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시골길을 따라 얼마나 들어갔을까. 이 세상 풍광이라 믿기지 않는 비경(祕境)이 눈앞에 펼쳐졌다. 크고 높은 바위의 등고선을 따라 건물들이 굽이굽이 앉았다. 전통 한옥과 현대식 빌라 등 22채가 울창한 숲속에 자리했다. 세월 더께가 쌓일 만큼 오래되지 않은 새 건물임에도 자연의 품에 푸근하게 안겼다.

문 연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트렌드세터들 사이에선 벌써 특별한 공간으로 소문났다. 배우 이나영·원빈 부부가 한옥 세 채를 통으로 빌려 지냈다고 알려지면서 더 화제가 됐다. 경기도 이천 모가면에 들어선 복합문화공간 ‘라드라비(L’Art De La Vie·인생은 예술)’이다.

이 별세계를 창조한 이는 한국 미용 업계의 살아있는 전설 이상일(66)씨다. 앙드레 김 패션쇼에서 선보였던 귀 양옆으로 땋아 틀어 올린 머리를 그가 처음 연출했다. 이씨는 남자 미용사가 드물던 1980년대 프랑스 국립미용학교를 수료하고 돌아와 1983년 명동에 ‘헤어뉴스’를 차렸다. ‘OO미장원’ 일색이던 미용 업계에 상호 변경 바람을 일으켰다. 직원들에게 유니폼을 입히고 ‘헤어 디자이너’ 명칭을 도입하고 ‘선생님’이라 부르게 해 자존감을 높인 주역도 그다. 1987년 허허벌판이던 서울 압구정에 정원이 있는 미용실을 선보였고, 이후 도산공원에 미용실·카페·베이커리 등을 한곳에 모은 ‘파크뷰 바이 헤어뉴스’를 오픈하며 청담동 미용실 시대를 열었다.

2012년 은퇴한 이씨는 거대한 캔버스를 가느다란 연필 선으로 수천 수만 번 채우는 ‘펜슬 드로잉’ 작가로 인생 2막을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10년 만에 ‘라드라비’라는 인생 예술을 일궈냈다. 라드라비에 도착하자 키 184㎝에 패션 모델처럼 비율 좋고 훤칠한 남성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예순을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는 패션 감각과 에너지가 느껴졌다.

◇이곳의 진짜 주인은 바위·나무·흙이니까

지난 5월 개관한 라드라비는 약 1000평 규모로, 그 전모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바위를 계단 삼아 난간을 붙들고, 나무를 피해 구불구불 난 길을 따라 걸으며 몸으로 느껴야 비로소 파악할 수 있다. 이씨는 먼저 바위 능선 꼭대기에 한옥 3채를 지었다. 오래된 한옥처럼 보이도록 목재를 들기름으로 수없이 문질렀다. 댓돌, 요강 같은 전통 생활용품까지 곳곳에 놓여 있어 마치 주인이 잠시 집을 비운 듯한 느낌마저 든다.

한옥 아래로 결혼식, 워크숍 등이 가능한 복합문화공간이 있다. 여기에는 이씨의 펜슬 드로잉 작품 ‘뻥 뚫린 산하’가 걸려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닿는 캔버스 여러 개를 잇대어 만든 거대한 작품으로, 이리저리 뚫린 길이 상처 같다는 이씨의 생각이 반영된 그림이다.

잔디밭을 지나면 숲이 시작되는 곳에 홍송과 붉은 벽돌, 참나무와 회색 돌로 지은 현대식 객실이 보인다. 철제 기둥을 크레인으로 옮겨 나무 사이에 꽂고 집이 드러나지 않게 지었다. 덕분에 객실 건물이 숲에 스며든 듯 보인다.

바위 아래 미술관은 작가 이상일의 작품을 전시하고 보관한 공간이다.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뷰티 DNA’. 35년 미용실 단골들의 모발 샘플을 수만개 캡슐에 넣고 크리스털 용기에 담은 설치 작품이다. 이씨는 “최상의 서비스를 위해 고객 카드에 모발은 건성·중성·지성이냐, 염색하면 흰머리가 몇 퍼센트(%) 섞였느냐까지 다 기록했다”며 “그게 이렇게 작품이 될 줄은 몰랐다”며 웃었다.

