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래(63)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로켓을 쏘아 본 사람이지만, 한 번도 그 발사 장면은 본 적이 없다. 그의 자리는 언제나 통제실 뒤. 발사체(로켓)가 제대로 이륙하는지, 속도는 알맞은지 그 순간에도 숫자와 데이터를 가지고 싸우는 게 그의 일이다. 1989년 창립 멤버로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하 항우연)에 들어와 제10대 원장을 지내고, 우주발사체개발연구본부 책임연구원에 이르기까지 그는 모든 민간 로켓 개발의 현장에 있었다. 시험 발사체를 포함해 KSR-Ⅰ·Ⅱ·Ⅲ, 나로호, 누리호까지 11번의 발사가 그의 손을 거쳤다.
그가 액체추진 과학로켓 KSR-Ⅲ을 개발하던 2000년 무렵 대전 유성 바닥엔 ‘고 아무개’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다. 서울대에서 항공공학 학·석사를 마치고 미 텍사스 A&M대에서 항공우주공학 박사를 한 뒤 그곳 연구원으로 있는 고 아무개가 그렇게 똑똑하다는 내용이었다. 항우연 인근 카이스트 교수도 귀띔을 해왔다. “조 박사, 미국에 있는 고 아무개를 놓치면 후회할 거요.” 눈치 챘겠지만, 그 고 아무개가 이번 누리호 개발을 진두지휘한 고정환(55) 우주발사체개발연구본부장이다. 2000년 항우연에 초빙된 그는 KSR-Ⅲ과 나로호 개발에 참여했고, 2015년 누리호 개발 사령탑이 됐다.
이들은 자신을 ‘로켓맨’이라고 부른다. 로켓을 쏘기 전날이면 실연당한 사람이 되는 이들.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로켓만을 생각한다. 실제 조 전 원장은 2005년 1월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다. 지금도 약을 먹는다. 그는 “후배들이 이 부분만큼은 물려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고 본부장 역시 누리호 개발에 몰두한 지난 12년 3개월 동안 제대로 잠을 자본 적이 없다고 했다. 누리호 발사 전날에도 1시간마다 깨며 잠을 설쳤다.
지난 6월 21일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KSLV-Ⅱ)가 전남 나로우주센터에서 발사돼 위성의 궤도 안착에 성공했다. 항우연 주도로 2010년 3월부터 1조9572억원을 들여 우리나라가 설계부터 발사까지 독자 개발한 로켓이다. 로켓 불모지라는 대한민국에 로켓맨들이 뿌린 씨앗이 움을 틔우고 싹을 낸 것이다(관련 기사 보기).
두 로켓맨이 최근 한국 우주개발 최전선에서 겪은 이야기들을 담은 책 ‘우리는 로켓맨'(김영사)을 펴냈다. 이 책 마지막 두 페이지에는 지금까지 우주개발에 함께 참여한 동료 234명의 이름이 적혔다.
지난달 14일 대전 항우연에서 두 로켓맨을 만났다.
◇누리호 성공… “대접이 달라졌다”
-누리호 발사 성공 후 일상에 달라진 점이 있을까.
조광래(이하 조): “밥맛이 좋다, 하하! 밥이라는 게 신경 쓰이는 일 있으면 까슬까슬해서 잘 넘어가질 않는데, 요즘엔 음식이 달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이 편하다.”
고정환(이하 고): “잠은 훨씬 잘 자는 것 같다. 한두 달 정도는 편하게 보냈다. 내가 바쁘지 않은 때가 되니 이제는 대학교 2·4학년 된 아이들이 바쁘다며 같이 휴가를 안 가주더라(웃음).”
-다른 나라 반응은 어떤가.
고: “2차 발사 성공하고 나니, 몇몇 나라에서 연락이 왔다. 한국이 간 길을 자신들도 따라가고 싶은데, 협력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고. 과거엔 기술이 부족하고 얻어와야 하니 늘 우리가 저자세였다. 상대가 우리를 얕보고 쉽게 얘기하니 설움도 많았다. 우리 기술을 다들 인정해주는 것 같아 뿌듯하다.”
조: “해외에 나간 연구원들이 요즘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한다. 중요 사안에서 ‘너희 의견은 어때?’라고 묻고, 다른 나라들이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단다. 국제사회에서 대통령 파워도 달라질 수 있다. 발사체라는 건 독자 기술로 할 수밖에 없다. 외교 무대에서 실리는 힘이 달라진다.”
