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 전수현(25)씨 가방 속엔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자들이 살고 있다. ‘초기 그리스 철학’ ‘로마 제국의 이교도 철학’ 같은 서적들이 그의 가방에 들어 있다. 가방 한편엔 ‘인지신경과학’ 같은 책도 들어 있다. 그는 철학과는 무관한 생명과학대 소속. 아동 ADHD와 뇌와 유전자의 관계를 연구하는 뇌공학도다. 전씨는 “고대 철학자들이 과학자이기도 했던 것처럼, 결국 철학도 과학도 세계와 사람을 이해하는 하나의 도구라는 점이 닮아서 매력을 느낀다”고 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연구 분야와 관련된 의학 철학. 최근엔 ‘건강과 질병이라는 개념’의 미국 철학자 논문을 인상 깊게 읽었다.

뇌공학을 연구하는 대학원생 전수현씨가 ‘언어 철학 논문 모음집’을 보는 모습. 그의 가방엔 ‘인지신경과학’ 같은 전공 책과 철학책이 들어 있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철학이 MZ세대를 사로잡고 있다. 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일상에서 철학을 음미한다. 고리타분하다고 여겨지는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학습지를 구독하고, 철학 모임을 자발적으로 찾아간다. 좋아하는 철학자의 책을 사거나, 공감 가는 글귀엔 간단한 생각을 담아 선문답을 덧붙인다.

젊은 층이 즐겨찾는 ‘힙지로’(서울 을지로) 한복판엔 철학책만 전문으로 파는 서점 ‘소요서가’가 들어서고, ‘철학 구몬학습’이라는 별칭을 가진 철학 학습지 ‘전기 가오리’는 구독자만 7000여 명이다. 2020년 첫 출간된 철학 잡지인 민음사의 ‘한편’ 시리즈도 구독자가 3000명으로, ‘세대’라는 주제를 다뤄 가장 많이 팔린 창간호는 누적 1만3000부를 기록했다. 물질주의가 팽배하고,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볼거리들이 넘쳐나는 시대. 쓸모를 따지자면 가장 뒤순위로 밀리는 철학에 이들이 매료된 이유는 무엇일까.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와 키르케고르 등을 특히 좋아한다는 영화학도 이서현(21)씨는 “정보들이 무차별적으로 넘쳐나는 가운데, 내가 무슨 이야기를 듣고 배워야 할지 판단하게 해 주는 지표로서 철학을 찾게 된다”고 했다. 독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류현정(21)씨는 “기후 위기, 우크라이나 전쟁 등 각종 국제 뉴스를 보며 차별과 불평등이 없는 세계, 전쟁이 없는 세계 등 지금과 다른 모습의 세계는 가능할지 고민하며 철학을 찾게 됐다”고 했다. 그가 좋아하는 철학자는 자크 데리다.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을 주로 연구했다.

각종 갈등과 혐오가 난무하는 사회. 이들은 철학을 통해서 사회 문제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아가며 생각을 정리한다. 철학 학습지 전기 가오리를 구독하는 직장인 김어진(26)씨는 “실생활의 문제를 해설하는 도구로서 철학을 즐긴다”고 했다. 그가 특히 철학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지난해 중순 ‘국회의원 자격시험’ 등으로 ‘능력주의’가 한창 화두일 때다. 김씨는 “‘능력주의’와 관련한 철학 서적을 찾아 읽고, 주변 친구들과도 생각을 나눴다”고 했다. 소위 ‘철학 포기자’들을 상대로 ‘철학책 독서 모임’이란 책을 펴낸 출판인 박동수(38)씨는 “MZ 독자들은 인종·성별 등 다양한 갈등이 있는 복잡한 현대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타인을 어떻게 대할지 고민하는 도구로서 철학을 받아들인다”고 했다.

철학을 즐기는 방식도 가지가지. 직장인 김민(33)씨는 한 달에 두 번 철학 서적을 읽고 의견을 나누는 모임을 한다. 김씨는 “직장 생활을 하며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지 고민이 들어 그 답을 찾기 위해 노자의 ‘도덕경’을 읽었다”고 했다. 불안감을 이겨내기 위해 철학에 천착한 셈. 김씨는 “인생을 사유하며 올바른 방향으로 살아갈 힘을 철학책을 통해 얻게 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단편적인 정보나 지식에서 벗어나 삶의 근본을 탐구하고자 하는 경향”이라고 분석한다. 신새벽 민음사 ‘한편’ 편집자는 “‘외모’ ‘콘텐츠’ ‘일’ 등 일상의 이슈들을 철학적으로 톺아주니, MZ 독자들로부터 철학자들이 내 삶을 해설해주고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준다는 평을 받는다”고 했다. 이지애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는 “갈수록 복잡해지는 현대사회 속에서 모든 학문의 뿌리와 맞닿아 있는 철학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