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백화점 건물 앞엔 종종 텐트가 등장한다. 매장 문을 열기도 전부터 물건을 사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사람들 때문이다. 환율과 물가가 연일 가파르게 치솟아도 ‘오픈 런 행렬’은 줄어들지 않는다. 지난달 초 현대백화점 판교점에 에르메스코리아가 국내 최대 규모로 새 매장을 열자, 이곳 앞에도 물건을 사서 더 비싼 값에 되팔려는 리셀러(reseller)들은 새벽부터 줄을 섰다. 텐트가 또다시 등장했고, 거리에서 잠을 자며 기다리는 ‘노숙 대기자’까지 나왔다.
독일과 한국·일본에서 활동해온 설치미술가 최재은(69)은 이런 풍경에 마음이 불편한 사람이다. 왜 다들 이리 물건을 사려 다툴까. ‘생명의 유한한 시간’이란 주제로 작품을 만들어 온 최 작가에게 물건을 많이 사는 것은 종종 죄(罪)를 쌓는 것과도 같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에르메스코리아는 이번 판교점의 매장 쇼윈도 작업을 최재은 작가에게 부탁했다. 에르메스가 올해 전 세계 매장 쇼윈도 테마로 내건 ‘가벼움의 미학(Lighthearted!)’의 재해석을 그에게 맡긴 것이다. 최재은은 ‘가벼움의 미학’이란 주제를 듣자마자 법정 스님을 떠올렸다고 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라고 하셨죠. 진정한 가벼움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이 자꾸 물건을 사기 위해 줄을 설수록 백화점 쇼윈도엔 ‘그럴 필요 없다’는 메시지가 걸려 있길 바랐습니다.” 이달 초 아직 작업 중인 판교 현대백화점 쇼윈도 앞에서 만난 최 작가가 화장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가 상업 브랜드의 쇼윈도 작업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해인사 성철 스님 사리탑 만든 작가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입구 광장엔 독특한 설치 작품이 있다.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빛깔(yves Klein blue)의 원뿔형이 10도쯤 몸을 기울여 서 있다. 바닥 지름 3m, 원뿔형 조형물의 높이는 13m쯤 된다. 조형물 이름은 ‘시간의 방향’. 1997년에 설치된 최재은의 작품이다. 원뿔체를 따라 시선은 자연스레 하늘을 향하게 되는데, 이때 끝이 북쪽을 가리킨다. 고인이 가는 길을 형상화했다. 삼성문화재단은 설치 작품의 푸른 빛깔을 선명하기 보여주기 위해 2012년 보수 작업을 했다.
국내 활동은 뜸했지만 최재은의 작품은 이처럼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다. 1976년 의상 디자인을 배우러 일본에 유학 갔다가 ‘이케바나’라는 일본 전통 꽃꽂이를 배우면서 미술가의 길로 들어섰다. 백남준·오노 요코·존 케이지가 활동했던 소게쓰 미술학교를 수료했다. 2010년엔 독일 베를린에 건너갔다.
1985년엔 발표한 ‘대지’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일본 건축가 단게 겐조,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와 함께 소게쓰 아트센터 안의 ‘천국’이란 이름의 실내 정원을 검은 흙으로 덮고 씨앗을 뿌려 생명이 싹트고 자라고 죽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 설치 미술이었다. 1988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앞에 거목을 심고 둘레엔 철판으로 4m×4m×8m 집을 지어 나뭇가지 방향 따라 문을 낸 ‘과거, 미래’, 1990년 경동교회 옥상에 3000여 개 대나무 가지를 엮어 큰 반향을 일으켰던 ‘동시다발’도 그의 작품이다. 국내에선 1998년 경남 합천 해인사 입구에 연꽃을 형상화한 ‘성철 스님 사리탑’을 만든 작가로도 유명하다.
