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그렇게도 애타게 바라던 문민 민주주의의 시대를 열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을 맞이하기 위해 30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마침내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이 땅에 세웠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1993년 2월 25일 취임 일성으로 문민시대 개막을 선언했다. YS는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그야말로 ‘거산(巨山·김영삼의 호)’과 같은 존재였다. 1927년생인 그는 만 26세에 최연소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역대 최다선인 9선 의원을 지내고, 14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민주화 투사부터 대통령까지 파란만장했던 정치 역정은 그 자체로 한국의 정치사와 다름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나회 청산, 금융실명제 도입 등 임기 초반 과감한 개혁 조치로 높은 인기를 누렸지만 임기 말 IMF 외환 위기 여파로 지지율은 급락했다. 외환 위기가 낳은 국민적 트라우마 탓일까. 퇴임 후 그는 역대 대통령 호감도 조사에서 언제나 하위권을 맴돌았다. 2015년 11월 YS가 서거하고 나서야 그의 업적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보수 일각에서 일었다.
내년은 문민정부가 출범한 지 30년이 되는 해. YS의 차남 김현철(63) 동국대 석좌교수는 최근 김영삼의 정치 사상과 문민정부의 업적을 바르게 기리겠다며 김영삼대통령기념재단(김영삼재단)을 설립했다. 김현철은 ‘문민 황태자’ ‘소통령’이라 불리며 YS 재임기 막후에서 막강 권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 YS는 임기 말 아들의 비리 의혹과 관련해 두 차례 대국민 사과 담화를 발표해야 했다. 김현철은 당시 ‘한보 사태의 몸통’으로 지목됐지만, 한보 관련 의혹은 무혐의로 종결됐다. 그는 이에 대해 당시부터 지금까지 “야당의 공세”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YS 서거 7주기(11월 22일)를 앞두고 김현철을 두 차례 만났다. 서울 상도동 YS 사저와 동국대 캠퍼스에서였다. YS의 다섯 자녀 중 유일하게 대외 활동을 한 그는 호탕한 웃음, 자신감 있는 말투가 YS와 판박이였다. 그는 “내가 유난히 (아버지를)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오랜 시간 아버님과 정치적 관계를 맺으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기에 더 많이 닮게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상대방의 눈을 피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YS민주센터에 대한 30억원 과세 폭탄은 정치 보복”
-김영삼민주센터가 있는데, 이번에 새로 김영삼재단을 설립한 이유는.
“아버님께서 2011년에 60억원에 달하는 전 재산을 민주센터에 기부했다. 국세법상 기부 금액은 3년 이내에 공익 목적에 맞게 써야 한다. 그런데 민주센터가 그걸 제대로 못 했다. 민주센터 설립 초기 내가 관여를 안 해 몰랐던 일이다. 과세 당국에 양해를 구했고,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2020년 6월 느닷없이 세금 30억원을 내라고 하더라. 곧바로 이의를 제기했고, 90%가량 면제받았다. 그런데 이듬해 조부모님, 증조부모님 묘소가 있는 땅이 압류되고, (정부에서) 공매 조치를 하겠다고 하더라. 내가 2019년 민주당을 탈당하고, (문재인 정부) 비판을 많이 한 뒤에 벌어진 일들이다. 일련의 일로 민주센터가 기부단체로서의 자격이 상실됐다. 내년이 문민정부 출범 30주년인데 아무것도 안 할 순 없지 않나. 그래서 기념재단을 만들게 됐다. 현재 17명의 학자가 문민정부의 업적에 대한 책을 집필하고 있다. 가제는 ‘변화와 개혁, 그리고 신한국 창조’다.”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고 생각하나.
“나는 문재인 정부 출범에 일조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런데 탈원전, 소주성(소득주도성장), 조국 사태 등이 도저히 용납이 안 되더라. 그래서 탈당했고, 극렬하게 반대 투쟁에 앞장섰다. 그 당시 여권에서 경고하듯 ‘자중해 달라’고 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2020년 (민주센터를 관할하는) 동작세무서장으로 청와대 행정관 출신이 내려오고, 과세 폭탄이 떨어졌다. 100% 정치 보복이다.”
-당시 어떻게 대응했나.
“정무수석실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문 대통령도 임기가 끝나면 전직(대통령)이 되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정무수석실은 ‘청와대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더라. 이후 언론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자 부담을 느꼈는지 ‘압류나 공매 조치는 과했다고 생각한다’면서 철회했다.”
