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격렬한 인간을 말하려 보니 나는 말의 빈곤을 느낀다.”
소설가 이병주가 조각가 문신을 두고 한 말이다. 이병주가 누구인가? 그는 1921년생, 학병 세대의 대표 문인으로 44세의 늦은 나이에 등단해 ‘관부연락선’, ‘지리산’ 등 평생 80여 권의 책을 쓴 천부적 소설가였다. 27년간 월평균 원고지 1000매를 썼던 이병주가 “말의 빈곤”을 느꼈다는 작가 문신은 대체 어떤 ‘격렬한 인간’일까?
◇격렬할 수밖에 없던 운명
문신(본명 문안신)은 생존을 위해서 우선 격렬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그는 1922년 일본 규슈 사가현의 탄광촌에서 태어났다. 마산 출신의 부친은 1910년대에 돈을 벌겠다는 일념으로 일본에 건너가 탄광 노동자가 되었다. 어머니는 인근 농촌 마을에 살던 일본인 여성이었다. 도둑을 맞아 위기에 처한 그녀를 구해준 인연으로 두 사람은 부모가 허락하지 않은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문신은 이들 사이에 태어난 둘째 아들이었다.
문신이 다섯 살 되던 해, 가족은 아버지의 고향 마산으로 돌아왔다. 이때 문신은 짧지만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와 함께 바닷가 갯벌에서 바지락 잡던 추억을 그는 평생 잊지 못했다. 그러나 채 2년도 못 되어 부모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고, 문신은 마산에 남았다. 나중에 아버지는 마산으로 돌아왔지만, 어머니와는 헤어진 뒤였다. 문신은 어린 시절 주로 할머니와 숙부 댁에서 자라며, 초등학교 졸업 후 생활 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술집 배달, 전파상 보조, 영화 간판 그리기 등 닥치는 대로 ‘알바’를 했다.
그래도 문신은 자신이 14세 때부터 운이 참 좋았다고 말한다.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한 청년이 운영하던 화방에서 점원으로 일했는데, 거기서 마음껏 화집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피카소와 터너의 그림에 푹 빠졌다. 주인이 병으로 화방 문을 닫을 처지가 되자, 성실한 소년 문신에게 화방을 아예 인계해 주었다. 문신은 화방에 있는 재료로 화집의 그림을 모사해서 팔기도 했다. 화가 문신의 운명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엄마와 단 하룻밤
“나는 지금도 미술가라는 단어 앞에만 서면 아름답고 걷잡을 수 없이 드넓게 펼쳐진 파노라마 속으로 향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고 문신은 썼다. 그에게서 그림 그리는 일은 마치 하늘을 나는 것과 같은 비전, 끝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도전이었다. 1938년 16세 때, 그는 일본에 밀항하여 도쿄 일본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그러고는 산부인과 조수, 영화 엑스트라, 목수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당시 보통 유학생들이 본국에서 월 50원의 용돈을 받으면, 문신은 월 100원을 직접 벌었다고 한다. 이 무렵 엄마를 찾아 단 하룻밤을 함께 보낸 후, 평생 만나지 못했다.
한국에서부터 혼자 갈고닦은 실력으로 문신은 교내 데생 대회에서 1등을 하기도 했다. 도쿄 이케부쿠로 인근 예술인촌에서 생활하며, 꽤 인정받는 화가로 성장했다. 당시 21세의 문신이 그린 자화상이 남아 있다. 결기를 넘어 독기에 찬 화가의 눈빛이 섬뜩할 정도로 인상적인 작품이다. 화가는 자신 옆에 놓인 거울을 곁눈으로 흘겨보며 앞에 놓인 이젤에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세상을 곁눈질하며, 오로지 예술가의 외길을 헤쳐나가겠다는 듯이. 실제로 문신은 도쿄 공습 당시 다들 대피소로 몸을 피할 때 태연히 그림을 그린 일화로 유명하다. 어차피 죽을 바에야 그림을 그리다가 죽는 게 낫다며.
◇용기의 원천
1945년 해방 후 문신은 고향 마산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 일해 모은 돈 1000원 중에서 500원으로는 마산 고향 집 뒷산을 아버지에게 부탁해서 사게 했다. 그리고 500원으로는 모조리 물감을 사 들고 돌아왔다. 해방과 전쟁 시기를 통과하며, 한국의 예술가들이 재료난에 허덕일 때, 문신은 정말 아낌없이 물감을 썼다. 그리고 혼란기에도 엄청난 양의 작업을 발표했다. 1948년 개인전에서 근원 김용준은 “혜성같이 빛나는” 문신의 전시를 보고, “조선의 대작가 탄생을 예감한다”며 극찬했다.
이 시기 작품 ‘고기잡이’를 보자. 파도가 몰아치는 거친 바다에서 온 힘을 다해 밧줄을 당기는 어부들의 모습을 그렸다. 목숨을 걸고 풍랑에 맞서 싸우는 이들을 둘러싸고, 액자에는 자맥질하는 해녀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숨을 참고, 바다 깊이 힘차게 뛰어들어 고기를 잡은 후,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는 해녀의 모습이 액자 틀을 따라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이렇게 힘들다. 때로 목숨을 걸고 생(生)을 영위하는 보통 사람의 모습에서, 문신은 스스로 살아나갈 에너지를 얻었을 것이다.
나중에 쓴 문신의 회고록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그가 자신의 가난한 아버지에게 보낸 존경과 찬사이다. 그의 부친은 탄광 노동자, 푸줏간 점원 등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늘 새로운 일에 도전했다. 한때 아버지가 마산 추산동 언덕 위에서 온실 재배를 한다고, 거름을 만들기 위한 분뇨 통(장군)을 져다 나른 적이 있었다. 친척들은 창피하다며 아버지를 욕했지만, 문신은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삶을 헤쳐나가는 아버지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모습이 지금도 내 눈앞에 생생히 살아나면서 나에게 그 무엇인가의 용기를 갖게 해 준다”고 문신은 썼다.
