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도 공범이다.’
지난 2020년 세계 최대 아동 성(性) 착취물 사이트 ’웰컴투비디오’의 운영자 손정우가 2년도 안 돼 만기 출소하자 N번방 피해자 지원 단체와 여성단체들은 일제히 비난을 쏟아냈다. 손정우는 2019년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는데, 이는 비슷한 시기 계란 18개를 훔치다 잡힌 40대 남성이 검찰로부터 받은 구형과 같았다. 손정우는 2015년부터 3년간 4억원가량을 받고 3000개가량 아동 청소년 성 착취물을 유포했다. 그의 컴퓨터 하드에는 생후 6개월 된 영아가 나오는 영상물도 발견됐다. 법원은 손정우가 음란물로 얻은 수익을 은닉한 혐의로 경찰이 청구한 구속영장도 “증거 인멸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한 차례 기각했다. 법조계 안팎에선 “법원이 범죄자들에게 아동 성착취를 해도 가볍게 처벌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줬다”는 불만이 나왔다.
그로부터 2년. 대한민국 사법부가 또다시 불신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달 여성 동료 직원을 스토킹한 끝에 살해한 신당역 역무원 살해 사건 때문이다. 지난해 말 경찰이 범인 전주환에 대해 청구한 구속영장을 법원이 기각하는 바람에 살인 사건으로 이어졌다는 것. 당시 법원은 ‘주거가 일정하고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전씨를 구속하지 않았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자 영장을 기각한 판사를 징계하자는 서명운동이 시작됐고, 최근 대법원 국정감사에서도 법원 결정에 대한 질타가 쏟아졌다. 국민 눈높이와 다른 판결로 인한 사법부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알아서 형량 깎아주는 판사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은 최근 법원에서 강력 범죄자들에 대한 구속영장 신청을 잇따라 기각하면서 불거졌다. 의정부 지방법원은 지난달 경기도 고양시 한 아파트에서 10대 여중생을 흉기로 위협해 엘리베이터에서 납치하려 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42세 남성에 대한 구속영장 신청을 한차례 기각했다. 도주·재범 우려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창원지법 진주지원은 이별을 통보한 전 여자친구의 주택 배관을 타고 집에 무단 침입한 후 폭행한 20대 남성에 대한 구속영장 신청을 기각했다. 마찬가지로 도주 우려가 없다는 게 이유. 경찰은 지난해 10월 스토킹 처벌법이 시행된 이후 지난8월까지 스토킹 범죄 관련해 377 차례 구속영장을 신청했는데 이 중 123건(32.6%)이 법원에서 기각됐다. 최근 성폭력 범죄의 기각률(17%)과 비교해 매우 높은 수치다.
판사가 범죄 심각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형량의 판결을 내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서울북부지법은 지난해 6월 60여 회에 걸쳐 여성 60여 명의 신체를 불법 촬영한 남성에게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판결문에는 ‘범행을 자백하고, 반성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그 이유를 적시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해 아동 청소년 성착취물 소지 혐의로 재판을 받은 20대 남성에게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군 입대를 앞두고 있어 성실히 군 복무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는 게 판결의 주요 이유였다. 최근 일부 스토킹 범죄 재판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과거 연인 관계였다는 이유로 감형되기도 했다. 서혜진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국민은 단순히 형벌 수위가 낮은 것보다 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유로 감형을 하는 것에 더 분노한다”고 했다.
기준 모호한 구속 영장 발부
법조계에선 법원의 구속 결정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에 대해 “불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하는 국내 법규상 피해자를 해칠 우려가 있어도 함부로 구속시킬 수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형사소송법에는 구속을 결정할 때 피의자의 주거가 일정하지 않거나 증거 인멸, 도주 우려가 있을 경우에만 구속 수사할 수 있다. 신당역 살인 사건 피의자인 전주환이 지난해 10월 구속되지 않은 것도 풀어주면 추가 스토킹을 저지를 우려가 있지만 이 사항들에 해당하지 않다고 법원에서 판단한 것.
문제는 법정 구속에 대한 기준이 모호해 판사의 자의적 해석이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세부적으로 범죄의 중대성, 재범 위험성, 피해자 위해 우려 등도 구속을 결정할 때 고려되는 대상이다. 하지만 어떤 범죄가 중대한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은 없다. 법원이나 영장전담판사에 따라 구속 여부를 정하는 기준이 다를 수 있다는 것. 일각에선 법원이 과거 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전주환의 직업 안정성을 고려했다는 추측도 나왔다. 또 판결 사유를 상세하게 담는 판결문과 달리 구속영장이 기각될 때는 ‘혐의가 소명되지 않았다’는 식으로 기각 사유를 간략하게 기재하기 때문에 수사 당국이 수사 내용을 보완해 영장을 재청구하기가 쉽지 않다.
한 여성 변호사는 “법원이 최근 들어 불구속,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지켜 영장 발부를 최소화한 것이 형사사법에 대한 국민적 불신으로 이어졌다”며 “피의자는 구속적부심사를 통해 영장전담 판사에 불복할 수 있지만, 검사는 이에 대응할 불복절차가 없어 형벌권 행사와 범죄 피해자 보호에 어려움이 발생하고 있다”고 했다.
유독 성범죄 사건에서 가해자에 관대한 이유에 대해 법조계에선 “판사가 피해자 의견을 잘 듣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가 판결 논란을 키운다”는 말도 나온다. 형사 재판의 경우 판사가 법정에서 피해자를 직접 대면하는 경우가 적고 피고인의 말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듣기 때문에 가해자 측 사정을 판결에 더 반영할 우려가 있다는 것. 기존 판례를 중요시하는 법원의 보수적 성향상 적지 않은 판사들이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이 낮았던 1950, 60년대 내려진 판례를 따르다 보니 중형을 부과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지적도 있다. 판사 출신 한 변호사는 “스토킹 범죄의 경우 반의사불벌죄(피해자가 원하지 않으면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음)에 해당해, 피해자와 가해자가 합의할 경우 판사가 엄벌을 내리지 않는다”며 “문제는 법원 내부에서 이런 구조적 한계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개선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영장재판 항고제’ 도입해야
사법부 판결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커지면서 대법원은 최근 현행 구속 제도의 문제점을 보완할 대안으로 ‘조건부 석방제’ 도입을 발표했다. 불구속을 하되 피의자에게 위치추적기를 부착하거나, 거주 제한 등의 조치를 취해 보복 범죄를 막는 제도다. 또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스토킹 범죄의 양형 기준도 조만간 다시 논의할 예정이다.
하지만 법조계에선 스토킹 범죄 피의자의 구속영장 청구가 기각됐다는 사실을 피해자가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시스템을 우선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행법상 사건 피의자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가 기각돼도 피해자는 바로 그 사실을 알기 어렵다. 신당역 사건 피해자의 경우 지난해 전주환의 영장 기각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영장 청구가 기각될 경우 피해자가 바로 통보를 받아야 신변 보호조치에 신속하게 나설 수 있다는 취지다.
판사가 내린 구속영장 발부 결정에 대해 다시 판단을 받을 수 있는 ‘영장재판 항고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부당한 판결이 나올 경우 항소하는 것처럼 구속영장 청구가 기각됐을 때 상급심에서 영장 기각이 타당했는지를 심사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영장재판에 대한 검찰의 불복을 허용하면 구속 사유에 대한 판례가 축적돼 영장재판의 예측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며 “이를 통해 검찰의 무분별한 영장 청구와 법조 비리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