이번 누리호의 성공으로 한국은 미국·러시아·유럽·일본·중국·인도에 이어 중량 1t 이상 위성을 자력 발사할 능력을 갖춘 일곱 번째 나라가 됐다. 발사체 기술은 그 누구도 이전해 주지 않는다. 다른 나라가 갖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 발사체(누리호)가 있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조: “예전에 어떤 위성 발사 하나를 중국이랑 하기로 계약서까지 다 썼는데, 미국이 중국 발사체에서 쏘면 위성 부품을 수출하지 않겠다고 하더라. 울며 겨자 먹기로 계약을 파기하고 다른 나라로 갔다. 이번에 도요셋(초소형위성)도 원래 러시아 발사체에 실어 보내기로 했는데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때문에 이게 틀어졌다. 이번엔 이 위성을 누리호에 실어 쏘아 보낼 수 있게 됐다. 국민적으로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일이다.”
고: “우리나라 발사체가 없을 때, 인공위성을 쏘려고 외국 발사장에 가면 그렇게 서럽다고들 한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데다가 통제도 많이 하고, 비용도 많이 든다. 그런데 이제 KTX 타고 우리 발사장으로 가서, 우리 위성을 보낼 수 있게 됐다.”
-누리호 기술로 ICBM(대륙간탄도미사일)도 만들 수 있는 건가.
조: “격이 다르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ICBM이 평양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날아갈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로켓으로) 지구 궤도를 돌린다. 그걸 10년씩 돌릴 수 있는 힘이 있는데, 몇천 킬로미터 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우주 발사체와 ICBM을 굳이 같은 선상에 놓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로켓을 대표적인 이중 용도 특성이 있는 기술이라고 한다. 평화적 용도와 군사용은 어떤 차이가 있나.
조: “본질은 같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평화적 로켓은 국제사회에 우주 개발이라는 걸 천명하고, 국제사회에서 요구하는 준수사항을 다 지키며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한다. 국제사회로부터 ‘저 사람들은 평화적 우주개발을 하는구나’ 하는 신뢰를 받으며 일하는 것이다. 또 국제사회에서 규정하는 게 몇 가지가 있다. 언제 몇 시경 어느 상공에 우리가 발사할 예정인지 전 세계 항공사에 알려야 한다. 이걸 통상 2개월 전부터 한다. 항해하는 배 역시 마찬가지다. 북한은 이걸 안 하지 않나.”
-발사장인 고흥도 덩달아 화제가 됐다.
조: “처음 고흥으로 결정했을 때, 조광래 고향이 전라도라 그렇게 정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내가 발사장 조사를 한 것은 맞는다. 우리가 로켓을 만들려면 비행기에 공항이 필요하듯 발사체를 쏘는 발사장이 필요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마라도부터 가거도, 경주 감포에서 울진까지 발사장 할 만한 곳은 다 둘러봤다. 기술적으로는 제주도 모슬포 일대가 제일 좋았다. 그런데 당시 모슬포에 국제 관광단지 조성 움직임이 일면서 동네 주민들 반대가 무척 심해 2순위인 고흥이 낙점됐다. 참고로 내 고향은 경남 창원이다, 하하!”
◇나로호가 반쪽짜리 성공?
누리호 이전엔 우리나라 첫 우주 발사체인 나로호가 있다. 2013년 1월 30일, 항우연은 3차 도전 끝에 나로호 발사에 성공했다. 러시아와 합작해 만든 것으로 러시아가 1단을, 우리가 2단을 개발했다. 이 때문에 나로호엔 늘 ‘반쪽짜리 성공’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나로호는 정말 반쪽짜리 성공인가.
고: “기술 이전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기술 이전이 공식적으로 없었다고 해서 같이 일을 한 게 없어지는 게 아니다. 같이 회의하고 서로 부대끼면서, 곁눈질하면서 보는 것들이 엄청나다. 분명한 건 나로호가 없었으면 누리호 사업도 어려웠다는 점이다.”
-당시 보안이 철저했다는데.
고: “나로호를 개발하며 러시아를 30번 정도 오갔는데, 회의하면 늘 보안요원이 동행해서 누가 무슨 얘기 하는지를 듣고 제지했다. 모스크바에서 회의할 때는 물론이고, 한국에도 보안요원이 다 따라 들어왔다.”
-항우연 연구원들이 모스크바 회의실 쓰레기통까지 뒤진 일화가 유명하다.
