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으로만 봤던 에곤 실레 그림을 드디어 실물로 영접!”
“줄이 너무 길어서 관람은 포기하고 멀리서 사진만 찍었더니, 루브르박물관 ‘모나리자’처럼 관람객 머리만 가득 나왔다.”
이달 초 국내외 미술시장을 뜨겁게 달군 ‘프리즈 서울(Frieze Seoul)’에서 뜻밖의 주인공이 탄생했다.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 에곤 실레(Schiele·1890~1918). 젊은 고객들이 몰린 코엑스 전시장 내부에서도 유독 리처드 내기 갤러리 부스 앞에 수백 명의 긴 줄이 늘어섰다. 유화·드로잉 등 실레의 작품 40여 점을 관람하기 위해서다. 런던의 리처드 내기는 40년 넘게 실레의 작품을 전문적으로 소개해온 갤러리다.
20~30대는 “에곤 실레의 작품을 국내서 접할 수 있는 첫 기회”라며 열광했다. 소셜미디어엔 관람 후기와 사진이 여럿 올라왔다. 동양사를 전공하는 대학생 박미나(23)씨는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미술관에서 실레 작품을 처음 보고 전율을 느꼈는데 서울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며 “1시간 이상 줄 서서 드로잉 하나하나 사진에 담아왔다”고 했다.
◇불안·저항 드러내는 청춘의 아이콘
세기말 유럽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에곤 실레는 28세에 스페인 독감으로 요절했지만, 스승인 구스타프 클림트 (Klimt·1862~1918)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로 숱한 걸작을 남겼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욕망, 불안에 싸인 인간의 육체를 뒤틀린 형태로 담았다. 매독으로 죽은 아버지, 짧은 생애에 불태운 예술혼 등 극적인 삶이 영화와 책으로 재탄생했다. 2016년 국내서 개봉한 영화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은 관객 10명 중 7명이 20~30대였고, 특히 20대 여성들이 이 영화를 가장 좋아했다는 집계가 나왔다.
왜 젊은 세대가 특히 실레에게 열광하는 걸까.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과거에도 미술대학 1학년 학생들에게 제일 좋아하는 화가를 물어보면 ‘쓰리고’(고흐·고갱·고야)가 가장 많이 나오고, 졸업할 때 물어보면 클림트랑 에곤 실레가 꼽혔다”며 “실레는 청춘의 아이콘 같은 화가”라고 했다. “깡마른 몸, 불안에 가득한 눈으로 정면을 쏘아보는 자화상에선 20대 특유의 불안과 저항 같은 정서가 드러나 있고, 젊은이들이 기성 체제에 대해 갖는 불신과도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빈으로 클림트를 보러 미술관 여행을 떠났다가 에곤 실레에게 반해 돌아왔다”는 이들도 쉽게 볼 수 있다.
◇셀카 찍듯 수없이 그린 나체 자화상
지독한 나르시시스트였던 실레는 “나는 나를 위해 존재한다”며 끊임없이 나체 자화상을 그렸다. 육체적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만 에로틱하기보다는 그로테스크하다. 일그러진 얼굴, 뒤틀린 신체, 핏기 어린 살갗을 칼질하듯 날카롭게 내리찍은 붓 자국은 자기 혐오와 공포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15세 되던 해 그는 아버지가 매독으로 고통받다 미치광이처럼 변해 죽는 걸 봤다.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는 “불편한 자세로 선 채 광기 어린 표정으로 서 있는 실레의 자화상을 보면 ‘질풍노도’라는 말이 자연스레 떠오른다”며 “’셀카’에 열광하는 요즘 젊은 세대의 감성과도 통한다”고 했다. “‘19금(禁)’ 가까운 적나라한 표현들이 일종의 해방감을 주는 것 같다. 셀카를 찍을 때 필터까지 써서 예쁘게 보정하는 것도 결국은 나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정서가 있기 때문 아닐까. 기괴하고 왜곡된 방식으로 표현한 실레의 적나라한 자화상이 우리 내면 깊숙한 곳의 민낯을 대신 표출해주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이다.”
실레의 그림은 문학작품 표지로도 애용됐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민음사) 표지로 사용된 ‘꽈리열매가 있는 자화상’(1912), 한강의 ‘채식주의자’(창비) 표지 그림인 ‘네 그루 나무들’이 대표적이다. 민음사 관계자는 “소설 주인공 요조의 불운한 삶과 흔들리는 자아가 실레의 자화상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표지로 택했다”고 했다.
한 전시 기획자는 “10년 전만 해도 실레 그림은 대여료가 워낙 비싼 데다 호불호가 갈려서 선뜻 특별전을 기획하기 어려웠지만, 요즘은 젊은 층이 워낙 좋아하는 데다 구매력 있는 젊은 컬렉터도 많아졌기 때문에 한국에서 전시를 열면 소위 대박이 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