이상일씨가 ‘라드라비’에서 가장 먼저 지은 한옥을 배경으로 섰다. 그는 “오래된 한옥 느낌이 나도록 생들기름으로 수없이 문질렀다”고 했다./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라드라비(L’Art De La Vie)란 이름은 어떻게 지었나.

“어느 날 저녁 아내와 와인 한잔하면서 ‘여보, 인생이 뭐야, 도대체 이게 뭐지?’ 하고 투덜거렸다. 아내가 한참 있다가 ‘인생만 한 예술품이 어딨어요, 난 인생이 예술이라고 생각해요’라고 하더라. 듣고 보니 정말 맞는 얘기였다.”

-언제부터 준비했나.

“부지는 1996년 즈음에 샀다. 길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맹지 산이었다. 봄인데 산복숭아, 진달래꽃이 피어 너무 아름다웠다. 나중에 전원주택 짓고 아내와 둘이 된장찌개 끓여 먹고 그림 그리면서 살아야겠다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장만해놨었다. 건축은 2년여 전부터 바짝 했다.”

-전원주택이 어쩌다 건물 22채 복합문화공간으로 커졌나.

“은퇴 후 컨테이너 하나 놓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어느 가을날 잎새가 다 떨어졌을 때 앞산에 올라가 내려다보는데 구상이 막 떠올랐다. 바위 등고선을 따라 미술관, 객실, 레스토랑을 스케치해서 집사람과 상의했다. 아내도 ‘우리만 살기에는 사치다. 이 그림대로 만들어서 다른 이들과 같이 누리자’고 했다. 먼저 길부터 닦았다. 퇴화해 진창이 돼 있었던 산 입구 계곡을 포클레인으로 긁으니 사람들이 계곡에 놀러 와 고기 구워 먹고 버린 철판이 용달차 1대 분량 나왔다. 쓰레기를 걷어내자 물길이 살아났다.”

-자연 원래 모습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건물을 세운 건가.

“나무와 바위와 흙이 이 산자락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인간은 잠시 스쳐 가지만, 나무와 바위, 흙은 옛날부터 여기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거니까. 건물 짓다가 바위나 나무가 나오면 우리 공간을 줄이고 바위와 나무를 살렸다.”

이상일씨는 라드라비를 조성하면서 바위 능선 꼭대기에 한옥 3채를 가장 먼저 지었다. 오래된 한옥처럼 보이도록 목재를 들기름으로 수없이 문질렀다./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라드라비 미술관은 작가 이상일의 작품을 전시하고 보관한 공간이다./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라드라비는 약 1000평 규모로, 그 전모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바위를 계단 삼아 난간을 붙들고, 나무를 피해 구불구불 난 길을 따라 걸으며 몸으로 느껴야 비로소 파악할 수 있다./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그러면 건축비가 엄청 들 텐데.

“그만큼 예산과 노동력이 더 들어간다. 덕분에 지난여름 폭우 때 끄떡없었다. 자연대로 지으니 탈이 안 나더라.”

-건축가 없이 이천 지역 목수들의 도움만으로 지었다고.

“도면도 없이 현장에서 내가 합판에다가 그려가며 ‘이렇게 저렇게 해주세요’ 하면서 진행했다. 목수들과 트러블도 많았다. 망치 집어던지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앞이 안 보여서 바위에 털썩 앉았더니, 아내가 대접에다가 막걸리를 가득 담아 들고 와서는 ‘여보, 산자락에다 당신의 그림을 펼치는데 일꾼들과 좀 트러블 있다고 마음 상해하면 그림은 언제 완성할 거냐’고 하더라. 자꾸 보듬어주니 목수들도 우리 마음을 알아주었다.”

-개관식에 초대한 지인들이 모두 놀랐다더라.

“브랜드 전문가인 노희영 식음연구소 대표는 ‘미쳤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광인(狂人)이 만든 공간’이라고 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작고하기 한 해 전 정희자 여사와 함께 방문했다. 김 회장이 내 손을 잡더니 ‘사업을 많이 해봤지만, 사인하고 오픈하는 날 가서 테이프 커팅만 했지, 이렇게 직접 만들어 가는 건 못 해봤다. 부부가 뜻이 맞아서 함께 인생을 펼쳐나간다는 게 아름답다는 걸 나이 먹어서야 알겠다’며 부러워했다.”