고: “뭐 하나라도 더 얻으려는 몸부림이었다(웃음). 회식도 자주 했다. 같이 족구하고, 삼겹살 굽다 보면 엔지니어들은 물론이고 보안요원들도 같이 술을 마시게 된다. 기본적으로 엔지니어들은 국적을 떠나 모르는 것을 물으면 최대한 알려주려는 생리가 있다. 러시아 기술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드카 대신 35도짜리 담금주용 소주를 준비했더니 다들 잘 마시더라, 하하!”
나로호를 함께 개발했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연구원들은 한국 연구원들을 ‘소금과 후추를 함께 먹은 사이’라고 표현한다. 동고동락(同苦同樂)이란 뜻이다. 이번에도 누리호 발사가 성공하자 당시 함께 일했던 러시아, 우크라이나 기술자들이 전쟁 중에도 이메일 등을 통해 축하를 해왔다. 항우연 연구원들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당시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의료물품 등을 우크라이나 유즈노에 연구소 등에 전달했다.
-왜 러시아였나.
조: “우리 로켓 하는 사람 입장에선 미국이 나쁜 나라다(웃음). 당연히 처음 미국에 가서 로켓 개발에 대한 모든 의사를 타진했지만 거절당했다. 일본, 중국, 프랑스, 인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때 러시아가 경제 위기였다. 우리에게는 기회가 됐다.”
-러시아에서 원래 로켓 2단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던데.
조: “흐르니체프(러시아 로켓 회사) 사장이 2단 만드는 데 시간도 많이 걸리니 그냥 자기네들이 만들어 주겠다고 하더라. 우리 기술 고도화를 경계해서 아예 싹을 자르려는 거였다. 그러나 우리에게 나로호는 (우주 개발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주는 걸 받아먹기만 하면 언제 우리가 하겠나.”
실제 나로호 이후 약 9년 4개월 만에 발사된 누리호는 37만 개의 부품 중 압력 센서, 온도 센서처럼 기성품을 쓸 수 있는 것을 빼고는 94.1%를 국산화했다. 그야말로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자력으로 로켓을 생산할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성실 실패'가 용인되지 않는 나라
# ‘매일매일 수많은 논란을 해명하던 우리 연구원들은 도전적인 연구를 하는 것은 몹시 고통스러운 일이고, 특히나 실패하면 한없이 비참해진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우리는 모든 연구 과정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하지만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경우 ‘성실 실패’로 인정해 모험적인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보호하겠다는 성실실패제도의 공허함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로켓맨' 138쪽>
- 누리호의 성공 뒤엔 한 번의 실패, 나로호엔 두 번의 실패가 있었다.
조: “우리 사회는 ‘성실 실패’를 용인하지 않더라.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가 있으면, 절반의 실패와 연구진의 무능함에 더 집중한다. 뭘 잘못했는지 따지기 위해 조사위원회부터 꾸렸다.”
고: “발사체는 문제가 생기면 하드웨어가 없어서 원인 찾기가 쉽지 않다. 비행기라면 지상에 잔해라도 남아있을 텐데, 우주는 데이터 조금 남은 걸로 시나리오를 써내야 한다. 나로호는 러시아와 협력했기 때문에 특히 어려웠다. 러시아에서는 자료를 보여주지도 않고 자기네들은 문제없다고만 했다.”
-국내 조사위원회와 갈등도 심했다고.
조: “나로호 때는 조사위원회에 항우연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전부 외부 사람들로 구성됐다. 그러면 우리가 그분들한테 로켓이 어떤 것인지부터 설명해야 한다. 좀 나이가 어린 연구원이 기술적인 이야기를 하면 조사위원이 말대답한다며 묻는다. ‘너 몇 살이야?’(웃음). 갈등이 깊어지니 감정 섞인 막말도 서슴없이 나왔다. ‘그따위로 하니 실패했다’고 한다. 연구원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
-자료 유출 문제도 있었다.
조: “외국은 도서관에 가면 구할 수 있는 자료도 엄청나게 까다롭게 관리한다. 우리는 기밀 자료를 공개하지 않겠다고 하면 ‘폐쇄적’이라고 한다. 한번은 한 조사위원이 밤에도 생각날 때마다 보겠다며 자료들을 집에 가져간다고 하더라. 몇 년 뒤 검찰 수사관에게 연락이 왔다. 해당 연구원의 사무실을 다른 문서 기밀유출 혐의로 압수수색했는데, 항우연 자료들도 있더라는 것이다. 그때 가져가 복사해둔 것이었다.”
고: “이런 부분에 대한 건의가 많이 이뤄져 누리호 때는 조사위원회에 항우연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고, 위원장도 항우연 출신이 맡았다. 문제의 원인은 결국 자신이 찾을 수밖에 없다.”
