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수학여행을 온 부남초 학생들이 건물 외벽에 걸린 태극기 앞에서 뛰놀고 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선생님, 여기가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 괴롭힌 곳이에요? 나도 여기서 자고 가도 돼요?”

지난달 26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2학년 이호연군의 질문에 아이들이 일제히 웃었다. 배소라 교사는 “지금은 박물관이라 여기서 자면 안 돼요”라며 만류했다.

이들은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초등학교에서 3년 만에 수학여행을 온 아이들. 전교생이 16명인 초미니 시골 학교로, 이 중 10명(62.5%)이 베트남, 태국, 중국 출신 어머니를 둔 다문화 가정 자녀다. 호연군 역시 어머니가 베트남계인 다문화 가정 자녀다.

아이들은 전시관에 있는 옥사(獄舍)를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세진 6학년 담임교사가 “옛날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할 때,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잡아다가 가둔 곳이야”라고 설명하자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두 발만 간신히 디딜 수 있는 폐쇄 공간에 가두고 고문하는 ‘벽관 고문’ 기구를 직접 체험해보는 아이도 있었다.

서대문형무소로 오기 전 학생들은 서울 경복궁도 둘러봤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채로 근정전을 누볐다. 베트남계 엄마를 둔 4학년 이채연양 표정이 유독 즐거워 보였다. 채연양은 경북 안동문화원에서 진행하는 ‘노국공주 선발대회’에서 본선에 진출한 주인공. 전통문화 이해도가 높은 학생을 선발하는 이 대회에서 다문화 가정 자녀가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이다.

부모 모두 한국인인 학생이 오히려 ‘소수자’가 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며 어우러질까. <아무튼, 주말>이 경북 청송 부남초등학교를 찾았다.

경복궁에 모인 아이들이 한복을 입고 선생님들과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주왕산 아래 사과마을

지난 31일, 부남초등학교를 찾아 들어가는 길엔 만추(晩秋)의 주왕산 자락이 펼쳐졌다. 빨강·주황·노랑으로 물든 단풍잎이 온 산을 곱게 물들였다. 붉게 익은 사과도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이방인을 반겼다. 차로 10여 분을 더 달리자 외벽을 알록달록 무지개색으로 칠한 학교가 나왔다.

청송읍에서도 20km는 들어와야 닿을 수 있는 벽지(僻地). 마땅한 교통수단이 따로 없어 학생들은 통학 버스를 타고 등교한다. 버스마저도 들어갈 수 없는 마을에 사는 학생은 교육청에서 등·하교 택시를 지원받는다.

행정안전부는 지난해 10월 부남초가 있는 청송군을 포함해 전국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89곳을 ‘인구 감소 지역’으로 지정했다. 신입생이 없어 폐교 위기에 처한 지방의 학교들은 다문화 학생들 덕분에 명맥을 이어 나가고 있다. 다문화 학생 수가 더 많은 곳도 흔하다. 실제로 같은 도내에 있는 경북 의성의 춘산초등학교는 전교생 11명 중 10명(90.9%)이, 경북 울진 매화초등학교는 전교생 33명 중 20명(60.6%)이, 경북 안동 길안초는 전교생 25명 중 15명(60%)이 다문화 가정 자녀다. 이곳에선 한국 아이들이 소수자가 된다.

왕따라는 말 없어요

대개 다문화 학생들은 한국에서 복합적인 어려움을 겪는다. 또래의 따돌림이 대표적이다. 신윤정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해 12월 사회정책포럼에서 발표한 ‘다문화 지원 정책 현황과 과제’에서 다문화 가정 아동들이 겪는 어려움으로 한국 또래들과 단절되는 일을 꼽았다. 여성가족부가 지난 9월 발표한 ‘전국 다문화 가족 실태 조사’ 보고서에서도 다문화 가정 자녀가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로 ‘학교 공부가 어렵다’(56.2%·복수 응답),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해서’(55.4%)를 주로 꼽았다.

하지만 다문화 아이들이 더 많은 부남초등학교에서는 따돌림과 왕따라는 말이 없다. 전교 회장이자 한국인인 6학년 김단비양에게 혹시 왕따 등으로 문제 된 적이 있는지 묻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따돌림? 그런 거, 저희는 없어요. 학생도 몇 명 안 되니 전 학년 아이들이 너나없이 사이좋게 잘 지내요.” 오세진 교사는 “’다문화 사회’를 책에서 활자로 접한 기성세대와 달리, 지금 아이들은 ‘다문화’ 환경에서 살고 있다. 자연스레 편견 없이 서로 어울려 지낸다”고 했다.

