간의 삶이 고달팠다’는 내용이 담겼다. B양 역시 보육 시설을 나와 자립 생활을 하던 자립 준비 청년(보호 종료 아동)이었다.
사회복지사를 꿈꿨던 A군, 대학 중퇴 후 장애인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던 B양. 그들이 죽음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비극을 막을 수 있었던 순간들은 없었을까. 지난 29~30일 <아무튼, 주말>이 A군과 B양이 살았던 광주광역시 보육원과 관할 구청, 자립센터 등 현장에 다녀왔다.
“경제적 어려움은 아니었을 것”
“돈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었을 거예요.” A군과 B양을 담당했던 구청 아동복지과 직원들 말이다. “그보다는 시설에서 퇴소한 뒤 일상생활을 스스로 꾸려나가야 하는 막막함, 외로움이 가장 큰 문제였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광주광역시는 현재 자립 준비 청년을 대상으로 자립 정착금 1000만원을 주고, 자립 수당을 월 35만원씩 5년간 지급한다. A군이 거주했던 관할 구청 아동 보호 업무 담당자는 “(A군의) 마음 깊이 불안함과 우울감이 있었을 거라고 짐작은 하지만 성격도 밝고 똑똑했던 친구라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고 했다.
구청과 경찰 등에 따르면 A군은 고2 때 경기도 한 보육원에서 광주광역시의 시설로 옮겨왔다. A군은 사망 직전에도 이전에 살았던 경기도 보육원 친구들을 만났다고 한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이들은 “A를 만났을 때만 해도 그런 선택을 하리라고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A군과 같은 과에 다니던 친구들은 “A군이 보육원 출신인 줄도 몰랐다”고 했다. A군은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던 걸까.
그는 활달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지만 최소 3번 이상 보육원을 옮겨다녔다. 첫 번째 보육 시설에선 8살일 때 옮겨졌고, 두 번째 보육 시설은 아동학대로 폐원됐다. 경기도 보육원에서 광주광역시로 옮겨올 때는 종교 문제로 갈등이 있었지만 A군은 제대로 된 상담 치료를 받은 적이 없었다.
B양이 청소년기를 주로 보낸 보육원도 마찬가지다. 아동 50명이 머무는 이 보육원엔, 절반 정도 되는 아이들이 심리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지만 임상심리 상담원이 단 한 명뿐이다. 25년째 이 보육원에서 근무중인 한 직원은 “원가정에서 학대의 경험으로 심리가 불안정하거나, 평균 지능에 미치지 못하는 경계선 지능, ADHD 증세 등 아이 25명을 데리고 언어 치료, 그림 치료, 심리 치료를 해나가는 것이 정말 어렵다. 10~20분가량 되는 상담 시간도 아이들에겐 충분치 않을 것”이라고 했다. 북구청의 아동 보호 전담 요원은 아이들과 상담할 때마다 늘 어려움을 겪는다고 했다. “왜 나만 부모가 없고, 왜 나만 힘들어요?”라는 질문에 하나하나 답하다 보면 결국 “선생님은 엄마 없이 살아봤느냐?”는 질문으로 끝이 난다고 했다.
열여덟, 세상에 던져지다
이런 상태에서 맞이하는 갑작스러운 독립은 일종의 충격이다. 아이도 어른도 아닌 열여덟 살은 자립할 힘이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세상에 홀로 던져진다. 공과금 고지서라는 걸 처음 본 경우부터 재활용품 분리 배출법을 모르는 경우, 주방 기기 사용법을 모르는 경우 등 일상이 돌발 상황의 연속이다.
그러나 이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은 “애착 관계의 부재에서 오는 외로움”이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사람들은 생활 속 자잘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시시콜콜 물어볼 수 있는 ‘애착 관계’가 필요하게 마련”이라며 “애착 관계 대신 인터넷 검색에 의존해 아주 기초적인 생활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 자립 준비 청년들은 뿌리 깊은 외로움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될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아동권리보장원이 2019년 발간한 ‘아동 자립지원 통계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자립 준비 청년들이 가장 많이 상담을 요청한 분야는 ‘생활’(20.9%)이었다.
지난 6월부터 시행된 아동복지법에 따라 자립 지원 전담 기관이 만들어지게 됐지만 전국 통틀어 12곳밖에 없다. 생활, 주거, 취업, 교육, 의료 등 각종 일상생활에서 생기는 문제들에 대해 맞춤형 관리를 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6월 말 개소한 광주광역시 자립 지원 전담 기관은 사무직을 제외한 5명의 직원이 380명의 자립 준비 청년을 관리한다. 그중 도움이 시급한 20명은 기관에 입소해 지내고 있다. 입소할 때 자립 준비 청년들의 진학, 취업, 경제 상황 등을 간략하게 조사하는 ‘자립 수준 평가서’는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기엔 부족하다.
“자립은 누군가와 상호작용하는 것”
제도의 빈틈을 메워주는 건 같은 고민을 겪은 ‘선배’들이다. 아름다운재단에서 4년째 아동 자립 전문가로 활동 중인 신선(30)씨는 “일상에서 돌발 상황이 생길 때마다 고민을 털어놓을 대상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었다”며 본인이 자립했을 때의 막막했던 경험을 살려 블로그에 지원 사업 정보를 정리했다. 2019년부터는 다른 보호 종료 아동 청년들과 함께 ‘열여덟 어른’이라는 유튜브를 개설해 활동하고 있다. ‘이사 A to Z’, ‘기초생활수급비 계산법’ ‘장학 지원 사업 소개’ ‘청년 전세 임대주택 정보’ 등의 내용을 올린다. 신씨는 “후배들과 상담할 때 꼭 마지막에 하는 말이 있다. 자립은 홀로 서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계속 상호작용을 하면서 도움을 주거나 도움을 받아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지난달 29일 윤석열 대통령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국가가 전적인 책임을 지고 자립 준비 청년들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부모의 심정으로 챙겨달라”고 당부했다. 보건복지부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복지부 관계자는 “자립 지원 전담 기관을 연말까지 다섯 시도에 더 설치하고, 인력도 확충할 예정”이라며 “자립 준비 청년들이 스스로 멘토로 참여해 보호 대상 아동을 지원하는 자조 모임이 활성화되도록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파악조차 안 되는 자립 준비 청년이 10명 중 4명꼴로, 실태 조사가 아예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정보 접근성이 낮고, 극단적 무기력에 빠진 자립 준비 청년들을 정부가 직접 찾아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