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인권, 자유!”
지난 8일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앞에서 이란인 120여 명이 한국어와 영어, 이란어로 이 단어를 외치며 걸었다. 지금 이란에 없는 세 가지다. 이어 ‘마흐사 아미니’란 이름이 함성처럼 터져 나왔다.
22세의 마흐사 아미니는 지난달 13일(현지 시각)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도순찰대에 체포됐다가 사흘 만에 숨졌다. 이란 당국은 아미니가 평소 앓고 있던 질환 때문에 사망한 것이라 주장했으나, 구타를 당해 숨졌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이란 전역에 반정부 시위가 확산하는 도화선이 됐다. 지난 8일 기준 최소 185명이 경찰의 과잉 진압 등으로 사망했고, 이란 정부는 인터넷 접속을 차단한 상태다.
이날 한국에 사는 이란인 120명은 이란 민중가요인 ‘나의 어릴 적 친구’를 부르며 역삼역 3번 출구부터 강남역까지 테헤란로를 따라 걸었다. 이 노래는 1979년 이란혁명 당시 민중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로 이란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이란 여성 박씨마씨는 “당시 이 노래를 부르며 혁명으로 들어선 정부가 지금 이란 여성의 권리를 억압하고 있다”며 “이에 저항하는 이란인들이 이 노래를 다시 부른다는 게 아이러니하지 않으냐”고 했다. 지금 이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튼, 주말>이 국내 이란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여성, 인권, 자유가 없다
이날 테헤란로 시위에 나온 이란 여성들은 대부분 이름과 얼굴 밝히는 것을 어려워했다. “(이란에 입국했을 때) 공항에서 바로 체포당할 수도 있기 때문(석사 과정생 A씨·28세)”이라고 했다. “언젠가 이란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지금 이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요. 지금 이란에선 무슨 일이든 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이란에서 여동생과 남자 친구가 사는 집에 경찰이 총으로 창문을 깨고 들이닥쳤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시위에 참가한 사실이 알려져서요. 지금 둘은 도망자 신세인데, 3주째 인터넷이 잘되지 않아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어 걱정이 큽니다(유학생 B씨·27세).”
그럼에도 이들이 시위에 나온 이유는 단호했다. 이란 여성의 자유, 나아가 모든 이란 국민의 자유 때문이다. B씨는 “전 세계가 자유롭게 살고 있는데, 이란 여성들은 평범하게 살 자유조차 없다”며 “정부가 시위대를 폭력으로 학살한 순간부터 이건 모두의 인권과 자유에 관한 문제가 됐다”고 했다.
이날 유학생 아이샤(24)씨는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밝히고 시위대의 맨 앞에서 아미니의 이름을 외쳤다. 그는 ‘이름을 밝히는 게 무섭지 않으냐’는 질문에 “지금 그곳(이란)에서 벌어지는 일에 비하면 이름이나 얼굴이 공개되는 건 별일 아니다”라고 했다. 아이샤는 지난 5일에는 주한 이란 대사관 앞에서 히잡 강제 착용에 저항하는 의미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이란에서는 가족이나 친구가 죽었을 때 머리카락을 자르며 애도한다. 아이샤는 “아미니에 대한 추모이자 고작 머리카락 때문에 사람이 죽는 다는 것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라고 했다. 이날 시위에 참여한 여성들은 마스크는 착용했지만, 아무도 히잡은 쓰지 않았다.
◇히잡이 뭐기에
이란에서는 만 9세 이상의 여성은 히잡을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한다. 외국인도 예외는 없다. 이를 어기면 최대 60일간 구금을 당하거나, 벌금을 내야 한다. 2005년 신설된 지도순찰대가 이번 아미니 사태처럼 시시각각 도시를 돌면서 이를 단속한다.
실제 이날 시위에서 만난 이란의 젊은 여성들은 상당수가 지도순찰대에 체포되거나, 체포될 뻔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A씨는 “이란에서 대학을 다닐 때 화장도 하지 않고, 긴 바지에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헐렁한 윗옷을 입고 히잡을 썼는데도 지도순찰대에 잡혔다”며 “윗옷이 더 길게 내려와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고 했다. A씨는 옷을 더 정숙하게 입겠다고 서약한 다음에야 풀려났다.
