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과의 전쟁이 필요하다.”
최근 국내에 마약 사범이 급증하면서 정부와 치안 당국이 마약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1일 국무회의에서 “마약 사범에 대한 사법처리도 중요하지만 중독자 재활도 중요하다”며 종합적인 마약 관련 대책을 마련하라고 주문했다. 마약과의 전쟁을 앞두고 윤 대통령이 마약 사범의 ‘재활’을 강조한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최근 콜롬비아를 두고 벌어지는 마약 논쟁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무슨 얘기일까.
지난 8월 콜롬비아 대통령으로 취임한 구스타보 페트로가 취임 직후 “미국이 벌인 마약과의 전쟁은 실패했다”며 전 세계를 놀라게 할 아이디어를 내놨다. 바로 ‘마약 거래 합법화’. 세계 최대 코카인 생산국인 콜롬비아에서 코카인 거래를 합법적으로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얘기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주장 같지만, 국내외 마약 전문가들 사이에선 “웃고 넘길 얘기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1430조원 쏟아부은 美 마약 전쟁의 실패
외신들은 “페트로 대통령의 마약 합법화 주장은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1971년 선포한 ‘마약과의 전쟁’이 50년이나 지속했음에도 상황은 오히려 악화했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전했다. 지난 50년간 미국이 마약과의 전쟁에 투입한 예산은 약 1조달러(약 1430조원). 이 중 수십억 달러는 콜롬비아의 마약 카르텔과 코카인 농장을 제거하기 위해 콜롬비아 군과 특수부대를 지원하는데도 들어갔다.
하지만 콜롬비아의 코카인 생산은 도리어 늘었다. 외신에 따르면 미국 내 소비되는 코카인의 90%는 여전히 콜롬비아에서 공급되고, 지난 10년간 코카인 생산량은 3배 가까이 늘었다. 이런 상황에서 페트로 대통령은 미국과 유럽이 자국 내 마약 수요를 줄이기 위한 강력한 대책을 내놓지 않는 한 중남미 전체가 마약 거래 합법화를 이뤄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중남미 전체가 코카인 생산과 공급을 합법화하고 정부와 국제 기구가 이를 관리하게 되면 현재 비정상적으로 높게 책정된 코카인 거래 가격을 낮출 수 있고, 중남미 농부들이 코카인을 몰래 생산할 유인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 미국은 “마약 거래 합법화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전문가들은 “페트로의 주장은 결국 미국부터 마약 정책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미국이 중남미에 개입해 마약 공급을 차단하는 데 집중하기보다 미국 내 마약 수요를 줄이는 것을 더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이 주도한 마약 전쟁은 미국 내 마약 가격을 폭등시키는 양상으로 전개됐다. 수요·공급 법칙에 따르면 공급이 줄면 가격이 오르면서 수요도 줄어야 하는데, 마약은 강한 중독성 탓에 가격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줄지 않는 비탄력적 특징이 있다. 결국 마약 거래에 성공만 하면 막대한 돈을 벌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면서 미국과 자국 정부의 단속 및 제거 작전에 대응하는 마약 갱단, 즉 카르텔이 중남미에서 번성하게 됐다. 콜롬비아의 전설적인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한때 세계 10대 부자에 꼽힐 정도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콜롬비아 대법원을 무장 공격할 정도의 군사력과 거대한 카르텔을 갖출 수 있었던 것도 미국의 막대한 마약 수요가 카르텔 수익을 뒷받침한 덕분이기도 하다.
◇”한국의 마약 수요 억제 정책은 전무”
국내 마약 전문가들은 최근 국내 마약 사범이 급증하는 것에 대해 “우리나라도 공급 차단에만 집중하고 마약 수요 억제에 실패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국내 마약 사범은 최근 3년 새 해마다 1만6000명 이상이 검거되고 있는 데다 올해 상반기에 적발된 마약 사범만 8575명으로 전년 대비 13.4% 증가했다. 지난 6월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전국 27개 대규모 하수처리장을 검사한 결과에서는 모든 곳에서 필로폰 성분이 검출됐다. 마약 범죄 전문가인 박진실 변호사는 “통상 마약류 범죄의 암수범죄(수사기관이 인지하지 못했거나 해결되지 않아 범죄 통계에 집계되지 않은 범죄)율이 검거율의 약 28배라는 추산에 따르면 국내에서 마약에 연루된 사람은 30만명을 훌쩍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우리 정부의 마약 수요 억제 정책이 턱없이 빈약하다는 데 있다. 마약 수요를 억제하려면 그 위험성을 교육해 예방하는 정책과 마약 사범들이 중독에서 벗어나도록 철저한 재활 치료와 관리가 이뤄져야 하지만 우리나라엔 상설된 컨트롤 타워도 없고 예산과 정책도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한 마약 전문가는 “최근 10~20대 마약 사범이 폭증한 것은 예방 정책이 무너진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검찰청 통계에 따르면 2017년에 2331명이던 10~20대 마약 사범은 지난해 5527명으로 5년 새 2.5배가 늘었다. 박진실 변호사는 “이들에게 필로폰은 마약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신종 마약류인 합성대마, MDMA(일명 엑스터시), 케타민 등에 대해서는 ‘클럽 갈 때 재밌게 놀려고 먹는 것’ 정도의 안이한 인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재활 치료는 더 열악한 상황이다. 대검찰청 통계에 따르면 국내 마약류 사범의 재범률은 매년 35~40%에 달하고 마약 사범의 재복역률은 45.8%로 국내 범죄자 평균 재복역률(26.6%)의 2배에 이른다. 김영호 한국중독전문가협회 회장은 지난달 국회 토론회에서 “마약은 범죄뿐만 아니라 중독이라는 질병의 측면이 있는데 이런 인식이 부족하다”며 “마약 중독의 주무 부처가 식약처인지 보건복지부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컨트롤 타워가 없고 전문가도 너무 없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마약 중독자 재활 및 치료를 맡는 주체도 식약처 산하기관인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가 거의 유일하다.
마약 사범을 약물중독재활센터에 수용해 치료를 받게 하는 치료 감호 제도도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마약 사범 1만6153명 가운데 6205명이 재판에 넘겨졌는데, 이 중 약물중독재활센터에서 치료받은 수형자는 18명에 그쳤다. 법조계 인사들은 “현행법상 치료 감호를 검사가 청구해야만 법원이 허용할 수 있는 데다 검사 대부분이 마약 사범에게 징역형만 구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마약 사범을 강력하게 처벌해야 수요를 억제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전문가들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지적한다. 미국도 마약 투약자들을 대거 교도소에 수감했지만, 수요는 억제하지 못하고 교도소 수감자만 폭증시켰다. 박진실 변호사는 “중국의 경우도 마약 공급자에 대해서는 사형 등 중형에 처하지만 마약 투약자를 똑같이 처벌하진 않는다”며 “무거운 처벌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제대로 된 재활·치료로 마약 수요를 억제하는 게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배준용 주말뉴스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