-YS에 대한 평가와 대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보나.
“최초의 문민정부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평가받아야 할 정부다. 게다가 하나회 청산, 금융실명제 등 수많은 개혁도 해냈다. 불운하게도 임기 말에 외환 위기가 왔고, 김대중(DJ) 정부에 의해서 업적이 다 지워져버렸다. 정권 재창출이 됐다면 이렇게까지 폄훼되지 않았을 것이다.”
김현철은 YS를 “정통 보수”라고 했다. “보수층에선 YS를 박정희에 반대했다고 비판하고, 진보층에선 군정 세력과 손을 잡았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아버님은 독재에 항거한 것이지 산업화를 반대했던 것이 아니고, 야합이 아닌 질서와 안정이 확보된 민주화의 길을 택한 것”이라면서. “아버님을 계승해야 하는 우파 세력이 역할을 제대로 못 한 것도 있다”고 했다.
◇집권 후 하나회 청산, 가장 큰 過는 외환 위기
-YS의 업적 중 가장 의미 있는 것은.
“하나회 청산이다. 2월 25일 대통령에 취임했는데, 3월 8일 육군 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교체했다. 군 실세를 단칼에 날린 거다. 이후 순차적으로 하나회 출신들을 정리했다. 지금이야 담담히 말하지만, 그때는 살 떨리는 일이었다. 외신들은 YS 정부가 군과 동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아버님은 ‘군을 통수하지 못할 거라면 대통령을 그만두겠다’는 각오로 군을 개혁했다. 이 밖에 금융실명제, 공직자 재산 공개, 지방자치제 실시 등 셀 수 없다.”
-가장 검소하고 청렴한 대통령으로도 꼽힌다.
“평생 물욕이 없으셨다. 아버님이 2010년 11월 가족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물려줄 게 없다.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 가족 입장에선 좀 그랬다, 하하! 그렇지만 평생 깨끗하게 살아오신 분이니 그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생전에 아버님 지갑은 남의 지갑이었다. ‘내 지갑은 돈이 지나가는 정거장’이라고 하셨다. 정치인들이 ‘형님, 제가 (돈을) 가져갑니다’ 하면 ‘아니, 이 사람아’ 하면서 웃으셨다. 아버님이 칼국수를 청와대 공식 메뉴로 만들지 않았나. 상도동에 계실 때부터 밥상에 요리라고 할 만한 건 아예 없었고, 손님들에게도 칼국수 아니면 밥과 우거지국에 김치, 멸치볶음 같은 것을 냈다.”
YS는 많은 명언을 남겼다. 1979년 국회의원 제명 당시 “아무리 닭의 목을 비틀지라도, 새벽이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란 말을, 1985년 가택연금 중에 “나를 감금할 수는 있어, 힘으로. 그러나 내가 가려고 하는 민주주의의 길은 말이야, 내 양심을, 마음을 전두환이가 뺏지는 못해!”란 말을 남겼다. 김현철은 가장 기억에 남는 말로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다”는 말을 꼽았다. YS가 1998년 대통령직에서 퇴임하며 남긴 말이다.
-YS의 과(過)는 무엇인가.
“외환 위기다. 관리를 잘못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당시 동남아시아가 유동성 위기로 도미노같이 무너졌다. 오랫동안 축적된 정경 유착과 기업들의 방만 경영 등도 문제였다. 야당이 노동법 개정과 금융개혁법안 마련에 반대하지 않았다면,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로 가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을 거다. 몇몇 참모들은 다음 정권으로 이 위기를 넘기자고 조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님은 ‘다음 정권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 우리가 책임을 지고 가야 한다’고 하셨다.”
YS는 2001년 낸 회고록에서 외환 위기를 이렇게 언급했다. ‘우리 경제가 IMF 관리 체제에 들어가고, 수많은 국민들이 고통을 받는 것을 보면서 나는 무거운 바위에 눌린 느낌이었다. 나는 대통령으로서 모든 책임이 전적으로 나한테 있다고 생각했으며, 지금도 그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임기 말 당신을 둘러싼 의혹도 문제였다. 한보 특혜 대출 비리 사태의 ‘몸통’으로 지목됐었다.
