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 묻히면 묘비에다 ‘불편을 견디는 것이 곧 삶이었다’고 적을 만한 일상이었다.”
2011년, 모호연(39)씨는 자신의 첫 독립 생활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빨래 말리는 요령을 몰라 꿉꿉한 수건에선 냄새가 났다. 빨래 개기조차 노하우가 필요했다. “왜 이렇게 사는 게 녹록지 않을까” 투덜댔다. 온수가 나오지 않으면 그냥 찬물로 머리를 감았고, 커튼 봉을 달 줄 몰라 창문을 현수막으로 가리기도 했다. 책장이 좁아 바닥에 책 무더기를 쌓아둔 적도 부지기수. 그렇게 ‘적응’의 화신이 됐다.
3년 뒤, 그녀의 무딘 일상에 혁명이 일어났다. 스웨덴 조립 가구점 ‘이케아’가 한국에 상륙한 2014년이다. 호기심에 구경 갔다가 우연히 전동 드릴 세트를 봤다. 기념품으로 간직할 요량에 사 둔 것인데, 전동 드릴이 마침내 제 구실을 하는 날이 왔다. 나무 합판으로 만들어진 모니터 받침대가 구부러져 쓸모없게 됐기 때문이다. 마음에 딱 드는 모니터 받침대를 찾지 못한 그는 나무 합판을 주문해 연필로 나사 박을 곳을 표시했다. 전동 드릴을 이용하니 아주 쉽게 받침대가 만들어졌다. 공구와 사랑에 빠진 순간이다. 이후 그의 삶이 달라졌다. 세면대 수도꼭지를 교체하거나, 실리콘으로 창호를 보수하고, 천장 조명을 바꿔 다는 일 정도는 너끈히 하게 됐다. 가구 조립 능력도 생겼다. 친구들이 그를 ‘모가이버’라 부르기 시작했다.
“공구는 나의 신체가 확장된 존재”라고 말하는 그가 최근 ‘반려 공구’를 출간했다. 망치, 펜치, 드라이버, 톱, 전동 드릴 같은 친숙한 공구부터 타카, 실리콘 건, 샌딩기 등 생소한 공구들 이야기를 담았다. 교보문고 등 주요 서점에서 ‘주목할 만한 신간 에세이’로 선정했고, 출판 평론가 표정훈은 “공구 사용의 정석과 원칙을 담은 실용서이자 공구의 철학이라 할 만하다”고 평했다. 주 독자인 2030 여성들은 “회사 사물함에 드라이버 하나 사서 넣어뒀다” “어떤 공구라도 당장 사용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는 호평을 쏟아냈다.
인터뷰를 위해 지난 6일 그의 서울 은평구 집을 방문했다. 선반, 책장 등 주인 손을 거친 가구가 즐비했다.
공구 ‘알못’ 에서 ‘모가이버’ 되다
-자신을 ‘만들고 쓰는 사람’으로 소개했더라.
“평소 불안과 걱정이 아주 많은 성격이다. 어떤 일을 계획해 실행하기까지가 너무 힘들었는데, 만들기와 글쓰기는 실행이 어렵지 않았다. 내가 쓰는 물건에 대해 기록하다 보면 의외로 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내가 무엇을 중요시하고, 또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알게 된다. 물건을 만드는 행위는 몰입하기 쉬워 힐링이 된다. 뭔가를 만드는 동안 걱정과 불안이 사라진다.”
-공구를 사는 기준이 있을까.
“대개 비싼 공구가 좋은 공구지만 난 웬만해선 사지 않는다. 일이 잘못되면 ‘내가 여자라서 못 한 거다’라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덜 하려는 것이다(웃음). 다이소에서 파는 이삼천원짜리 도구로 문제를 해결했을 때의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공구를 구입하는 요령이 있다면.
“전동 드릴 같은 물건은 미리 사두면 좋다. 안 쓰면 다시 팔면 되니까. 사람을 따라 돌고 도는 것이 공구의 인생이다. 전동 공구는 브랜드 제품이 쓰기도 좋고 나중에 팔기도 좋다. 그렇다고 모든 공구를 미리 살 필요는 없다. 쓰지도 않을 공구를 미리 샀다가 안 쓰면 자책하게 되니까, 문제가 발생했을 때 구입하는 게 좋다.”
공구를 사용하면서 생긴 또 다른 변화로 그는 “내 생활의 어려움을 나의 힘으로 해결한다는 효능감”을 꼽았다. 한 공구를 쓰면 저절로 다른 공구로 세계가 확장된다고도 했다.
-공구를 만난 후 일상에 생긴 변화가 크다던데.
“어떤 문제가 생기면 회피하고 미루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들었는데, 공구를 하나둘 쓰게 되자 문제가 생기면 ‘내가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물론 내 손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되면 전문가에게 빨리 부탁한다.”
-직접 수리하거나 만든 가구 중 특히 애착이 가는 물건이 있다면.
