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추석 밥상의 최대 화제는 정치가 아니라 ‘성균관 차례상’이었다. 어머니는 ‘평생 전 부쳤더니 이제 와서 발표한다’고 역정을 내시면서도, 전을 포함해 소고기 산적도 하지 말고 올해는 간단히 상을 차리자고 먼저 말씀하셨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지난 12일 소셜미디어에 30대 주부가 후기를 올렸다. “추석 직전 성균관이 발표한 차례상 뉴스를 보고 ‘앗싸’를 외쳤다”는 그는 “차례상이 가벼워진 덕에 명절 스트레스도 없어졌다”고 했다.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 사는 김정자(77)씨는 “해방둥이로 태어나 추석 명절에 동네에서 전 부치는 냄새를 못 맡은 건 처음”이라고 했다.
◇성균관 발표의 위력?
추석 풍경이 달라졌다. 코로나 사태 이후 3년 만에 거리 두기 없는 첫 대면 명절을 맞았지만, 차례를 간소화하거나 아예 건너뛰었다는 집이 많았다. 특히 추석을 앞두고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가 발표한 ‘차례상 표준안’이 화제가 되면서 마음의 부담까지 덜었다는 가정이 적지 않았다. 성균관 측은 “조상을 기리는 마음은 음식의 가짓수에 있지 않으니 많이 차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며 “전은 안 부쳐도 된다”고 했다.
일각에선 “제사는 가가례(家家禮)라 집안마다 예법이 다른데 왜 성균관이 나서느냐”며 불편해하는 반응도 있었지만, 며느리들은 환호했다. 경기도 분당에 사는 회사원 김혜성(46)씨는 “성균관 발표가 생각보다 힘이 세더라. 명절 때마다 지겹게 부치던 전을 이번 추석엔 하나도 안 부쳤다”고 했고, 50대 정모씨는 “이러려고 내가 20년 넘게 열심히 전을 부쳤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지만, 이제라도 정리해주니 고맙다. 올해는 동그랑땡과 호박전만 부쳤지만, 내년부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부모님과 가족 여행을 갈 생각”이라고 했다.
◇지갑 열기 두려운 물가
추석 상차림이 간소해진 건 살인적인 물가 탓도 컸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올해 추석 차례상 차림 비용은 4인 가족 기준으로 평균 31만7142원. 지난해보다 6.5%(1만9338원) 올랐다. 전통시장 기준으로 시금치는 56.1%, 무 가격은 54.2% 급등했고, 배추와 고사리 가격도 전년 대비 34.5%, 12.2% 뛰었다. 서울 서초동에 사는 주부 김모씨는 “시금치는 포기하고 대신 부추를 넣어서 잡채를 만들었다”고 했다.
마트에서 간편식을 구매해 명절 음식을 대신하는 이들도 늘었다. 이마트 관계자는 “자체 브랜드인 피코크 간편식 인기가 높았다. 빈대떡, 김치전 등 데우기만 하면 되는 전류 매출은 전년 대비 30% 늘었고, 완자·떡갈비는 8.1%, 갈비찜 매출은 무려 69.8% 증가했다”고 했다.
회사원 손모씨는 “식재료 값이 너무 올라서 우리 집은 아예 나가서 먹자고 했다. 가족 11명이 중식당에서 술과 음료 포함해서 실컷 먹었는데도 36만원 나왔다. 해먹는 것보다 싸고, 여자들 고생도 안 했다고 모두 대만족했다”고 말했다.
◇명절 여행족도 돌아왔다
‘여행족’도 부활했다. 대학생 조예찬(24·서울 신당동)씨는 “명절에는 무조건 가족이 모여야 한다고 고수하던 어머니가 웬일로 올해는 ‘각자 여행’을 허락하셨다”며 “코로나 기간 벼르고 벼르던 태국 여행을 4박5일간 친구들과 다녀왔다”고 했다. 인천국제공항공사에 따르면 올 추석 연휴(8~12일)에 29만4100여 명이 인천공항을 이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하루 평균 5만8800여 명 수준. 지난해 추석(8742명)과 비교해 무려 6배 가까이 급증한 수치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코로나 여파로 2년 넘게 거리 두기를 하면서 명절 풍경이 달라졌다. 마땅히 해야 하는 줄 알았던 것들을 꼭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고 거기에 익숙해졌다. 형식을 걷어내고 실용화하는 방식을 실제로 몸으로 체험하면서 장점을 발견한 것”이라며 “당연한 의무였던 추석 차례상도 앞으론 점점 더 간소화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