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 함께했던 시간은 이젠 추억으로 남기고 서로 가야 할 길 찾아서 떠나야 해요.”
경기도 고양시의 한 고등학교 교실. 공일오비의 ‘이젠 안녕’을 학생들이 다 같이 부르는 가운데, 칠판엔 커다란 글씨로 ‘시현아 잘 가’라고 적혀 있다. 주인공 박시현(17)양 자리엔 작별의 인사말과 함께 딸기우유, 과자, 초콜릿 등이 수북이 쌓였다. 이름하여 ‘자퇴 파티’. ‘자퇴했어요, 마지막 등교 브이로그(일상 비디오)’라는 내용으로 박양이 올린 동영상 속 내용이다. 마지막 등교 날 같은 반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과 학교에 자퇴원을 제출하는 모습도 영상에 담겼다.
최근 10대를 중심으로 ‘자퇴 브이로그’가 인기를 끌고 있다. 흔히 ‘자퇴는 곧 부적응’으로 생각하던 과거 인식과 달리, 요즘 청소년들은 자신이 세운 인생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퇴를 결정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일반 정규교육 과정에서는 배울 수 없는 과목을 스스로 찾아가거나, 일찌감치 창업을 선택한 경우, 혹은 유튜브 영상 제작자로 변신하는 등 공교육 안에서는 펼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 자퇴를 선택한다.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자퇴 파티도 열고 이를 영상으로 남긴다. 자퇴를 문제적 행동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선택’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유튜브에 올라오는 각종 ‘자퇴 브이로그’에는 ‘자퇴 Q&A’ ‘자퇴 설득’ ‘자퇴 후 계획’ ‘내가 자퇴한 이유’ 등이 담겼다. ‘자퇴생 의류 쇼핑몰 사장’ ‘자퇴 후 일상’ 등의 영상이 올라오기도 한다. 주 시청자인 10대들은 “혹시 담임선생님께 어떻게 첫말을 꺼냈나요?” “교장선생님과도 상담을 하나요?” 같은 질문을 하거나 “자퇴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주네요”라는 댓글을 단다. 지난 5월 자퇴한 정채윤(16)양은 “학교 다닐 때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앓았는데, 자퇴가 나한테 필요한 선택인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브이로그가 도움이 됐고 부모님과 대화를 나눈 뒤 최종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여성가족부가 지난 5월에 발표한 ‘2021 학교 밖 청소년 실태조사’에서도 학교 밖 청소년 중 37%는 학교를 그만둔 이유로 “학교 다니는 게 의미가 없었다”고 답했다. 또 응답자의 29%는 “다른 곳에서 원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라고 했다. 3년 전 진행한 같은 조사에 비해 원하는 것을 배우려고 학교를 나간 응답 비율은 6.2%p 증가했는데, “공부하기 싫어서, 학교 분위기가 맞지 않아서”라는 응답 비율은 8.3%p 줄어들었다.
자신의 주관을 갖고 학교를 떠난 이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 공부하고 싶은 것으로 가득 채운 생활”이라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영화를 공부하고 싶어 2년 전 학교를 떠난 조윤의(18)양은 “문제를 풀고 암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성취감을 느낀 적이 없다”며 “진짜 내 세계를 넓히는 경험과 공부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학교를 떠난 후론 영화를 분석하고, 스토리보드를 짜고, 시나리오 구성 스터디를 하며 영화과 진학을 준비하고 있다. 인터넷 서버와 데이터베이스 등을 구축하는 백엔드 개발자 쪽으로 진로를 준비하고 있는 김찬(17)군은 “학생들마다 적성과 잘하는 것이 모두 다른데도 일렬로 줄을 세워 평가하는 학교 교육이 싫었다”고 했다. 김군의 하루는 코딩 학습, 해커톤, 코딩 콘퍼런스 등 같은 일정으로 가득 차 있다.
자퇴생 중에는 내신이 중요한 수시를 포기하고 정시를 통해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학교를 떠나는 경우도 있다. 실제 ‘자퇴 후 독학 재수학원에서의 하루’ 같은 영상들이 유튜브에 올라오고, 자퇴 후 오히려 대학을 일찍 진학한 경험을 공유하는 동영상도 있다. ‘검정고시연대생’ 채널을 운영하는 서문용(32)씨는 “낮은 내신성적 때문에 자퇴를 고민하고 정시에 ‘올인’ 하려는 학생들이 수도 없이 상담해온다”며 “내신이 낮다면, 순수하게 입시 전략으로만 따져봤을 때 자퇴하는 게 낫다”고 했다. 서울의 한 사립고 교사는 “일반고 중엔 면학 분위기가 좋지 않아 혼자 인터넷 강의를 듣거나 학원을 다니는 쪽이 낫다고 판단해 자퇴를 고민하는 학생이 적지 않다”고 했다. 광주광역시의 한 사립고 교사 박지현(35)씨는 “예체능 쪽으로 진로를 잡고 일찍 학교를 떠나는 경우도 있고, 의대 진학 희망생 중 내신이 중요한 수시 전형을 포기하고 정시에만 집중하기 위해 학교를 떠나는 학생도 있다”고 했다.
자퇴생이 늘어나는 현상을 두고 일각에선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육학과 교수는 “자퇴는 집에서 아이의 꿈을 뒷받침할 수 있고, 학교 밖에서도 본받을 만한 멘토와 전문가를 만날 수 있을 때 원했던 결실을 볼 수 있다”며 “막상 학교를 나가보면 자연스레 만날 수 있는 친구도 사라지고, 원래 꿈과 다르게 방황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감안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여가부 관계자는 “학교 밖 청소년은 진로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거나, 친구들과 관계가 단절되고 도움을 요청할 곳을 찾지 못해 고립감을 느끼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했다.
다만 학교 밖의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학생이 늘어나는 것을 두고 전문가들은 “학습자들의 개성을 존중하기 어려운 공교육의 한계”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여가부 조사에서 “특기를 살리거나 진로 탐색의 기회 등이 있었다면 학교를 계속 다녔을 것”이라는 대답이 88%를 넘었다. 김성열 경남대 교육학과 교수는 “다원화돼 가는 사회에서 개개인의 특성을 살릴 수 있도록 공교육 제도 운용이 유연해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 소장은 “교과서의 생각에 토씨 하나 달지 않고 숙지하는 교육 패러다임에서,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을 깨우고 자기만의 문제의식을 개발할 때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