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재임 시절 반려견 ‘보’와 함께 백악관 잔디 위를 달리는 모습. 퇴임 후에도 보를 가족처럼 아낀 오바마는 지난해 반려견이 암 투병 중 사망하자 “우리 삶에서 변함없고 다정했던 존재”라며 추모 글을 올렸다. / 백악관 홈페이지

“대통령 당선인, 본인과 행정부, 그리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강아지를 한 마리 키우세요.”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직후,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백악관 역사상 150여 년 만에 ‘퍼스트 도그(first dog·대통령의 반려견)’가 없는 대통령이 나왔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정치 뉴스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디지털 콘텐츠 시대에 퍼스트 도그가 없다는 건 쉽게 얻을 수 있는 정치적 도구를 잃는 것”이라며 “반려동물 관련 정책에 관심을 갖는 7900만 반려동물 가구의 관심을 끄는 데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충고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도 ‘공석으로 남은 백악관 핵심 보직: 퍼스트 펫’이란 기사에서 “미국 역사상 애완동물을 기르지 않은 마지막 지도자는 1869년 퇴임한 앤드루 존슨으로, 빌 클린턴과 함께 탄핵당한 단 두 명의 미국 대통령 중 한 명”이라며 “동물은 정파를 가리지 않고 모든 미국인에게 사랑받는다”고 썼다. 하지만 트럼프는 끝내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았다. 그는 후에 지지자들을 향해 “개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도저히 기를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말 못하는 동물이지만 정치인과 운명을 같이하는 존재가 있다. 정치인들이 키우는 반려동물 얘기다. 새 대통령이 당선 직후 동물과 함께 나타나는 것도 친숙한 풍경이 됐다. 최근 문재인 전 대통령의 ‘풍산개 파양’을 놓고 정치권 공방이 뜨거운 것도 그들이 키우는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높기 때문이다. 정치인에게 개란 어떤 존재이기에 그럴까.

백악관에서 친구를 원한다면 개를 키워라

조지 H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도우미견 설리가 부시 전 대통령 관 앞에 엎드려 있다. 부시 가족 대변인인 짐 맥그래스는 트위터에 설리가 주인의 관 밑에 누워있는 사진 한 장과 함께 "임무 완수"라는 글을 함께 올렸다.

‘대통령 반려동물 박물관’ 홈페이지에 따르면 역대 미국 대통령 46명 중 43명이 백악관에서 반려동물을 키웠다. 대통령의 네 발 달린 친구들은 백악관을 나온 후에도 수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대통령 부부와 함께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2009년 테드 케네디 당시 상원의원이 선물한 포르투갈 워터 도그 ‘보’와 8년간 백악관 생활을 같이했다. 퇴임 후 암 투병을 했던 보가 사망하자 오바마는 트위터에 “우리 삶에서 변함없고 다정했던 존재”라며 추모 글을 올렸다.

미국의 33대 대통령인 해리 트루먼은 “백악관에서 친구를 원한다면 개를 키워라”라는 말을 남겼다. 살벌한 정치판에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고받으며 심신을 달랠 수 있는 ‘친구’가 반려동물밖에 없었다는 자조 섞인 말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주인의 관을 지켜 유명해진 반려견도 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퇴임 후 건강이 악화되자 반려견이자 도움견으로 활동한 ‘설리’가 주인공. ‘설리 부시’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부시 가문에 정식 입양됐다는 얘기까지 나온 설리는, 2018년 부시가 94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관 앞에 누워 있는 사진이 엄청난 화제가 됐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 웰시코기 ‘믹’과 ‘샌디’도 유명하다. 둘은 여왕의 운구차가 도착한 윈저성 안뜰에 미리 마중 나와 귀와 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자리를 지켰다. 어딜 가든 여왕 곁에 있던 반려견들을 두고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움직이는 왕실 카펫’이라고 표현했다.

견심은 곧 표심?

윈저성 앞에 서 여왕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반려견 '믹'과 '샌디'의 모습.

정치인들과 반려동물의 유별난 유대 관계는 어디서 비롯됐을까. 동물이 정치인에게 긍정적 이미지를 줄 수 있는 매개체라는 게 우선 이유로 꼽힌다. 오래된 광고 기법인 ‘3B 법칙’. 모델로 아기(Baby), 동물(Beast), 미인(Beauty)을 등장시켜 호감도를 올리는 방법이다. 박성민 정치컨설턴트는 “동물은 각종 커뮤니케이션에서 흥행이 예정된 보증수표”라며 “특히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늘어나고 소셜미디어 등으로 반려동물 사진이 활발하게 공유되면서, 보편의 관심사로서 매력도가 커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애완동물에서 반려동물로, 가족의 지위를 얻은 동물에서 정치인들이 정치적 효용을 발견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신율 명지대 교수(정치학)는 “반려동물 가구 1000만 시대에 반려동물 친화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은 표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했다. 지난해 9월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인구주택총조사 표본 집계’에 따르면 국내 반려동물 양육 가구는 전체 가구의 15%인 312만9000가구로 조사됐다. 7가구 중 1가구가 반려동물을 키우는 셈이다. 지난 20대 대통령선거에서 4명의 후보 모두 동물복지 전담 조직을 두겠다고 내세운 바 있다.

‘정치적 동물학대’ 비판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키우던 진돗개 5마리.

하지만 동물을 ‘보여주기식’으로 활용한다는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3년 청와대 입성 당시 선물받은 ‘새롬이’와 ‘희망이’ 등 9마리를 탄핵 직후 청와대에 두고 가 ‘유기 논란’이 불거졌다. 당시 한 방송에서 문 전 대통령은 “대선 출마만 안 했으면 직접 인수해 키우고 싶은 마음”이라며 남겨진 진돗개들에 대해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성남시장 시절인 2014년 유기 동물 입양 홍보를 위해 유기견 ‘행복이’를 입양했다가 2018년 경기도 지사로 당선된 후 행복이를 데리고 가지 않아 파양 논란이 일었다. 당시 이 대표는 “행복이는 개인 자격이 아닌 성남시가 입양했다. 개인 소유가 아니라서 경기도로 데려올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동물 단체들은 ‘정치적 동물학대’라고 비판한다. 동물보호단체 비글구조네트워크는 지난 14일 소셜미디어를 통해 “(풍산개들이) 대통령기록물임에도 귀히 보호되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적 셈법에 따라 동물원을 떠돌며 오갈 데 없는 애물단지로 전락해버렸다”며 “‘정치적 동물학대’를 멈출 것”을 호소했다. 동물법 전문 김동훈 변호사는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는 민법 규정이 입법예고됐지만, 여전히 정상 간 호의를 위한 답례품처럼 살아있는 동물을 주고받는 문화가 문제”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