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둘레길 제6구간 시험림길의 백미인 삼나무 숲 ‘하늘길’을 드론으로 촬영한 모습. 삼나무 군락 사이로 뻗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허재성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걷기 천국’인 제주도에는 올레길만 있는 게 아니다. 한라산의 비경(祕境)을 간직한 ‘한라산 둘레길’도 있다. 한라산 꼭대기 백록담을 향해 수직으로 오르는 등산길이 아니라, 한라산의 허리라고 할 수 있는 해발 600~800m의 국유림 일대를 수평으로 한 바퀴 돌 수 있는 숲길이다. 2010년부터 단계별로 조성돼 현재 걸을 수 있는 코스는 모두 9개, 70.8㎞. 울창한 천연림에서부터 오름, 계곡까지 제주의 자연 생태계를 속살 그대로 체험할 수 있어서 지난해에만 85만명이 한라산 둘레길을 찾았다.

하늘 높고 바람 쾌적한 10월, 오로지 걷기 위해 제주로 떠나야 할 이유가 생겼다. 한라산 둘레길 9개 코스 중 그동안 일반 탐방객들에게 통제됐던 6구간 시험림길이 지난 1일 완전히 개방됐기 때문이다. 아직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숲길에 발자국 찍으면서 코로나로 찌든 심신을 추스를 기회다. 한라산 둘레길을 관리하는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 전범권 이사장과 함께 미답(未踏)의 길을 먼저 걸었다.

◇비밀의 숲길, 드디어 열리다

시험림길 코스는 한라산의 남동사면 해발 300~750m에 있다. 서귀포시 남원읍 이승악오름에서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한남시험림 구간을 통과해 사려니숲길과 이어지는 길이다. 시험림길 삼거리까지 9.4㎞로 조성됐다. 한라산을 서너 시간 걷는다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천연림과 임도(林道)를 활용해 조성했기 때문에 대체로 평탄한 길이다. 다만 트레킹 코스로 이뤄진 숲길이라 산행용 등산화와 스틱 등 등산용품을 챙기는 게 좋다.

시험림길에 금새우난초가 피어있는 모습.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

전범권 이사장은 “한라산 생태계를 보여주는 둘레길 중에서도 시험림길은 자연림과 인공림이 어우러진 동식물의 보고”라며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가 관할하는 한남시험림 구역이 포함돼 있어서 그동안 출입을 통제했으나 제주의 천혜 자연길을 최대한 많은 탐방객들이 누릴 수 있게 하자는 취지로 오랜 협의 끝에 드디어 개방이 이뤄지게 됐다”고 했다.

시험림길에서 만날 수 있는 참꽃나무.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
전범권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 이사장(오른쪽)이 시험림길 하천에서 잠시 쉬고 있는 모습이다. /허재성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발길 닿는 곳마다 독특한 제주의 식생과 만난다. 시험림은 멸종 위기 식물 등을 포함해서 다양한 식물 종자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곳. 극소수 개체만 남은 희귀식물 ‘성널수국’을 비롯해 이곳에 자생하는 식물만 337종에 이른다. 온대와 난대, 아열대 기후 특성을 함께 갖고 있어서 붉가시나무, 새덕이 등 상록활엽수와 서어나무, 졸참나무 등 낙엽활엽수가 함께 뿌리내리고 있다. 편백 채종원(採種園)도 만날 수 있다.

시험림길의 포토존인 '하늘길'. 하늘로 쭉쭉 뻗은 삼나무 군락 사이로 열리는 파란 하늘이 경관의 백미다. /허재성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경관의 백미는 삼나무가 만든다. 피톤치드 뿜어내는 숲길 한가운데서 그림 같은 삼나무 숲을 만난다. 하늘로 쭉쭉 뻗은 삼나무 군락 사이로 열리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전 이사장이 “여기가 시험림길의 포토존인 하늘길”이라고 했다. 각도에 따라 풍광이 전혀 달라지는 것도 이곳의 묘미다. 운 좋으면 나무 사이로 유유히 이동하는 한라산 노루를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

이번에 개방한 시험림길 답사 중 만난 한라산 노루. 사람을 보고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허재성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이야기가 있는 한라산 둘레길

하늘길 말고도 시험림엔 대규모 삼나무 조림지가 곳곳에 남아있다. 삼나무 1850그루가 평균 28m 높이로 도열한 전시림에는 성인 3명이 손을 잡아야 감쌀 수 있는 거목도 있다. 이국적이고 매끈한 멋이 있지만, 사실 우리에겐 아픈 역사다. 일제가 한라산에서 산림을 대규모 수탈한 이후 일본에서 들여온 삼나무로 조림 사업이 이뤄졌다.