◇잡지 보고 정한 미용사의 꿈

충남 당진에서 태어난 이상일은 어려서부터 그림 잘 그리고 옷 잘 입는 소년이었다. 그는 “원래 꿈은 패션 디자이너였지만, 패션지 ‘보그(Vogue)’ 프랑스판에 실린 헤어 디자이너 알렉상드르 드 파리의 화보 사진을 보고 인생 행로를 바꿨다”고 했다.

-서울은 언제 올라왔나.

“고2 때 올라왔다. 무작정 서울이 좋아 혼자서 장항선 타고 올라왔다. 고등학교 대신 복장학원을 다녔다.”

-어떻게 패션 디자이너가 될 생각을 했나.

“누나들 많은 집에서 커서 그런지 여성적인 취향이다. 여자 동무도 많았다. 토끼풀 뜯어서 여자애들 머리에 씌워주고, 공기·고무줄 놀이도 좋아했다. 서울에 올라오니 앙드레 김씨가 유명했다. 남자가 패션 디자인 한다는 게 너무 편안하게 느껴졌다. 오리엔탈 복장학원에 등록해 옷 만드는 법을 배웠다. 졸업하니 고급 양장점에서 날 스카우트했다. 남자 디자이너가 희귀하다 보니 고객들에게 이야깃거리라도 됐지 않았나 싶다.”

-잡지 화보 때문에 패션에서 헤어로 꿈을 바꾼 건가.

“양장점에서 일하다 군에 입대했다. 1980년 제대하니 세상이 바뀌었더라.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로 일본인 관광객이 끊겼고, 명동 양장점이 쇠퇴하고 있었다. 우연히 옛 중국대사관 골목 책방에서 보그지를 사서 보는데, 알렉상드르 드 파리라는 양반이 베네치아 곤돌라를 타고 북유럽 공주 머리에 화관을 씌워주는 장면이 나오더라. 너무 신기해서 3000원인가를 주고 그 기사를 번역했더니 세상에, 남자 미용사라는 직업이 있어. ‘의상을 여기서 스톱하고 미용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일씨가 미용사로 일할 당시 모습./라드라비

-그러곤 프랑스로 간 건가.

“사실 못 갈 뻔했다. 브로커를 찾아가서 중동에 목수로 일하러 나간다고 허위 여권을 만들었다. 그때는 다들 그렇게 해서 해외로 나갔다. 남산에서 반공 교육도 받았다. 출국 전 고향에 가서 시집간 누님들과 친척들한테 인사 다니니 돈을 조금씩 주더라. 그걸 다 모아서 환전하니 1만5000불(달러) 정도 됐다. 당시 전두환 시절 가지고 나갈 수 있는 돈은 2000불이 최대치였다. 그때 알고 지내던 스튜어디스가 노란 아기 기저귀 고무줄로 100불짜리 지폐를 돌돌 말아서 몸 구석구석 숨겨 나가라고 알려주더라.”

-성공했나.

“태생적으로 잘못을 저지르고는 못 견디는 스타일이다. 김포공항 출국장에서 심사를 기다리는데, 얼굴이 붉어지고 눈도 저쪽으로 돌리고 있으니 ‘이리 와 보라’고 하더라. 102호실인가 어디로 데려가더니 옷을 다 벗겼다. 숨긴 돈이 다 나왔지. 돈도 빼앗기고, 백차(경찰차) 타고 남대문 외사과로 잡혀갔다. 아주 못 갈 뻔했는데 연줄이 있던 높은 분이 ‘내가 신원보증 설 테니 다녀오게 해달라’고 해서 겨우 빈손으로 출국할 수 있었다.”

-돈 없이 파리 생활을 어떻게 버텼나.

“가져간 볶은 고추장에 고추를 사서 찍어 먹으며 버텼다. 그러다 미용학교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너무 배고파서 아내에게 200불만 빌려달라고 했다. 그렇게 아내와 맺어졌다. 돈은 여태 갚지 않고 몸으로 때우고 있다(웃음).”

◇‘헤어’ 들어간 미용실의 시초

프랑스 국립미용학교를 수료한 이씨는 1983년 서울 명동에 ‘헤어뉴스’ 1호점을 차렸다.