“나는 한보 사태와 아무 관련이 없다. 모든 게 야당의 공세였다. 한보가 부도나자 야당은 무작정 배후에 내가 있다고 주장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검찰은 별건인 알선수재와 조세포탈 혐의로 나를 구속했다. 조사를 받으러 갈 때, 아버님께선 ‘내가 아무런 힘이 없다. 미안하다’고 하셨다. 남은 대선 자금에 대한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세포탈이 된 거다. 검찰이 정치자금에 대한 증여세 포탈 혐의를 적용한 것은 내가 처음이었다. 알선수재 혐의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경위야 어찌됐든 아버님에게 엄청난 부담을 드렸다. 크나큰 불효였다.”
YS는 1997년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아들을 구속시켰다.
-당신이 국정에 개입한 것은 사실 아닌가. 한때 ‘소통령’이라고 불렸다.
“아버님이 민주화 투쟁을 하셨을 때, 대선에 나섰을 때 내가 많은 부분에 관여를 했다. 우리는 정치적 동지였다. 대통령이 되고 난 뒤 셋업(준비)하는 단계까지도 내 역할이 필요했던 거다. 지금의 기준으로 따지면 부적절하다고 볼 수도 있다. 소통령이란 말은 듣기 거북하다. 한보 사태 이후 아주 부정적인 의미로 만들어진 말이다. 그전엔 ‘소산(小山)’이란 별명이 있었다. 거산의 자식으로서 열심히 잘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소산이란 별명도 싫었다. 아버님 후광으로 사는 사람밖에 안 되는 것 같아서…. 자연인 김현철로서 아버지와 관계 없는 일을 하며 살고 싶었지만, 내 평생 이를 관철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김영삼재단을 출범하는 지금, 이 길이 나의 숙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YS의 아들이자 동지, 그리고 참모였다
1959년생인 김현철은 평생을 ‘YS의 아들’로 살았다. 중학생 때부터 대통령을 꿈꿨던 아버지 일화를 들으며, 자신도 ‘통일 대통령’을 꿈꿨다. 대학 시절 신민당 총재였던 YS를 보좌했고, 1992년 대선에서 핵심 참모로 활동했다. 김현철은 YS의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다음 날을 생생히 기억했다. “아버님은 ‘이번에 자네 수고가 많았다. 참 고생했다’고 했다. 아버님으로부터 거의 처음으로 한 사람 몫을 했음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아버지로서 YS는 어떤 분이었나.
“아버님은 우리 집 하숙생이었다. 워낙 바쁘셨다. 국민학교 4학년 때 내가 신장염을 앓아서 굉장히 고생을 했다. 아버지는 나를 심장병 전문의가 있는 병원에 1년을 입원시켰다. 내가 심장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신 거다. 그렇게 무심하셨다. 그래도 딱 한 번 가족여행을 간 적이 있다. 내가 다섯 살 땐가, 아버님께서 직접 운전을 하셔서 온가족이 속리산에 갔다. 운전을 배우신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대형 사고가 날 뻔했다, 하하!”
-아버님을 ‘스승 같다’고 표현했는데.
“고등학생 때 신문 보는 것에 재미를 들이면서, 집에 오는 신문을 학교에 가져가곤 했다. 아버님이 신문 도둑이 나인 걸 아시고는, 야단 대신 신문 한 부를 더 시키셨다. 1980년 5월부터 3년 동안 아버님으로부터 정치를 배웠다. 아버님은 가택 연금 상태였고, 나는 가슴 뜨겁던 대학 3학년생이었다. 매일 많은 대화를 나눴다.”
-구체적으로 뭘 배웠나.
“가장 큰 교훈은 자기 절제였다. 아버님은 연금 생활 중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했다. 갈 곳이라곤 거실과 작은 앞마당밖에, 보는 사람이라곤 어머니와 자식들밖에 없었지만 한번도 모습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운동, 독서, 서예 등 하루 일과를 엄격하게 지켰다. 저녁 시간의 끝은 항상 토론이었다. 간디와 토인비, 백범의 저서를 읽고 대화했고, 담장 밖 정치에 대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했다.”
-동지와 참모의 역할도 했다.
“1983년 5월 18일을 기해 아버님이 단식에 돌입했다. 나는 당시 제대하고 복학했을 땐데, 매일 밖으로 나가 아버님의 단식 소식을 전했다. 87년 대선 때는 친구들과 발로 뛰며 선거운동을 했고, 아버님께 ‘(DJ와의) 후보 단일화는 시대의 요청’이라는 고언을 드리기도 했다. 1990년 3당 합당 발표 열흘 전쯤 아버님이 ‘자네 생각에는 현 상황이 어떤 것 같나’라고 물으시기에, ‘타협적인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점진적인 변화를 끈기 있게 시도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대통령 당선까지가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버님 생각은 달랐다. 공부를 좀 더 하러 다시 유학을 가겠다고 하니 불같이 화를 내셨다.”
