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들! 이 로봇 모형 좀 봐. 미국 시애틀 엑스포에서 나온 거래.”
지난 12일 오후 1시 부산 기장군 국립부산과학관 1층. 특별기획전 ‘2030 미래를 향한 꿈 # 엑스포’ 전시물을 보던 한 엄마가 말하자, 다섯 살 남자아이가 뛰어간다. 둥근 유리관 머리와 집게 손을 가진 이 로봇 모형은 1962년 미국 시애틀 엑스포에 출품된 것이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일곱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엑스포에 갔다가 이 로봇을 보고 과학자의 꿈을 꾸게 됐다고 한다. 김지현(41)씨는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부산은 대한민국 제2 도시가 가지는 활력이 있었다”며 “지금은 인구도 줄고 일자리도 없다. 엑스포든 뭐든 해야 내 아들이 성인이 됐을 때까지 도시가 살아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2. 엑스포 예정 부지인 부산 동구 부산항국제전시컨벤션센터로 가는 지하철 1호선 초량역. 지하철을 내리는 사람도, 타는 사람도 모두 노인이다. 젊은 층 인구 감소로 부산이 얻게 된 별명 ‘노인과 바다’가 실감 나는 장면이다. 역에서 내려 컨벤션센터 옥상으로 올라갔다. 눈앞에 북항과 바다가 펼쳐지고, 그 앞에는 오페라하우스, 마리나 등 북항 재개발 조감도가 놓여 있다. 김호일(74)씨는 “원래는 이 일대가 항만과 철도, 도심이 다 있는 최고 번화가였다”며 “엑스포라도 열리면 싹 정비되면서 도심이 좀 살아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배우 이정재와 가수 방탄소년단, 작가 이우환. 이들 모두가 한 가지 목표로 뭉쳤다. 바로 ‘2030 부산엑스포 유치’다.
지난 7일 정부는 ‘2030 세계박람회(엑스포)’를 부산에 유치하기 위한 계획서를 프랑스 파리에 있는 국제박람회기구(BIE) 사무국에 제출했다. BIE에 따르면, 현재 계획서를 제출한 국가는 대한민국 부산, 이탈리아 로마, 우크라이나 오데사,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등이다. 이 네 곳 중 내년 3월 현지 실사를 거쳐 11월 5차 프레젠테이션 후 최종 투표로 개최지가 결정된다. 정·재계·문화계 주요 인사들은 왜 부산엑스포 유치에 발 벗고 나섰을까. 부산은 왜 엑스포 개최에 사활을 걸었을까.
◇젊은이들 떠나는 부산
부산이 2030 세계엑스포에 뛰어든 건 8년 전인 2014년이다. 인구와 일자리 감소, 쇠락하는 지역 경제를 타개할 대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최근 부산에 붙은 별명은 ‘노인과 바다’. 젊은이들이 떠나 남은 건 노인과 바다밖에 없다는 뜻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부산은 지난해 12월 기준 전체 인구 335만380명 가운데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율이 20.4%(68만1885명)로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전체 인구도 10년 전과 비교해 약 23만명이 줄었다. 반면 지난해 인천 인구는 294만8375명으로 10년 전보다 약 14만명이 늘었다. 박근록 부산광역시 유치기획과 과장은 “이대로라면 조만간 제2 도시라는 타이틀을 인천에 빼앗길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큰 이유는 일자리 감소다. 부산 경제를 이끌었던 조선업 불황과 향토 기업 부진도 있지만, 대기업이 없다는 이유도 크다. 박 과장은 “부산 내에는 국내 100대 기업이 단 한 곳도 없다”며 “그렇다 보니 부산에서 대학을 나와도 일자리를 찾아 서울이나 수도권으로 떠나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이 꺼낸 카드가 ‘엑스포’다. 우리에게는 1993년 대전엑스포, 2012년 여수엑스포 등으로 익숙한 단어이지만, 이들은 ‘인정 엑스포’라 부르는 전문 엑스포일 뿐, 월드 엑스포로 부르는 ‘등록 엑스포’는 국내에서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다. 등록 엑스포는 5년마다 열리고, 6개월 이내로 개최되며, 개최국은 부지만 제공하고, 참가국이 자국 경비로 부담한다. 일본은 2025 오사카 엑스포를 비롯해 총 3번 등록 엑스포를 개최했다. 중국도 2010년 상하이 엑스포가 등록 엑스포였다. 부산시는 “엑스포로 인한 경제적 가치는 61조원, 취업 유발 효과는 50여 만 명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특히 부산시는 현재 추진 중인 북항 재개발 사업과 가덕도 신공항 사업 등을 엑스포를 계기로 가속한다는 방침이다.