“2018년에 만든 벙커 침대를 꼽고 싶다. 그런데 돌연 이사를 오게 되면서 벙커 침대를 싹 뜯어서 완전히 다른 구조로 새롭게 조립해야만 했다. 벙커 침대에 있던 수납장들을 해체해서 주방 서랍장을 만들고, 이사하는 과정에서 부서진 옷장도 새로 만들었다. 침대 선반을 재조립해 책장을 만들기도 했다. 집 안 구석구석에 해체된 벙커 침대가 녹아있는 셈이다.”
슬기로운 공구 생활 팁
-수동 드라이버, 펜치, 장도리 세 가지를 집에 꼭 구비해둘 공구로 꼽았더라.
“수동 드라이버는 뭔가를 만들지 않아도 쓸모가 많다. 문 경첩과 싱크대 경첩 등을 수선할 수도 있다. 박혀있는 못을 빼거나 다시 박을 때도 드라이버는 필수다. 펜치는 뭔가를 끊을 때 필수적이다. 장도리는 망치와 다르게 못을 빼내거나, 물건을 해체하는 데도 사용할 수 있다. 내 손보다 강력한 도구가 필요할 때 장도리가 참 유용하다. 전동 드릴도 추천한다. 드릴 하나만 있으면 가구 조립도, 커튼 설치도 거뜬하다.”
-무인도에 공구를 단 하나만 들고 갈 수 있다면?
“장도리를 꼽겠다. 싸울 수도 있어 호신용으로도 좋고(웃음), 못을 빼내 물건을 해체할 수도 있고, 나무를 두들겨 편평하게 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배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다가 표류했을 때 나무를 펴서 판자를 만들 수도 있다. 코코넛도 깨서 먹을 수 있을 것 같고.”
-일상생활에서 꼭 써먹을 수 있는 공구 팁을 전수하자면?
“자취하다 보니 의외로 망치로 못을 박거나 드릴로 벽에 구멍을 뚫는 일보다는 벽을 메꾸는 일이 자주 생기더라. 그래서 친구들에게 벽에 난 구멍을 메꿀 수 있는 ‘메꾸미’ 같은 제품을 추천한다. 벽에 구멍을 뚫더라도 복원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긴다. 생활용품점, 철물점 갔을 때 보수용품과 접착제 파트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습관도 가지면 좋다.”
-공구를 사용하다가 다친 적은 없는지.
“겁이 많아 철저히 대비한다. 반드시 보안경과 목장갑 같은 안전 용품을 끼고 작업을 진행한다. 작업하기 전에 참고할 만한 블로그나 영상 등으로 시뮬레이션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명백하게 전문가가 진행해야 하는 작업은 함부로 진행하지 않는다. 수도관·동파 같은 누수 문제, 전기 배선, 전자제품 설치 등이 대표적이다.”
“살림은 내게 명상과도 같아”
모호연씨는 살림을 “일상을 가꾸어나가는 기술이자 나를 정성스럽게 돌보고 대접하는 힘”이라고 정의했다. ‘반려 공구’ 역시, 일상을 가꾸는 일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살림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했더라.
“글쓰기 등 다른 일을 할 때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괴로운데, 요리나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개는 과정은 내게 일종의 명상 시간이다. 그 동작에 집중하는 게 명상과 닮았다.”
무언가를 만들어낸 경험은 또 다른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재활용해서 재창조하기도 한다. 그중 애착이 가는 것은 비닐봉지로 만든 뜨개 지갑. 외국에서는 플라스틱 뜨개질이라는 뜻의 ‘플란(Plarn)’이란 장르로 유명하다. 비닐봉지를 가늘게 잘라 뜨개질 재료로 사용한다.
-재활용하는 데도 지혜가 필요하다고.
“물건을 버리기 전에 용도를 바꾸어 보는 것을 제안하고 싶다. 예를 들어 환경을 위해 폴리에스테르 수세미망을 더 이상 안 쓰기로 한 날, 나는 수세미망을 버리지 않고 바느질해서 비누망으로 만들었다. 양파망도 같은 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 비누망을 쓰면 비누를 덜 쓰게 되는 장점까지 있다. ‘용도 바꾸기’를 하다 보면 물건을 덜 버리고, 덜 사게 된다. 단지 바느질만 할 줄 알아도 물건을 수선해서 쓰는 일이 자연스러워진다.”
-공구는 남성이 사용하는 것이라는 편견이 있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DIY를 하는 여성도 많고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여성 목수나 중장비 기사도 적지 않다. 결국 성별이 아니라 개인 성향에 따른 것이고, 누구나 필요하다면 공구를 쓸 수 있다. 공구는 누구나 쉽게 사용하는 전기밥솥이나 에어프라이어와 하등 다를 바 없다.”
모씨의 집 한편엔 벙커 침대를 해체하고 남은 나무 판자가 쌓여 있었다. 다른 물건을 만들 때 사용하려고 남겨놓은 것이다. “쫄보 모호연도 했는데,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길 바란다. 식당에서 뚝배기를 집을 때 쓰는 집게는 ‘플라이어’라는 공구다. 공구에 대한 편견을 걷어낸다면 얼마든지 친구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