◇화가에서 조각가로
그가 바라본 생(生)이 이러할진대, 못 할 것이 무엇이랴. 문신은 1961년 무일푼으로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비싼 비행기 값을 지불하고 파리에 도착하니, 주머니에 달랑 50달러가 남았다고 한다. 6일을 굶다가 구사일생으로 이응노 부부를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이후 김흥수가 알선해준 일자리에 문신은 정착했다. 파리 외곽에 있는 라브넬의 고성(古城)을 수리하는 일이었다. 석공, 미장, 목수 등 격렬한 노동의 종합판이었지만, 문신은 이 일에서 일종의 희열을 느낀 것 같다. 이 경험이 화가에서 ‘입체’를 다루는 조각가로 전향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그는 말했다.
파리에서도 뭐든지 잘해내는 그를 찾는 이가 많아졌다. 존 크라븐이라는 전시기획자의 눈에 들어, 문신은 1970년 프랑스 남쪽 항구도시 발카레스에 거대한 나무 조각상을 설치하게 되었다. 아프리카 가봉의 대통령이 샤를 드골에게 선물한 아비동 나무를 예술가에게 나눠주면서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문신은 그중 가장 큰 통나무를 골라, 가장 깊이까지 파 들어가는 작업을 시도했다. 45도 온도의 모래사장에서 높이 13m, 직경 1.2m의 나무 둥치와 8개월간 사투를 벌이다가, 전기톱에 손목을 다쳐 피가 철철 흐른 적이 있었다. 문신은 이 경험을 통해 “하나의 창조라는 생명의 잉태를 위해서는 붉은 피가 엉기어 떨어지는 고통과 아픔을 견디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진정 상처를 통해 성장하는 인간형이었다.
‘태양의 인간’이라 불리는 이 작품으로, 문신은 유럽 화단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0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할 때까지 10여 년간 그는 전시에 100여 회 참여했고, 작품도 꽤 잘 팔렸다. 그의 조각은 통상 ‘시머트리(대칭)’를 특징으로 한다. 나무, 브론즈, 스테인리스 스틸 같은 재료로 좌우가 서로 대칭이 되는 알 수 없는 형상들을 그는 자꾸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의 조각이 개미나 나비 같다고도 하고, 씨앗이나 식물처럼 보인다고도 했다. 아주 오래 전 고대인이 만들었을 법한 토템 같다고도 하고, 훨씬 멀리 미래의 우주에서 날아온 미지의 생명체 같다고도 했다. 문신 자신은 사람들이 이 창조물을 무엇이라 불러도 상관없었다. 다만, 그는 어떤 대상을 의도적으로 재현하려 하지 않았고, 단지 그것이 무엇이든 “작업하는 동안 이 형태들이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런 문신의 작품에 프랑스 평론가 도판느는 “생의 철학”이 보인다고 말했다.
도판느가 말한 생의 철학은 베르그송이나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의 개념을 염두에 둔 것이겠지만, 문신에게 ‘생(生)’은 훨씬 더 실재적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철학, 그 이상이다. 문신의 ‘시머트리’는 땅에 단단하게 발 딛고 선 어떤 ‘존재’가 어떻게든 중력을 거슬러 자라는 동안 생겨나는 ‘형상’이다. 이 형상은 위로 자라면서도 옆으로는 좌우 균형을 유지하려 실은 안간힘을 쓰고 있다. 견고한 안정감과 극도의 긴장감이 절묘한 조화를 이룸으로써 태어나는 존재라고나 할까. 생은 바로 그런 극단적인 힘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균형 감각’이다. 그러하기에 우주에 던져진 어떤 존재에게나, 생은 그만큼 어렵고, 신비롭고, 기적 같고, 엄중하다.
◇ 마지막 역작, 문신미술관
문신은 상당한 명성을 지닌 조각가로 성장했음에도 생활이 극도로 처참했다. 파리 인근 농촌 마을의 야채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누추하기 그지없는 아틀리에에서 작업에만 열중했다. 1950년대 마산에서부터 알고 지냈던 이병주가 1980년 문신의 아틀리에를 찾아갔다가 참혹한 작업장 광경을 보고 말문을 잃었다. 그리고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루이 14세가 되지 못할 바에는 이런 미녀를 차지하고 마음대로 작품을 하는 문신이 낫다.”
1980년 문신은 24세 연하의 동양화과 출신 아내 최성숙을 만나, 오랜 프랑스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마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또다시 꿈을 향해 나아갔다. 일본 고학 시절 500원으로 사두었던 고향 집 뒷산에 미술관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옹벽을 쌓고 연못을 만들고 바닥 모자이크를 깔고 미술관 건물을 짓는 데 14년이 걸렸다. 마을의 나이 든 인부들과 함께 직접 조금씩 진전시켜 나간 작업이 1994년에야 완성을 보았다. 그리고 이듬해 문신은 72세의 치열한 생을 마감했다. 묘비에는 문신이 평생 스스로 지키고자 노력했던 좌우명이 새겨졌다. “노예처럼 일하고, 서민과 함께 생활하고, 신처럼 창조한다.”
이 격렬한 인간을 말하려 보니, 지면의 빈곤을 느낀다. 무엇보다 그가 남긴 작품을 지면으로는 충분히 소개할 수가 없다. 마침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전시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다. 회화 45점, 조각 95점, 드로잉 90점이 총망라된 대규모 회고전이다. 우리 시대 정신적 빈곤을 채워줄 ‘생(生)’의 향연이다(전시는 내년 1월 2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