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한국 최초의 ‘신여성’이라 불리는 나혜석이 제작한 판화 한 점을 보자. 파마머리에 롱코트를 걸친 여성이 바이올린을 들고 길을 걷고 있다. 그녀를 향해 두루마기를 걸친 두 노인이 노골적으로 손가락질을 하며, ‘저것이 무엇인고’ 외친다. 다른 한편에서는 젊은 남성이 그녀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며 눈을 떼지 못한다. 조롱의 대상이자 동시에 호기심의 대상인 ‘저것’은 20세기 초 한반도를 강타한 신개념, ‘신여성’이었다.
◇나 참판댁 아기씨
작품 아래 ‘Rha’라고 크게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은 작가 나혜석! 그는 1896년 수원의 이름난 가문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군수를 역임했고, 대대로 고위 관료를 지낸 이 집안을 사람들은 ‘나 부잣집’ 혹은 ‘나 참판댁’이라고 불렀다. 나혜석은 2남 3녀 중 둘째 딸로, 어릴 때 불린 ‘아명’은 ‘아기(兒只)’였다. 다부진 외모에 총명하고 부지런한 성품으로, 진명여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해 신문에도 났으니, 귀히 자랄 조건을 모두 갖춘 여성이었다.
가만히 세상에 순응하면 ‘아기씨’라고 불릴 운명을 타고났지만, 나혜석의 선택은 남달랐다. 그는 무엇보다 그의 어머니나 언니처럼 사는 것이 싫었다. 그 시대 남성들이 흔히 그랬듯 나혜석 부친은 서모를 두었는데, 나혜석의 어머니는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감내하며 살아야 했다. 나혜석의 언니도 일찍 학업을 그만두고 부잣집으로 시집가서 평범하지만 이전 세대와 다를 바 없는 여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 여성의 삶을 지켜보며, 나혜석은 자신은 이들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나혜석은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도쿄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에 입학해, 한국에서 최초로 서양화를 공부한 여성이 되었다.
◇“여자도 사람이다”
조선시대 여성은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지켜야 했다. 평생 아버지, 남편, 아들, 즉 세 남성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사고에서 깨어나 여성도 교육이 필요하다는 의식이 생겨나면서, 나혜석 시대에 처음 본격화된 개념이 ‘현모양처’였다. 여성도 가정 운영의 주체로, ‘현명한 어머니와 훌륭한 부인(婦人)’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지금 들으면 구태의연한 여성상으로 보이지만, 당시는 ‘현모양처’만 해도 신개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혜석은 1914년, 불과 18세 나이에 일본 유학생 잡지 ‘학지광’에 처음 발표한 논설에서, ‘현모양처론’은 여성의 역할을 가정 안에 묶어 두는 새로운 굴레라고 비판했다. ‘온양유순’한 여성을 기르려는 교육의 목표 또한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카추샤, 노라, 라이초우, 요사노 등 다양한 새로운 여성상을 언급하면서, 한국의 여성도 “욕심을 내서”, 어느 방향으로든 더 나아가야만 한다고 주창했다.
“탐험하는 자가 없으면 그 길을 영원히 못 갈 것이오. 우리가 욕심을 내지 아니하면 우리 자손들을 무엇을 주어 살리잔 말이오? 우리가 비난을 받지 아니하면 우리의 역사를 무엇으로 꾸미잔 말이오?”(‘학지광’, 1917년 7월) 나혜석의 주장은 처음부터 대담하고 과격하고 당찼다.
◇탐험하는 자
빨리 시집을 가라고 강제 귀국시킨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여학교 교사가 되어 타지로 독립해간 나혜석은 이미 ‘탐험하는 자’의 길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그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 후 3·1 운동을 주도하다가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20년, 변호사 김우영의 오랜 구애를 받아들여 결혼식을 올렸다. 나혜석의 파격적인 결혼 조건-시어머니와 전실 딸과 별거하게 해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 말 것 등-을 모두 받아들인 ‘신남성’과의 결혼이었다. 신혼여행지로 나혜석의 죽은 전남친 묘소를 찾아가 묘비를 세워준 일화는 염상섭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결혼한 이듬해 나혜석은 만삭의 몸으로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대규모 유화 개인전을 열었다. 역사상 경성에서 열린 최초의 양화 개인전이었다. 그의 전시는 이색적인 행사로 언론에 대서특필되었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나혜석은 이 시기 김일엽과 함께 ‘신여자’라는 잡지도 제작했다. ‘저것이 무엇인고’라는 판화도 이 잡지에 실린 것이다. 잡지 ‘개벽’에 ‘개척자’라는 판화를 발표한 것도 1921년의 일이었다. 태양이 떠오르는 이른 아침, 거친 땅을 일구는 ‘개척자’의 뒷모습을 새긴 작품이었다. 척박한 환경에도 고단한 노동에 몰두하는 개척자의 강인한 의지를 거친 칼맛으로 표현했다.
나혜석이 스스로 말한 대로, 그는 “1분이라도 놀아본 일이 없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인정해줘야 한다. 1921년 외교관이 된 남편을 따라 만주 안동현에 정착한 이후에도, 나혜석은 자녀들을 양육하는 엄마였고, 매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는 화가였으며, 안동현에서 여자 야학을 운영하는 교육자였다. 또한 여성해방운동 관련 글을 끊임없이 발표한 여성운동가였으며, 소설과 시를 꾸준히 발표한 문인이었다. 심지어 1923년 유명한 의열단의 ‘황옥사건’이 터졌을 때, 무기를 감추어주고 의열단원을 돌보았던 독립운동 조력자이기도 했다.