이날 오전엔 전교생이 다 같이 모여 ‘미니 로켓 만들기 실습’을 했다. 고학년과 저학년이 섞여 저마다 분주히 로켓을 만들었다. 중국계 어머니를 둔 2학년 안시연양이 로켓을 조립하다 뭐가 잘 안 풀리는지 눈썹을 살짝 찌푸리자, 옆에 앉은 6학년 단비양이 받침대 조립하는 법을 알려줬다. 완성된 로켓이 멀리 날아가자 두 아이가 마주 보며 기뻐했다.

전교생이 한데 모여 '미니 로켓 만들기 실습'을 하는 모습.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태권도 에이스는 태국계

부모 중 한쪽이 외국인이지만, 아이들은 우리말이 제일 편하다. 베트남계 어머니를 둔 6학년 김주영군이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국어, 그중에서도 시 짓기를 제일 좋아한다. 김군은 교실 앞에 ‘할아버지 댁 수박’ ‘가을’ ‘추석’ 등 자기가 직접 지은 시와 그림을 곁들인 작품을 보여주며 뿌듯해했다.

단비는 부모님 모두 한국인이지만 주영이보다 베트남어를 더 잘한다. 베트남 친구들이 많아 취미로 배워뒀다. 단비가 주영에게 “너 베트남어 모르지?”라고 농을 걸자 주영은 “신 짜오!”라고 외치더니 도망갔다. 주영군이 구사할 수 있는 베트남 말은 ‘신 짜오(안녕하십니까?)’와 ‘안 꼼(밥 먹어라)’ 단 두 가지라고. 한국어를 훨씬 사랑한단다.

방과 후엔 태권도 수업이 시작됐다. 2~3학년 학생 6명이 모인 이곳에 한국계 학생은 단 한 명뿐. 태권도계 최강자를 묻자 학생들이 약속이나 한 듯 지목한 주인공은 태국계 어머니를 둔 3학년 김규리양이었다. 흰색 도복에 초록띠를 두른 학생들은 씩씩하게 기합을 주며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쳤다.

태권도 수업에서 2·3학년 학생들이 발차기를 하고 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다문화는 ‘힙한 것’

흔히 다문화 가족이 겪는 차별은 ‘우리와 다르다’는 편견에서 비롯된다. 여가부 보고서에서도 결혼 이주 여성 등 귀화자들이 “지난 1년간 한국에서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다”고 응답한 비율이 16.3%를 차지했다.

다른 곳에서 차별의 구실이 됐던 문화적 배경은 부남초에선 자랑거리가 된다. 2학년 호연군은 겨울방학에 어머니의 나라인 베트남에 갈 생각에 한껏 들떠 있다. 호연이는 “할아버지도 만나고, 두리안이랑 코코넛이랑 망고까지 실컷 먹고 돌아올 거예요” 하며 활짝 웃었다. 코로나 팬데믹 3년 동안 베트남에 다녀오지 못해 어느 때보다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친구들은 “우리 먹을 것도 가지고 올 거지?” 하며 호연이를 부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학생들은 마을에서도, 운동회 같은 학교 행사에서도 국적이 다양한 어른들을 자연스레 접한다. 청송군 다문화 가족 지원센터에 따르면 청송군에 있는 결혼 이민자는 160명. 1위가 베트남(82명)이지만 중국, 필리핀, 캄보디아, 일본, 태국 등 다양한 국적의 결혼 이주 여성이 있다. 학교 복도의 ‘다문화 어울마당’ 게시판에는 한지 공예, 도시 문화 체험, 운동회 등 학교 행사 사진이 붙어있다. 지난해 부남초가 다문화 정책 학교로 지정된 후 진행한 학부모 나라 문화 체험 한마당, 각국 전통 의상 입어보기, 한 ·중 ·일 3국의 전통 놀이 체험 행사를 하는 등 아이들은 꾸준히 다양한 나라의 문화를 접한다.

배소라 교사는 “다문화 학생 비율이 낮은 다른 학교들과 다르게, 우리 아이들은 해외에 사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보러 가서 먹었던 음식을 소개해주고 자랑한다”며 “다른 나라 문화를 체험하는 교과 시간에 자기 어머니 나라가 나오면 ‘이거 우리 엄마 이야기예요’라며 신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미래의 대한민국 모습일까.

오후 3시 45분. 방과 후 수업까지 모두 마친 아이들은 노란색 통학 버스가 출발하는 4시 30분까지 킥보드와 자전거를 타며 운동장에서 뛰어놀았다. 티 없이 맑은 아이들 웃음소리가 색색 단풍과 어우러진 그곳엔 차별도, 편견도 없었다.

QR코드에 스마트폰 카메라를 가져가면 부남초 학생들의 일상을 더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