이번 에르메스 판교점 쇼윈도 작업을 하면서 최 작가는 겹겹이 유리를 쌓았다. “물질의 본질을 극대화시켜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유리처럼 투명하고 단순하게 물질의 속성을 볼 수 있다면, 쓸데없는 것을 살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명품 매장 쇼윈도는 그러나 결국엔 물건을 사라고 부추기는 공간이다. 현대백화점 판교점의 작년 매출은 1조2400억원 정도. 전국 현대백화점 중 매출이 가장 높은 곳이다. 올해는 1조5000억원을 바라보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이번 에르메스 유치를 계기로 판교점 매출을 2조원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최 작가에게 백화점 실적을 불러주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물건 하나를 오래 쓰고 몇 대째 물려줄 수 있는 소비라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우리는 이미 멸종위기를 겪고 있는 종(種)이고, 대량생산으로 넘치는 공산품에 이미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이럴수록 왜 쇼윈도에 메시지를 담아야 하는지를 깨닫고, 사명감마저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판교(板橋), 그 다리를 건너서
최재은은 ‘판교’라는 도시에 매장이 들어서는 것에도 주목했다. 단순히 명품 매장이 들어서는 것이 아닌, 공간과 도시가 연결되길 원했다. 일주일가량 판교 지역에 머무르며 새벽마다 운중천을 산책했다. 새소리를 듣고 나뭇가지와 돌을 주웠다. 주워온 나뭇가지와 돌은 쇼윈도 작품 소재로도 쓰였다. 최재은은 “판교라는 지명 자체가 ‘널판지 다리’라는 뜻이더라. 조선 시대 초기 이곳과 한양을 잇는 널다리가 운중천 위에 놓였다. 박물관 자료를 뒤져보니 그 판자 너비가 그야말로 사람 하나 겨우 걸어갈 정도였다고 한다. 저 위를 대체 어떻게 지나다녔을까 싶더라. 고심 끝에 그 널다리를 37㎝×40㎝ 정도의 유리 판자로 표현해봤다. 그 위로 사람이 지나가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구두만 살짝 올려놓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그 작은 다리를 사람들이 건너다니다가 세월이 흘러 이렇게 큰 도시로 확장됐고, 판교는 어느덧 테크놀로지와 자본이 몰려드는 도시가 됐다는 것을 생각하면 강물 같은 시간에 압도된다”면서 “우리는 모두 판교를 건너왔고, 지금도 건너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DMZ, 그 땅에 씨앗이 닿을 때까지
최재은은 2015년부터 일본 건축가 반 시게루(坂茂·62)과 협업해 비무장지대(DMZ)를 다룬 프로젝트 ‘꿈의 정원(Dreaming of Earth)’을 지속하고 있다. 대나무 같은 천연 재료만을 써서 철원 지역 DMZ 안의 한탄강을 따라 지면에서 3~6m 높이에 길이 12㎞에 달하는 왕복 보행로를 만들자는 구상이다. 보행로 중간중간엔 공중 정원 12개를 짓고, 군사분계선과 접하는 두 곳에는 높이 20m 전망대 ‘바람의 탑’을 만든다는 계획도 포함됐다. 건축가 조민석과 뇌 과학자 정재승이 협업해 철원 제2 터널 안에 우리 종자와 지식을 보관할 수 있는 ‘생명과 지식의 저장소’를 만들자는 안도 있다. 노르웨이 같은 나라가 지하에 지식저장소를 짓고 있는 만큼, 우리도 지적 자산을 아날로그 형태로 특정 기업에 의존하지 않고 DMZ 안에 평화롭게 저장하자는 계획의 일환이다. 멸종 위기 식물의 종자는 ‘종자 은행’의 형태로 만들어 공중 정원 길의 시작과 끝엔 영구 보관하기로 했다. 최 작가는 이 청사진을 지난 2016년 베네치아 건축 비엔날레에서 발표했다.
실현 가능한 계획이었을까 싶지만, 프로젝트는 아직 진행 중이다. ‘꿈의 정원’은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국가(Nature rules)’라는 이름으로 진화했다. 지난 2019년 도쿄 하라미술관에서 열린 ‘자연국가(自然国家): 대지의 꿈’ 전시는 이 계획이 여전히 실행 중임을 보여줬다. 20여 명의 예술가가 협업해 진화하는 DMZ 프로젝트를 각양각색의 미술로 소개했다. 최재은은 이 전시에서 ‘증오는 눈처럼 녹는다’는 제목의 조각을 선보였다. DMZ 경계선 지역의 철조망을 녹여 여러 개의 조각으로 만들고, 이를 바닥에 깔아 밟고 지나다닐 수 있도록 했다. DMZ 철조망을 누구나 밟아 내디딜 수 있는 징검다리로 만든 것이다. 설치 작품 뒤로는 철조망을 녹이는 영상을 보여줬고, 앞엔 DMZ의 밤하늘 사진을 걸었다.
최재은은 “이후에도 홍성각 교수님을 비롯한 국내 산림학자 6명을 모시고 DMZ의 산림 회복 프로젝트를 지속하고 있다”면서 “파주에서 고성까지 생태계 복원 지도를 구현했고 지금도 계속 작업 중”이라고 했다. 작년엔 통일부와 함께 DMZ에서 지금까지 만든 생태계 복원 지도를 보여주는 전시도 열었다. 최 작가는 “이 프로젝트를 언제까지 내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할 수 있는 만큼 하다 정부나 UN에 제출할 계획”이라면서 “힘들고 지칠 때, 이걸 계속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지만, 그때마다 ‘꿈은 원래 불가능할 때 꾸는 것’임을 기억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불가능한 일을 지속하다 보면 꿈은 종종 역사가 되곤 하니까요.
비무장지대에 왜 이토록 천착할까. 최재은은 다시 화장기 없는 미소를 지었다. “예술은, 결국 제대로 살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곳에 다시 씨앗이 터져 꽃이 피어나고 열매 맺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짧은 삶을 살아낸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