제주의 역사와 제주도민의 삶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건 한라산 둘레길의 강점이다. 고난과 비극의 역사 현장이자 삶의 애환이 서린 숲길이다. 길을 새로 조성한 게 아니라 일제가 당시 한라산의 풍부한 산림자원을 약탈할 목적으로 만든 ‘병참로’(일명 하치마키 도로)를 활용해 만들었다. 제주 4·3 사건 당시 군경 토벌대와 무장대가 주둔했던 흔적도 남아있다.

시험림길과 이어진 사려니숲길은 제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숲길이다. 제주시 조천읍 비자림로 입구에서 붉은오름으로 이어지는 10㎞ 길로, 이 구간을 찾는 탐방객만 연간 30만 명에 이른다. 사려니는 제주 말로 ‘숲 안’이라는 뜻. 전 이사장은 “이제 사려니숲길과 시험림길을 이어서 걷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라며 “더 많은 분들이 숲길을 걸으며 몸과 마음이 회복되는 치유 효과를 누리시면 좋겠다”고 했다. 시험림길은 10월 한 달간 개방되고, 산불 조심 기간(11월 1일~5월 15일)에 통제됐다가 내년 5월 16일 다시 열린다.

시험림길의 백미인 '하늘길'을 드론으로 촬영한 모습. 삼나무 군락 사이로 뻗어있는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허재성 영상미디어 기자

◇드넓은 대지 위에 펼쳐진 기암괴석

푸른 숲길만 걷기 아쉽다면 인근 제주시 조천읍에 있는 제주돌문화공원을 권한다.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의 돌에 관한 전설을 테마로 327만㎡(100만평) 대지 위에 제주의 민속과 문화, 신화를 집대성했다. 제주에 있는 수많은 테마파크 중에서도 규모와 정성 면에서 압도적이다. 한 남자의 땀과 꿈이 만들어낸 기적의 공간이다. 백운철씨가 평생 모은 기암괴석(奇巖怪石)과 오래된 석물 2만점을 내놓았고, 제주도가 돈과 땅을 댔다.

제주돌문화공원에 야외 전시된 석상 앞으로 관람객들이 지나고 있다. / 허재성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자연이 빚은 거대한 돌 앞에 서면 누구라도 겸허해진다. 수만 년을 버텨온 제주 바위가 대지 위에 펼쳐져 있다. 화산이 빚어내 제각기 기묘한 형상을 갖게 된 돌이다. 거대한 돌하르방과 두상석이 늘어선 야외 전시장, 옛 초가 마을을 재현한 돌한마을 등 볼거리가 많아 제대로 보려면 서너 시간 걸린다. 전기차를 이용하면 좀 더 편하게 둘러볼 수 있다. 관람료 성인 5000원, 청소년 3500원. 12세 이하와 65세 이상은 무료다. 매주 월요일 휴원.

재일 한국인 건축가 이타미 준이 설계한 방주교회.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를 모티브로 세웠다. / 허재성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물, 바람, 돌이 어우러진 ‘하늘의 교회’

서귀포시 안덕면으로 이동하면 인간이 이룩한 건축과 미술이 있다. 재일 한국인 건축가로 유명한 이타미 준(유동룡)이 설계한 방주교회와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본태박물관은 물과 바람, 돌이 건물과 잘 어우러져 있는 공간이다.