“그땐 미용실도 아니고 미장원이라고 했다. ‘꽃님이 미용실’ ‘가고파 미용실’ 등 꽃이 들어가거나 토속적인 이름만 있었다. 상호부터 센세이션을 일으켜야겠다 싶었다. 헤어는 들어가야 하는데, 머릿속에서 뱅뱅 돌기만 하고 마음에 드는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 날 택시를 타고 가는데 라디오에서 ‘땡전뉴스’가 나왔다. 뉴스만 시작되면 나오는 전두환 대통령 뉴스. 앵커가 ‘뉴스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러는데, ‘아이고 됐다, 이거다’ 싶었다. ‘기사 아저씨, 나 여기서 내릴래’ 하고 남산 3호 터널에서 내렸다. 그길로 헤어뉴스로 상호 등록했다.”

-당시 광고도 화제였다더라.

“주간지에 광고를 냈다. 사진 하는 친구한테 ‘충청도 가서 할머니가 아카시아 줄기로 머리 마는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 사진에 ‘아카시아 줄기로 머리 말던 시절이 그립습니다’라고 카피를 붙였다. 어릴 적 시골에 살았던 서울 여성들의 향수를 자극하기 위한 카피였다. 나 혼자 만들었다. 미용실 이름은 빼고 전화번호만 넣었다. 잡지사로 ‘도대체 이게 뭐냐’며 전화가 폭주했다.”

1983년 서울 명동 '헤어뉴스' 개점을 알리는 주간지 광고./라드라비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의상을 해봤기 때문에 손님들 옷을 보고 어느 브랜드라는 걸 탁탁 맞혀내니 센스 있다고 좋아했다. 미용사의 99%가 여성이었는데 나만 남자니 희소성도 있었고.”

-직원 유니폼, 선생님 존칭도 가장 먼저 도입했다.

“헤어 디자이너, 선생님, 유니폼, 명찰 다 처음으로 했다. 자존감을 높이고 싶었다. 그때까지 미용사를 ‘언니’라고 불렀다. 언니가 뭐야, 친척집에 놀러온 것도 아니고(웃음). 매일 아침 9시 직원 교육을 하면서 ‘당신들은 노동자가 아니예요. 아티스트예요’라고 강조하며 자부심을 불어넣었다. 음악회·미술 전시회·쇼핑공간 데리고 다니면서 감성과 안목을 키우게 했다.”

-백화점도 아닌데 쇼핑백은 왜 만들어 손님에게 제공했나.

“손님이 우리 로고가 인쇄된 쇼핑백을 들고 다니는 것도 하나의 광고이지 않은가.”

-1987년 강남 압구정으로 이전했다.

“프랑스 칸에 유명 미용사가 운영하던 정원 딸린 헤어살롱이 있는데, 시에서 보존한다는 거야. 가보니 또 다른 세계더라. 사용하던 가위며 의자를 고스란히 보관해 놓으니 전 세계 미용인들이 다 와서 봤다. ‘나도 정원 있는 미용실을 해봐야겠다’ 마음먹었다. 현대백화점 지을 때 압구정으로 왔다.”

-이때 낸 광고도 화제였다.

‘창포물에 머리 감고 그네 뛰던 터 압구정’을 카피로 광고를 냈다. 압구정이 조선 시대 한명회 별장이었기에 그런 스토리텔링이 나왔던 듯하다. 앞으로는 가족끼리 머리 하러 오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엄마 아빠 따라서 헤어뉴스 왔어요’라는 카피와 함께 아동 모델이 나오는 사진으로 또 다른 광고를 냈다. 거짓말 좀 보태서 250m 넘게 미용실 앞으로 줄을 섰다. 저녁마다 한의원에서 물리치료 받아가며 얼마나 가위질을 했는지 모른다. 그때는 ‘온리 캐시(오직 현금)’였다, 하하!”

-당대 최고 스타들의 머리는 전부 다 만져봤겠다.

“신성일부터 장미희, 이보희, 은퇴 직전 슈퍼주니어까지 다 했다. 압구정으로 이전하고 일부러 정원에서 배우 최명길씨 머리를 했다. 최명길이 드라마 ‘도시의 얼굴’을 찍을 때였다. 쓰윽 떨어지는 단발머리를 일부러 가든에서 해줬더니 장안의 화제가 됐다. 일본 후지TV에서 촬영도 해갔다.”

-시대의 흐름을 알아채는 안목은 어떻게 키우나.

