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태풍’, 1982, (재)아트시지. 거대한 화면에 휘몰아치는 태풍의 위력이 유감없이 표현된 작품이다. 한 인간과 조랑말이 두려움 속에서도 태풍을 마주하고 있다.

태풍이 몰아치는 언덕에 서면 누구나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한 조각가는 태풍이 온다는 일기예보를 들으면, 일부러 그 태풍의 길을 찾아 떠난다고 한다. 그 광폭한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기 위해서 말이다.

이를 단순히 ‘예술가의 악취미’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는 몰아치는 자연의 힘 앞에서 어떤 깨달음의 순간을 체험하는지도 모른다. 사실 태풍이 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영역이다. 다만 인간은 자연의 경외롭다 못해 난폭한 힘을 견디고 받아들이며, 겸허하게 자신의 길을 헤쳐나갈 뿐이다. 이 사실을 몸으로 느끼는 일이야말로 깨달음의 경지가 아닌가. 그러고 보면, 그런 경지의 정점에 올라, 아예 ‘폭풍의 화가’라는 별명을 지닌 화가가 있었다. 변시지(1926~2013) 이야기다.

◇일본에서의 성공

변시지는 1926년 제주 서귀포에서 태어났다. 14대째 제주도에서 살았던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 부친은 신학문에 개방적이었고 교육열이 매우 높았다. 제주도에서는 제대로 자식을 교육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그는 변시지가 다섯 살이던 1931년 온 가족을 이끌고 일본 오사카로 이민을 갔다.

변시지는 명문 학교를 다니며 비교적 풍족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런데 그에게 첫 번째 인생의 시련이 찾아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동네 씨름대회에 나갔다가 부상해 평생 한쪽 다리를 못 쓰는 장애를 안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이 변시지를 깊은 고독의 세계로 인도했고, 혼자서 가만히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변시지의 일본 체류 시기 사진.

그의 장애는 2차대전 중 징병을 피하는 이유가 되었다. 1942년 2차대전이 한창일 때, 변시지는 간절히 원하던 미술대학에 입학해 서양화를 공부할 수 있었다. 오사카미술학교 졸업 후에는 도쿄로 가서, 이케부쿠로 인근 예술인촌에 아틀리에를 마련하고, 일본 미술계의 거장 데라우치 만지로의 문하생이 되기도 했다. 스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최고 권위의 미술단체 광풍회에서 22세 최연소 나이로 최고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1948년의 일이었다. 변시지의 성공은 한국 근대미술사를 통틀어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성취였다.

변시지, ‘베레모의 여인’, 1948, 일본 가누마미술관. 광풍회에서 최고상을 받았던 작품이다. 비스듬한 각도로 앉은 인물을 살짝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과감하게 처리한 점이 돋보인다.
변시지, ‘오후’, 1950, 개인소장. 변시지의 초기 풍경화는 잘 정돈된, 평온하고 조화로운 구도와 색채 감각을 보여준다.

◇창덕궁 후원에서 찾은 이상향

그에게 폭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한 것은 그가 1957년 한국으로 귀국하면서부터였다. 서울대학교에 와서 강의를 해달라는 미대 학장 장발의 제안을 받아들여 26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은 것이다. 사실 대학 강사 자리는 구실에 불과했고, 변시지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의 근원을 향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다. 일본에서 그는 “변시지의 작품엔 일본인의 기질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평을 듣곤 했는데, 그렇다면 과연 그 다름의 정체는 무엇인지 고국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한국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미술계는 계파로 분열되어 작품의 예술성보다 사적 관계로 뒤엉켜 있었고, 국전을 개혁하고자 한 그의 노력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또한 노동하는 인물을 그렸다고 해서, ‘경향성이 보인다’는 이유로 배척당하기 시작했다. 서울대 강사는 채 1년도 안 되어 그만두었고, 마포중고등학교 교사로 지내며 몇 군데 강의를 나갈 뿐이었다.