나혜석은 남편과 함께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는 특별한 기회를 누리기도 했다. 1927년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거쳐 파리에 당도한 나혜석은, 파리 미술아카데미에서 수학하며 일본에서 배운 인상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미술 경향을 연구했다. 미국을 거쳐 1년 9개월간 계속된 여행에 대해 나혜석은 세세하게 기록했다. 유럽의 여성 참정권, 탁아소 운영 등을 소개한 글도 남겼다.
◇이혼 전말 기록해 발표하기도
네 자녀의 엄마로, 여성해방운동가로, 문인으로, 화가로, 이러한 모든 활동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사실은 이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나혜석의 결혼생활은 점점 유지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세 아이를 시어머니에게 맡겨두고 1년 9개월을 외국에서 보내고 돌아온 나혜석 부부는 귀국 후 집안 일로 많은 갈등을 빚었다. 파리 체류 당시 나혜석이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였던 최린과 사랑에 빠진 사실도 남편 김우영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나혜석이 이 일에 큰 책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의에 빠진 김우영이 기생집을 드나들자 부부의 관계는 파탄에 이르렀다. 1930년 나혜석은 이혼에 합의하고 무일푼으로 쫓겨나왔다.
이후 나혜석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는 먼저 자립을 위해 애썼다. 열심히 그림을 그려 일본 제국미술전람회에 출품했고, 작품을 팔아 조금은 생계를 이어갔다. 금강산에 들어가 작품 제작에 몰두했고, 여자미술학사를 개설하여 여학생을 위한 미술 교육기관도 개설했다. 나혜석은 교육받은 여성의 사회적 자립을 몸소 보여주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쯤 되면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1933년경 나혜석은 손을 떨기 시작했다. 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드물지도 않은 병, ‘조기 발병(early-onset) 파킨슨’에 걸린 것으로 보인다. 그는 수전증을 시작으로, 점차 힘이 빠지고, 불안증과 우울증을 보이며, 신체 마비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혼한 신여성에 대한 사회적 냉대는 그의 병을 더욱 악화시켰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혜석의 선택은 더욱 죽기를 각오한 노골성을 드러냈다. 그는 1934년 전 남편 김우영에게 보내는 글의 형식으로, 이혼 과정의 전말을 낱낱이 기록한 ‘이혼고백서’를 발표해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고 생각한 나혜석은, 이 무렵 본격적인 친일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 최린을 향해, ‘정조유린죄’로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해서,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나혜석은 그 시대를 살며 겪은 모든 경험과 그때마다 느낀 자신의 감정 상태를 솔직하다 못해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체면과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기성 세력에 충격을 주고자 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나혜석식(式) ‘퍼포먼스’를 시연한 셈이다.
‘성숙’의 의미가 모호하긴 하지만, 통념적으로 말해 나혜석이 ‘성숙한 인간’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성숙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 역시, 나혜석의 의식적인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에 타협할 바에야 죽어버리겠다는 생각, 그것이 나혜석을 결국 사회에서 추방되게 만들었다. 10여 년간 완전히 세상에서 사라졌던 나혜석은 1949년 3월 자 관보(官報)에 4개월 전 죽은 행려병자의 이름으로 마지막 등장한다.
나혜석이 스물두 살 때였던 1918년에 쓴 자전 소설 ‘경희’는 이렇게 끝맺는다. “하나님! 내게 무한한 광영과 힘을 내려 주십시오. 내게 있는 힘을 다하여 일하오리다. 상을 주시든지 벌을 내리시든지 마음대로 부리시옵소서.” 부친의 뜻을 거역한 채 부잣집 며느리로 들어가 살지 않기로 결정한 경희가 마지막으로 절규하는 대목이다. 그때는 그런 선택 하나도 이런 간절한 절규를 동반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절규를 듣고 하나님은 나혜석에게 벌을 내리기로 결정하셨나보다. 나혜석의 삶은 여러 번 스스로 예견한 대로, 결국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나혜석의 유산
나혜석이 죽은 지 74년 지난 올해, 그의 작품 한 점이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뮤지엄(LACMA)에 전시되고 있다. 미국에서 최초로 열리는 한국 근대미술 주제전, ‘사이의 공간: 한국미술의 근대’에 출품된 것으로, 1928년경 그린 나혜석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나중에 한국은행 총재가 된 나혜석의 막내아들 김건이 수원시에 기증했던 작품이다. 방탄소년단 RM이 이번 전시에 작품 설명 오디오가이드 녹음을 해주었는데, 거기 이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나혜석이 100여 년 전 죽을 힘을 다해 남긴 유산이 오늘날 이렇게 향유된다. 결국 하나님은 나혜석에게 상을 내리기로 결정하셨나보다.
뜻밖의 만남도 있었다. 지난 주 LA에서 열린 전시 개막식에 나혜석의 손자가 찾아왔다. 일찌감치 미국으로 이민 간 나혜석의 차남 김진 교수의 아들 스탠 김이었다. 그는 아빠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미술을 공부해, 지금은 미술치료사가 되어 있었다. 할머니의 작품을 LA에서 만난 소감을 묻는 질문에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자랑스럽고,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