한국에 온 지 2년 됐다는 C씨(24)도 그런 경험이 있다. “바람이 불어 히잡이 조금 벗겨졌는데, 올바르게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도순찰대에 잡혀갔다. 당시 교육 센터라고 불리는 곳에 나 말고도 여러 여성이 잡혀왔는데, 순종하지 않고 말싸움이 붙으면 보이지 않는 다른 방으로 끌고 갔다. 아미니도 그랬을 것이다. 우리가 아미니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C씨는 “지금 이란 여성에 대한 복장 단속의 가장 큰 문제는 명확한 기준이 없다는 것”이라며 “남자들이 유혹되지 않도록 정숙하게만 입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게 얼마나 주관적인가”라고 했다. “단속하는 경찰의 취향이나 기분에 따라 기준이 바뀐다. 실적을 채워야 하는 날엔 그냥 막 잡아가기도 한다. 얼마 전엔 60대인 우리 어머니도 경고를 받았다고 한다. 이란 여성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는다거나, 번화가를 피한다거나 (지도순찰대가) 자주 출몰하는 장소를 공유하는 식으로 항상 긴장하며 살아간다.”
◇40년 전 이란은 ‘패션 리더’
이란이 처음부터 히잡에 지금과 같은 강경 태도를 보였던 건 아니다. 1960년대 팔레비 왕조 시절, 이란 여성들은 영국 패션 잡지 ‘보그’를 즐겨 읽고, 유럽과 거의 동시에 미니스커트를 입어 ‘중동의 패션 리더’로 불렸다. 1979년 한국 남성과 결혼하며 이란을 떠난 박씨마씨는 그때의 이란을 이렇게 기억했다. “히잡을 쓰지 않은 친구들과 미니스커트를 입고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했죠. 중요한 건 히잡을 쓰든 안 쓰든 그게 모두 여성들의 선택이었다는 겁니다.”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호메이니 정권이 들어서면서 모든 게 바뀌었다. 종교 원리로 나라를 통치하는 신정(神政) 체제에서 히잡을 쓰지 않는다는 건 복장 문제를 넘어 이슬람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박현도 교수는 “1979년 이슬람 혁명 전에는 히잡을 쓰는 사람들을 오히려 (시대에) 뒤처진다고 여겼다”며 “혁명 이후 호메이니 당시 지도자가 ‘히잡을 안 쓰는 건 다 벗은 것과 같다’는 말을 하면서 이란 관공서에 근무하는 여성들은 다 히잡을 쓰고 일하게 됐고, 81년부터는 모든 여성을 대상으로 이를 법제화했다”고 했다.
현재 이슬람 57국 중 여성에게 히잡 착용을 강제하는 나라는 이란·사우디아라비아·아프가니스탄 3국에 불과하다. 박 교수는 “사우디아라비아마저도 최근 85년생의 젊은 빈살만이 집권하면서 지도순찰대를 없애는 등 변화하고 있다”며 “이란의 젊은 세대가 이를 놓칠 리가 없다. 이번 시위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10·20대의 시위 참여율이 굉장히 높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이번 시위는 구세대와 MZ세대의 대결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란 현지 언론 등에 따르면, 이번 시위 참여자의 90% 가까이가 10·20대다. 이란의 MIT라 불리는 샤리프 공대 등 대학생은 물론이고 고등학생, 중학생까지도 거리로 나오고 있다.
◇한국도 연대해주길
이란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생활하는 마르잔 사트라피가 그린 만화 ‘페르세폴리스’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알라가 히잡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여자를 대머리로 태어나게 하셨을 것이다.’
박씨마씨는 “현재 캐나다에선 아미니 사망에 연루된 인물을 입국 금지하고, 프랑스 파리는 아미니를 명예시민으로 추대하는 등 전 세계에서 이란 시위와 연대하려는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다”며 “한국도 마냥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닐 수 있는 게, 북한과 절친인 나라가 이란이다. 인권을 함부로 생각하는 정부가 바뀌지 않으면 한국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한국인들도 우리 시위를 적극 지지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