조: “미국이나 일본, 러시아를 보면 이미 로켓 개발 1·2세대를 지나 지금은 3세대, 4세대가 하고 있다. 그런 나라들은 1·2세대가 감리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지금 이 일 하는 사람들이 60~70대가 되면 정상적으로 감리될 거라고 본다.”
두 사람 모두 어렸을 땐 우주와 관련된 일을 할 거라곤 생각 못 했다. 고 본부장은 “만화 ‘아톰’ ‘로보트 킹’을 좋아해서 로봇은 만들고 싶었지만, 그 시절 우주는 막연했다. 미국 유학을 가서 처음 로켓을 보고 우주를 배우면서 흥미를 느꼈다”고 했다. 그러나 미국에선 외국인이 로켓 분야에 취업할 수 없다. 미사일로 전용 가능한 이중 용도 기술이라, 미국은 이 기술에 외국인은 아예 접근시키지 않는다.
조 전 원장도 마찬가지. 초등학교 때 아폴로 17호가 달 탐사 하는 모습을 봤지만, 그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일 뿐, 직업이 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동국대에서 초고주파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전자통신연구소에서 일하다 우주 분야와 인연을 맺고 항우연 창립 멤버로 합류했다.
◇다시 태어나도 로켓맨으로
-우주청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대통령 공약 중 하나였다.
조: “우리 입장에선 당연히 좋은 일이다. 전문성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과기부는 우주 말고도 하는 게 많은데, 우주청은 우주 업무만 전문적으로 볼 수 있으니 공무원들도 깊이 있는 정책을 만들 것이다.”
고: “우주는 1, 2년 해서 바로 뭐가 나오는 게 아니다. 꾸준하게 과제가 진행되고, 예산이 투입돼야 하는데 지금은 다 프로젝트 단위로 한다. 잘못하다간 이번 프로젝트와 다음 프로젝트가 연결이 안 될 수도 있다. 우주청이 생기면 이런 부분에서 좀 나아지지 않겠나.”
-우주는 당장 구체적인 성과는 보이지 않지만, 예산은 많이 들어간다.
조: “적으면 5000억, 많으면 2조짜리 사업을 하는데 그 중압감은 이루 말하기가 어렵다. 실패할까 봐 항상 두렵다. 투자 대 이익을 따지면, 하면 안 되는 사업이 맞는다. 10년 안에는 돈이 안 나온다. 그래서 기업이 못 하고 국민 세금으로 하는 것이다. 국민의 이해와 동의가 꼭 필요하다.”
고: “누리호를 만드는 데 10년간 약 2조원이 들었다. 그걸 국민 5000만으로 나누면 4000원 정도다. 4인 가족이라면 1년에 1만6000원 정도 든다. 그 정도 투자해서 이 정도 효과가 나오면 할 만한 것 아닐까(웃음). 우리 국민이 온종일 기분 좋고, 세계에서 어깨 한번 으쓱하게 하는데 그 정도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앞으로 어떤 과제가 남아있나.
고: “고도화 사업이라고 해서 2027년까지 누리호를 4번 더 쏘는 작업이 남아있다. 발사체라는 게 일종의 운송 수단이니, 차도 운행을 해봐야 문제점이 있는지 아는 것처럼 그걸 계속 해보는 과정이다.”
-로켓맨들은 정작 로켓 발사 장면은 제대로 못 본다고 하더라.
고: “이륙은 잘하는지, 비행은 안정적인지 매 순간 감시를 하는 상태라서 발사 장면이 아닌 다른 화면들을 보게 된다. 이번에 일부 시민이 여수에서 범선 타고 나와서 육안으로 누리호를 봤다고 한다. 나중에 방송으로 봤는데, 누리호가 참 멋있더라. 언젠가는 나도 요트 타고 맥주 한잔하면서 편하게 로켓을 보고 싶다(웃음).”
-그렇게 힘든데,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그래도 이 일을 하시겠나.
조: “물론! 누리호 발사 전 두통이 너무 심해서, 머리를 들지도 못하고 지냈다. 발사만 끝나면 꼭 MRI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궤도 투입했다고 하니 머리가 거짓말처럼 하나도 안 아프더라. 남들이 보면 꼭 꾀병이라고 했을 거다. 발사에 성공했을 때 느끼는 극강의 희열은 안 해본 분들은 모른다.”
고: “쉽지는 않지만 한번 겪고 나면 ‘또 빨리 준비해서 발사하러 가야지’ 그런 생각이 든다. 돌아간대도 한다.”
두 로켓맨에게서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이 돌아오기까지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누리호만큼 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