◇이성과 감성, 두 갈래 전략
가장 큰 경쟁 도시는 사우디의 리야드다. 오일 머니를 바탕으로 한 원유 공급 전략, 자국 수주에 대한 외교 전략 등으로 유치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탈리아 로마는 고대 문명의 발상지라는 이점은 있지만, 앞서 2015년 밀라노 엑스포를 개최했을 뿐만 아니라, 2025년 밀라노 코르테나 동계올림픽도 예정돼 있다. 우크라이나 오데사는 현재 러시아와 전쟁 중이라 현지 실사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러나 만약 전쟁이 빠른 시일 내에 끝난다면 “역경을 극복하고 재건을 꿈꾼다”는 명분이 가능하다.
한국의 전략은 글로벌 기업들의 통상 네트워크를 활용한 실리 이성 외교와, K컬처를 바탕으로 한 문화 감성 외교, 두 갈래 전략이다. 리야드와 로마의 장점을 모두 취하겠다는 것. 부산엑스포 유치가 올해 국정 과제로 지정된 후 유치위원회는 총리 직속으로 정비되며 한덕수 국무총리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맡고 있는 최태원 SK 회장이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지난 6월 파리에서 열린 BIE 총회 2차 프레젠테이션은 한 총리가 진두지휘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부산 엑스포 유치에 관심이 많다. 정⋅재계와 문화계까지 가세해 엑스포 유치 활동을 가속하는 이유다. 엑스포 개최는 2030년이지만, 발표는 내년 11월이라 그 결과가 2024년 4월 총선에도 영향을 줄 거란 관측도 이를 뒷받침한다. 일각에서는 “총선용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지만, 부⋅울⋅경(부산⋅울산⋅경남)의 엑스포 개최 의지가 높아 정쟁거리로 번지지는 않을 것으로 예측된다.
문화계 인사들에게는 평창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피겨 여왕 김연아 선수가 해준 역할 이상을 기대하고 있다. 한류를 바탕으로 감성 외교를 펼치는 것이다. 부산엑스포 1호 홍보대사는 최근 ‘오징어 게임’으로 에미상 남우 주연상을 받은 배우 이정재, 2호는 가상 인간 로지, 3호는 방탄소년단이다. 방탄소년단은 다음 달 15일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5만명 규모로 ‘부산세계박람회 유치 기원 콘서트’를 연다. 부산시 관계자는 “BIE 회원국은 170개국이지만, 전 세계 아미(BTS 팬클럽)는 그보다 넓은 193국에서 분포돼 있어 현지 분위기와 홍보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방탄소년단은 내년 11월 최종 프레젠테이션에도 동행한다는 계획이지만, 멤버 중 진은 당장 올해 입대가 예정돼 있다. 이에 박형준 부산시장은 윤 대통령에게 방탄소년단의 대체 복무제 적용을 건의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병역 면제용 콘서트 아니냐”는 비판과 함께 무료로 진행되는 콘서트 개최 비용을 두고 논란이 일자, 하이브는 22일 ″콘서트 비용은 기업 스폰서 협찬과 온라인 스트리밍 광고, 더 시티 프로젝트 부대 사업 등으로 충당할 계획”이라며 “방탄소년단 역시 국가에 기여하고 싶다는 마음에 무료로 무대에 오른다”고 말했다.
재계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대한상의 회장을 맡은 최태원 SK회장을 공동 유치위원장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전 세계를 돌며 유치전에 나섰다. 2018년 평창올림픽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등으로 대표되던 재계 2세들의 업적이라면, 이번 부산엑스포는 재계 3세들의 실력 발휘 마당이 됐다는 것이다.
민관 ‘원 팀’을 외치며 국내 대기업이 모두 동원된 상황이지만, 기업별로는 조금 온도차가 있다. 사우디 실세인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가 세계 주요국 고위 인사들을 직접 만나며 지지 선언을 상당 부분 끌어낸 상황. 표면적으로는 승산이 낮은 게임에 기업 대표들이 직접 나서 ‘투자’라는 무기로 유치전을 펼치는 게 부담스럽다는 말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170국 중 이미 60국 정도가 사우디 지지 의사를 밝혔고, 현재 한국이 확보한 표는 30국 정도라는 것. 그러나 이는 자국 언론을 통해 나오는 발표일 뿐, 투표는 각국 BIE 대사들이 무기명 비밀투표로 진행되기 때문에 정부 간 모종의 합의가 있더라도 개인 의사에 따라 투표할 확률이 높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기적’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