-일주일에 한 번씩 청와대에 갔다던데.
“일요일마다 청와대에서 예배를 봐서,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들, 여론들을 내 나름대로 정리해서 들어갔다. 여론조사까지 포함해서 ‘이 점은 잘했고, 이 점은 잘못됐다’고 가감 없이 말씀드렸다. 거창하게 말하면 청와대와 민심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달까, 하하. 그런데 점점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더라. 이들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찼다. 내 눈에도 나의 힘이 점점 커지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원한 건 아니었다.”
김현철은 대통령 YS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했지만, 공식 직함은 없었다. 그에게 ‘직함이 없던 것이 문제라고 보지 않느냐’고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나도 공식 직함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여권 내부에서 반대가 있었다. 내가 국회의장실 비서직으로 가는 것조차 막더라. 일종의 역차별이었다고 생각한다.”
-역차별?
“YS 아들이기에 겪은 일들이 많다. 87년에 유학을 다녀와서 외국 금융사 여러 곳에 입사 원서를 넣었다. MBA를 취득했으니까 취직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회사들이 ‘난처한 일은 피하고 싶다’면서 떨어뜨리더라. 우여곡절 끝에 쌍용증권에 공채로 입사를 하게 됐는데, 원서에 부친 성명란을 다르게 썼다. 할아버지 함자와 아버님 함자에서 한 자씩 따서 ‘김홍삼’이라고, 하하. 군대에서 가혹 행위도 당했고, 테러도 두 차례나 당했다. YS의 아들로서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고 받아들였다.”
◇나의 여생, YS 정신 계승에 바치겠다
김현철은 평생 정치와 가까이 살았지만, 선거에선 끝내 당선되지 못했다. 여러 번 출마를 시도했지만 공천을 받지 못해 번번이 좌절됐다.
-총선과는 연이 없는 것 같다.
“아버님은 1988년 총선부터 내게 출마를 권유했다. 그런데 선거 때마다 상황이 꼬였다. 한때는 아버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나도 사람인지라 ‘공천 하나 못 주냐’는 야속한 생각이 들었다. DJ 아들 세 명은 모두 배지를 달지 않았나, 하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내가 정치에 나서는 일은 없을 것이다.”
-2017년 대선 때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
“우파 세력에 대한 실망이 컸기 때문이다. 기득권 유지에 골몰하는 모습에 염증을 느꼈고, 특히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 ‘보수에 앞으로 희망이 있을까’란 생각도 했다. 문 대통령은 내게 (대선 때) 힘을 합해주면, 87년 이후에 갈라졌던 민주 세력을 통합해 함께 가겠다고 약속했다. 진보 세력의 개혁과 사과 등을 요구하자, (문 대통령이) 다 수용하겠다고 했다. 그를 철석같이 믿고 2017년 5월 민주당에 입당했는데, 그는 단 하나의 약속도 실천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운동권 주사파 세력이 이끈 정부다. 5년 동안 국민만 사분오열시켰다. 그는 한 진영의 수장이지 일국의 대통령이 아니었다. 최악의 대통령으로 남을 것이다.”
-윤석열 선대위에서 고문 역할을 맡았다. 현 정부는 어떻게 평가하나.
“고문직을 수락한 것은 윤 대통령에게서 아버님과 닮은 면모를 봤기 때문이다. 솔직하고, 과단성 있는 모습이 비슷하더라. 윤 정부에 대해선 아직 평가하기 이르다. 최소 1년은 지나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6개월밖에 안 된 정부에 (야권에서) 벌써 퇴진하라고 하고 있다. 윤 정부는 행정 권력만 갖고 있을 뿐, 나머지 권력은 다 민주당에 있다.”
-우리 정치권이 YS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아버님께서 유훈으로 남기신 ‘통합과 화합’이다. 아버님은 언제나 갈라지는 쪽보다는 화합하는 쪽에 계셨다. 지금의 정치는 비토크라시(Vetocracy·극단적 파당 정치)다. 어떻게 하면 서로를 물어 뜯을까란 생각에서 한 발도 못 나가고 있다. 선거구제 개편 등 과감한 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정말 정치 때문에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 좌우의 극단 세력은 배제하고, 합리적인 온건 개혁 세력들이 나라를 위해 손잡고 극단적 정치 풍토를 바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