방주교회는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를 모티브로 세웠다. 교회 외관은 야트막한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야말로 물 위에 떠있는 방주의 형상이다. 이타미 준은 건축물과 하늘의 조화를 중시했다. 교회의 긴 지붕선 양 끝을 하늘 향해 추켜올린 것도 이 때문. 방주교회가 ‘하늘의 교회’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교회 내부에서도 ‘건축물은 자연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이타미 준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천장까지 이어진 나무 기둥들 사이로 유리창이 나 있어 예배당 안으로 자연광이 들어온다. 2010년 한국건축가협회 대상을 수상했다. 방주교회 인근에는 이타미 준의 또 다른 작품들도 모여 있다. 제주의 자연을 담은 ‘수(水)·풍(風)·석(石) 박물관’, 제주도 오름을 본떠 만든 ‘포도호텔’ 등이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본태박물관. 건축가 특유의 노출 콘크리트와 한옥 담장이 조화를 이뤘다. /본태박물관

본태박물관은 안도 다다오 특유의 노출 콘크리트 건물이 한국의 전통 흙담 및 정원과 잘 어우러졌다. 본태(本態)라는 이름은 인류 본래의 근원적 아름다움을 탐구한다는 뜻. 내부에선 백남준, 구사마 야요이, 제임스 터렐부터 목가구, 소반, 조각보, 꼭두 등 동서양 미술의 다양한 컬렉션을 감상할 수 있다. 올해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특별전 ‘삶을 아름답게-생활을 풍요롭게’가 이달 14일부터 12월 31일까지 열린다. 한국 민화를 중심으로 전통 공예·미술 작품부터 현대 미술까지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전시다. 입장료 성인 2만원, 학생 1만2000원, 어린이 1만원. 연중무휴.

서귀포 본태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놓인 하우메 플렌자의 ‘칠드런스 소울(Children’s soul)’. /본태박물관


숲길 걸은 후엔 육수 진한 고기국수 한 그릇

한라산 둘레길 인근 맛집
한라산 둘레길 숲길 탐방객 사이에서 소문난 ‘사려니 국수’의 고기국수와 멸치고기국수(앞). / 허재성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제주도 가면 꼭 맛보는 음식 중 하나가 고기국수다. 제주시 조천읍 사려니 국수(064-782-9056)는 사려니 숲길 탐방객들 사이에서 소문난 맛집이다. 숲길을 걸으며 몸과 마음을 비운 뒤, 허기진 배를 채우러 온다. 고기국수는 면이 쫄깃하고 육수가 특히 깊은 맛을 낸다. 시원한 맛을 원한다면 멸치로 국물을 낸 멸치고기국수를 권한다. 고사리육개장도 별미다. 고기국수, 멸치고기국수 각각 8000원, 고사리육개장 9000원. 매주 수요일 휴무.

조천읍 비자림로 금보가든(064-782-7158)은 흙돼지 두루치기와 접작뼈국을 먹으러 제주도민들이 즐겨 찾는 곳. 흙돼지 두루치기 1인분 8000원. 고기가 익어갈 때쯤 콩나물, 무생채, 파를 넣고 지글지글 볶아준다. 뚝배기에 나오는 접작뼈국 역시 8000원. 하얀 국물이라 담백해 보이지만 칼칼한 맛이 일품이다. 조천읍 함덕리에 있는 카페 델문도(064-702-0007)는 에메랄드빛 제주 바다가 잘 보이는 함덕해변에 자리해 그림 같은 풍광으로 소문났다. 빵 굽는 냄새와 커피 향, 창밖에서 철썩이는 파도 소리까지 오감이 열리는 곳이다.

서귀포시에선 향토음식점 삼보식당(064-762-3620)이 유명하다. TV조선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에서 허영만이 “서귀포 오면 아침에 꼭 들르는 식당”이라고 소개한 곳이다. 오분자기와 해물, 성게알까지 듬뿍 넣은 뚝배기도 인기 메뉴이지만, 단골들은 서귀포 토박이 주인장이 끓여오는 옥돔 뭇국을 찾는다. 전복 뚝배기 1만6000원. 매달 둘째, 넷째 수요일은 휴무.

서귀포시 안덕면 본태박물관 내에 있는 카페 본태(064-792-8106)도 인기다. 멀리 산방산이 한눈에 펼쳐지는 야외 테라스에서 커피 한 잔 마시는 여유를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