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현지 시각) 공개된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 70주년 기념 영상. 여왕과 패딩턴 베어가 버킹엄궁 안의 여왕 접견실 안에서 마주 앉아 홍차를 마시는 모습으로 아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 로이터 연합뉴스

우리 모두는 죽음 앞에 공평하다지만 어떤 죽음은 특별한 무게를 지닙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이야기입니다. 9월 8일 ‘런던 브리지가 무너졌습니다.’(여왕이 죽었을 때를 대비해 만들어진 암호) 찰스 3세가 어머니의 뒤를 이어 새로운 왕위에 올랐고, 공휴일로 지정된 19일 국장이 치러졌으며, 가을이 다가와 낙엽이 쌓이고 있지만 여왕이 머물던 궁과 왕립공원에는 공식 애도 기간이 끝나는 오늘(27일) 아침까지도 꽃다발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시간은 언제나처럼 쉬지 않고 흘러가는데 영국인들의 마음은 아직 그 자리에 고여 있는 듯합니다. 여왕이 서거한 지 한 달 가까운 시간이 지나도록 언론에서, 길거리에서, 사람들의 마음에서 여전히 깊은 애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21세기이지만 영국에는 ‘특별한’ 신분을 타고난 왕족이 있고 대부분의 국민은 ‘평민’으로서 그들을 존중하며 살아갑니다. 왕이 없는 나라에서 나고 자란 저에겐 여전히 남의 나라 이야기 같기만 하지만요. 물론 군주제 폐지에 대한 의견도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어떤 권한도 없는 상징적 존재인 왕실을 수많은 ‘평민’ 의 세금으로 유지해야 하느냐는 것이지요. 영국 국민 중 24세 이하의 군주제 찬성 비율은 31%로, 65세 이상의 77%와는 큰 차이를 보입니다. 따라서 왕실의 존립 여부에 대한 의견 대립은 갈수록 더욱 심해질 거라 예상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왕이 영국민에게 특별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공식 청중 데이터에 따르면 여왕의 장례식은 전국에서 2천9백만 명이 시청했습니다. 여왕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25만명이 웨스터민스터 사원을 찾아 최대 17시간을 기다렸지요. 30세 여성 이모겐(Imogen West-Knights)은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군주제에 반대하는 사람이지만 여왕이 돌아가신 것이 매우 슬퍼 이곳에 왔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여왕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다양하고 복합적입니다. 일반화할 수는 없어요. 그녀는 우리에게 특별하니까요.”

영국 문화 장관 미셸 도넬란(Michelle Donelan)은 “여왕은 노조를, 웨일스를, 벨파스트를, 영국을 하나로 만드는 접착제였다”라고 말합니다. 상호 존경(Mutual respect), 관용(Tolerance) 등 영국이라는 국가가 지향하는 공통의 가치(British Value)로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하나로 묶는 존재였다는 겁니다. 전 보수당의 내각 장관이었던 데이비드 고크(David Gauke)는 여왕을 만나는 것은 모든 정치인에게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회상합니다. 브렉시트와 같은 정책에 대한 이견으로 상대와 첨예하게 대립했다가도, 품위 있고 친절한 여왕과 회의를 하고 나면 우리 모두는 하나 된 느낌을 받았다며, 심지어는 서로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내각이 결정한 정치적 사안에 대해 의견을 피력할 수 없는 왕실이지만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가치를 대변하는 여왕의 존재감은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과 이득을 뛰어넘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한평생을 국가의 수장으로 존재하며 개인적인 삶을 뒤로하고 공공 복지와 역할 수행에 평생을 헌신한 지도자의 존재는 그 자체로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왕위에 있는 70년 동안 공개적으로 감정 표현을 자제하고, 한쪽으로 기울지 않으며, 항상 예의 바른 모습을 보였고, 모든 영국민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BBC의 왕실 특파원인 조니 다이먼드는 ‘수십년 전 스스로 약속한 봉사의 삶을 산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민이 사랑하는 것을 한 데 모아 놓은 저장소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왕은 그러한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저 영국 표준의 보루입니다.”

아이들은 어린이 영화<패딩턴 베어>에서 패딩턴 베어와 마주 앉아 티타임을 갖던 모습으로 엘리자베스 여왕을 기억합니다. 모자 밑에 숨겨둔 마멀레이드 샌드위치를 건네는 작은 곰 패딩턴에게 “나도 배고플 때 먹으려고 이걸 늘 넣고 다니지”라며 손바닥만 한 핸드백에서 숨겨둔 샌드위치를 꺼내 보이는 모습은 여왕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죠. 여왕이 머물던 궁전 담벼락엔 꽃다발과 함께 영국 전역의 아이들이 싸 들고 온 마멀레이드 샌드위치가 가득합니다.

아일랜드 태생 그림책 작가 올리버 제퍼스는 왕족에 대한 의견이 어떻든 간에, 평화와 공공의 행복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던 숙녀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이 슬프다고 적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서로 친절하라”던 그녀가 없는 또 다른 세상을 맞이하게 되었다고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를 평생에 걸쳐 해 온 사람, 어떠한 제도에 대해 찬성하든 반대하든 서로 다른 생각과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는 모두를 슬픔이란 감정으로 하나로 묶는 사람. 이런 사람을 우리는 언제나 또 갖게 될까요?

영화에서 패딩턴 베어가 여왕에게 건넨 마지막 인사는 여왕 서거 후 영국 전역에서 인용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것에 대해서(Thank you, for everything).” 영면에 든 엘리자베스 2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