“우리 부부는 가보지 않은 나라를 세는 게 빠를 정도로 우리를 위해 투자를 많이 했다. 1년에 무조건 4번 해외여행을 나갔다. 그중 2번은 바짓가랑이가 찢어져라 최고급 호텔·레스토랑·백화점 등을 경험했다. 나머지 2번은 오지 중에서도 오지를 걸었다. 아프리카 마사이족이 사는 방에서 쪼그리고 자며 문화를 접했다. 체험에서 영감을 얻고 감성이 길러지더라. 감성이 있으면 무언가를 봤을 때 자기화시켜서 펼칠 수 있게 된다. 미용 같은 서비스업은 고객이 어디가 가렵다고 말하기 전에 미리 알아서 긁어줘야 인정받는다.”

◇고독 속에 탄생한 펜슬 드로잉

이상일씨는 2012년 은퇴하면서 작가로 변신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길 좋아했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에게 손바닥을 맞은 후로는 성인이 될 때까지 그림을 절대 그리지 않았다”고 했다.

-무슨 일로 선생님에게 혼났나.

“미술 시간, 학교 뒷동산에 올라 동네 풍경화를 그렸다. 선생님이 나오라고 했다.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을 줄 알았는데 손바닥을 내놓으라 하시더라. 회초리로 몇 대 때리면서 ‘하늘이 파랗지 어떻게 붉으냐’고 혼내셨다. 토끼풀을 뜯으면서 보았던, 노을에 붉게 물든 저녁 하늘이 너무 멋있어서 붉게 칠했던 거다. 교실문을 박차고 뒷동산에 올라가 ‘선생님이 내 마음을 몰라준다’며 울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당시로는 때릴 일이었다. ‘하늘은 파랗다’고 가르쳤는데 말 안 듣고 붉게 칠했으니. 지금은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림을 배우지 않았기에 획일적 기준에서 벗어난 나만의 표현을 하게 됐다.”

35년 미용실 단골들의 모발 샘플을 수만개 캡슐에 담아 잔치상처럼 연출한 ‘뷰티 DNA’. 이상일씨는 “최상의 서비스를 위해 모아뒀던 샘플들이 작품이 될 줄 몰랐다”며 웃었다./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그림을 왜 다시 시작했나.

“함께 미용실 경영하던 아내가 2003년 프랑스로 3년간 보석 세공 공부를 하러 떠났다. 홀로 남아 온종일 손님을 받고 일했더니 고독해서 미칠 것 같았다. 혼자 남은 밤, 집사람 화장대에 눈썹 연필이 있었다. 16절지에다 눈썹 연필로 끄적끄적 몇 장 그렸다. 프랑스에서 미술 공부한 친구가 집에 들렀다가 그림을 봤다. ‘계속 해보라’고 하더라.”

-친구에게 그림을 배웠나.

“친구가 말하길, 처음 파리 가서는 ‘어쩜 그렇게 귀신처럼 똑같이 그려내느냐’며 천재 소리 들었지만, 갈수록 자기 게 나오지 않으니 졸업이 되지 않더란다. 자기 크리에이티브, 감성이 나와야 하는데 안 나오는 거다. 하늘이 붉은 게 안 나온 거다. 그 말에 자신감이 붙어서 그렸다. 가슴이 시키는 대로, 마음을 적셔낸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면 다음 날 가위질이 빨라졌다.”

그는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난다. 작업실에서 6시간 가부좌를 틀고 앉아 그림을 그린다. 폭 2m, 높이 3m가 넘는 캔버스에 연필로 선을 긋고 또 긋는다. 그는 “몰입하면 할수록 맑고 깨끗한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정신이 살아난다. 그 순간이 정말 행복해서 오후만 되면 그림 그릴 새벽 2시가 기다려진다”고 했다.

이씨는 “‘나는 오늘도 창조했는가’가 내 삶의 신조”라고 했다. “이쑤시개로라도 뭐든 만들어야지, 그러지 않으면 패배자란 생각이 든다. 다른 이들에게 새로운 감동을 주고, 그들이 거기에 자극 받아서 또 다른 자신의 세계를 펼치도록 하는 게 내 운명 같다. 손이 예뻐서 손 모델도 하고 기생오라비 같다는 말도 들었는데, 이거(라드라비) 만드느라 손마디가 소도둑처럼 됐다. 저녁에 손 마디마다 파스를 붙이지만 너무 행복하다.”

이상일씨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거대한 캔버스를 가는 연필선으로 채우고 있다./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