더구나 일본 체류 당시 조총련 계열에 속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의 감시 대상이 되었는데, 이 일은 오랫동안 끈질기게 변시지의 신변을 괴롭혔다. 1970년대 초 중앙정보부는 김정일의 후처 고용희의 가족과 변시지의 집안이 잘 아는 사이였다는 이유로, 변시지를 간첩으로 북한에 파견할 계획까지 꾸미고 있었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만, 당시 중앙정보부는 그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몰아갔다.” 1974년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으로 중앙정보부가 완전히 재편되면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지만, 변시지는 그 시달림의 과정을 온전히 견뎌내야 했다.

그 와중에도 변시지는 1950년대 말 일반에 개방된 창덕궁 비원(祕苑)에서 서울 생활의 탈출구를 찾았다. 그는 한국 고유의 아름다움의 정체가 후원 속에 있다고 느꼈다. 후원의 정수를 표현하기 위해, 변시지는 일본에서 배운 인상주의 양식의 붓터치를 버리고, 마치 한국의 전통 채색화에서 보는 것과 같은 섬세하고 우아한 붓질을 유화물감으로 구현하기 시작했다. 창덕궁 애련정의 기와 개수까지 똑같이 그렸다는 그의 작품은 세필로 점점이 쌓아 올려진 영롱한 색채들로 반짝인다. 도판으로 보면 마치 진부한 그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이 작품 앞에 서면 화가의 놀라운 테크닉과 작품의 황홀한 아름다움에 넋을 잃게 된다. 그는 시간을 초월한 채 고요히 서 있는 후원의 정자를 그리면서, 자신에게 불어닥친 세상의 풍파를 잠시 잊은 것처럼 보인다.

변시지의 후원 그림은 일본에서 인기가 좋았다. 전속 화랑도 있었고, 그리자마자 높은 가격으로 일본에 팔려나갔다. 변시지의 아내이자 서울대 동양화과 출신 화가였던 이학숙은 당시 그림 값으로 일 년에 한 채씩 집을 샀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변시지의 내면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숙제로 방황했다. 후원은 폭풍을 피할 수 있는 일종의 도피처인데, ‘도피’란 늘 공허함을 남기지 않는가. 그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고,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중앙정보부의 비밀 지시로 가족 간에도 오해가 생기고 마포고 교사마저 그만두게 되었을 때, 제주대학으로부터 강의 제안을 받은 것이다. 1975년 변시지는 혼자 제주로 떠났다. 자신의 근원에 더욱 가까운 곳, 그의 고향으로.

변시지, ‘길’, 1960, 개인소장. 창덕궁 후원의 가을 풍경을 그렸다.

◇제주가 만든 화가

처음에 변시지는 제주에 1~2년 정도 머무를 계획이었지만, 점차 제주의 마력에 빠져들어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변시지가 제주를 그렸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제주가 변시지를 만든 것이다. 제주는 변시지에게 어린 시절 원시 자연과 어우러진 추억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고기잡이 나간 남편을 태풍으로 잃고 절부암에 몸을 던진 아낙네의 전설이 남아있는 곳이다. 역사적으로 늘 본토의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핍박의 땅이었고, 추사 김정희와 같은 선비들에게는 유배의 땅이었으며, 4·3 항쟁으로 수많은 이가 목숨을 잃은 얼룩진 역사의 현장이었다. 절절한 사연을 안고서, 오늘도 바람을 맞으며 처연하게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고장이다. 물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폭풍’의 섬이었다.

변시지는 ‘바람’으로 시작된 제주의 역사, 그리고 그 속에 살아남은 사람을 그리기 위해서는 기존의 미술 양식을 전부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후원의 고요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그리는 방식으로는 도저히 제주의 원시적이고 척박한 미학을 담아낼 수 없었다. 그는 거친 바람을 피하는 법이 아니라, 그것과 마주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화가는 조금만 더 하면 뭔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채, 혼자 제주 생활을 이어갔다. 될 듯 말 듯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는 술에 빠져 지내며 자살바위를 배회하곤 했다.

변시지, ‘이어도’, 1980, 서울미술관 소장. 이어도는 제주인의 환상 속에 있는 섬으로, 죽어야만 갈 수 있는 낙원의 땅이다. 잦은 태풍으로 인해 죽음과 가깝게 지냈던 제주인의 의식을 반영한다.

죽음이 언뜻 지나간 자리, 절망의 끝자락에서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왔다.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난 어느 날 아침, 변시지는 현란하고 화려한 색채에 갑자기 혐오감이 밀려오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는 제주의 색을 찾아냈다. “아열대 태양 빛의 신선한 농도가 극한에 이르면 흰빛도 하얗다 못해 누릿한 황토빛으로 승화된다. 나이 오십에 고향의 품에 안기면서 섬의 척박한 역사와 수난으로 점철된 섬사람들의 삶에 개안(開眼)했을 때 나는 제주를 에워싼 바다가 전위적인 황토빛으로 물들어 감을 체험했다.”

이후 그의 작품은 노란색과 검은색만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후원을 그렸을 때의 풍부하고 화려한 색채를 다 버리고 극소의 색과 선만을 남기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천지현황(天地玄黃), 즉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렜던 태초의 모습, 그 원초적인 에너지로 가득한 상태 그대로를 화면에 옮기고자 했다. 화풍이 180도 바뀌자 일본의 화상들이 이런 그림은 사지 않겠다고 거부했지만, 화가는 개의치 않았다.

변시지, ‘폭풍의 섬’, 2005, 개인소장.

변시지 작품에 등장하는 것은 제주의 바다와 육지, 하늘과 태양, 소나무와 조랑말, 돌담과 까마귀, 초가집과 노인, 그리고 해녀 등이다. 매우 반복적으로 같은 소재만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가 그린 것은 결코 이들이 조합된 제주의 풍광이 아니었다. 그는 제주의 날것 그대로 모습을 통해, 우주 속에 던져진 인간 존재의 근원을 탐색하고자 했다. “예술은 언제나 공허하고 죽을 만큼 지루하게 영원한 반복 속에 갇혀 무엇인가 기다릴 것도 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변시지는 썼다. 그는 자유로운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지독한 고독의 정체,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이상향을 향한 그리움을 작품에 담고자 했다. “진정으로 내가 꿈꾸고 추구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제주도’라는 형식을 벗어난 곳에 있다”고 그는 썼다.

변시지, ‘돌담 위의 까마귀’, 1994, 운심석면 소장.

◇“영원히 출구를 잃어버린 근원의 질문”

휘몰아치는 격정의 바다를 그리던 화가는 말년으로 갈수록 작품에 더욱더 여러 요소를 제거해 나가더니, 종국에는 노란 화면에 저 멀리 쪽배 하나를 그리고 말았다. 변시지는 “선 하나, 점 하나로 모든 것을 그린 것과 똑같은 느낌을 표현하는 데에 30년이 걸렸다”고 말했는데,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끊임없이 방황하고 자기 갱신을 계속하며, 평생 예술과 고독한 사투를 벌였던 화가 변시지. 그는 유화와 드로잉 약 5000점, 수묵화 약 1000점을 남긴 채, 2013년 87세의 생을 마감했다.

변시지, ‘점 하나’, 2006, 개인소장.

변시지의 후원 그림 한 점이 현재 롯데백화점 동탄점 롯데갤러리에 전시돼 있다. 일본으로 거의 팔려나가서 한국에서는 자주 만나기 어려운 작품이다. 그의 제주 시대 작품 일부는 서귀포시립 기당미술관에 기증되어 상설 전시되고 있다. 1987년 변시지의 외사촌으로 성공한 기업인 기당 강구범이 변시지를 위해 지어주고, 서귀포시에 기증한 미술관이다. 변시지의 대표작 ‘폭풍의 바다’ 연작은 그의 오랜 후원자였던 김용원의 평창동 전시공간 ‘운심석면(雲心石面)’에 걸려있다. 언젠가는 변시지의 대작 ‘폭풍의 바다’ 연작을 한 방 가득 차게 걸어보고 싶다. 예술은 “영원히 출구를 잃어버린 근원의 질문”이라고 변시지는 말했는데, 우리도 몰아치는 폭풍 한가운데에 서면, 고독한 인간 존재의 근원에 좀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지. 출구 없는 질문을 해본다.

변시지, ‘폭풍의 바다’, 1991, 개인소장.
변시지, '자화상', 1985, 개인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