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오전 8시 태백 장성광업소에 광부들이 갱구(坑口)를 따라 걸어가고 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11일 오전 8시. 안개가 뿌옇게 낀 강원 태백시 장성광업소 탄광 입구에 광부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일하는 1교대 팀. 작업복과 장화, 안전모를 갖춰 입은 광부들은 한 손엔 랜턴을 든 채 도시락과 채탄 장비가 든 가방을 메고 600여m 갱구(坑口)를 따라 걸었다. 20여 분 걸으니 승강기가 나타났다. 지하의 채탄 현장과 지상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통로. 초속 7m로 오르내리는 승강기는 광부 50여 명을 실은 채 불과 2분 만에 900m 아래로 빨려들듯 내려갔다. 승강기에서 내려서도 125m 비탈길을 따라 안으로 더 걸어가야 하고, 3㎞ 남짓한 길은 인차를 타고 또다시 20분쯤 들어가야 작업장에 도착한다.

해발 600m에서 해저 475m까지 장장 45분이 걸리는 탄광의 막다른 길, 막장.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워 안전모에 달린 빛이 없으면 어둠만이 남는 곳. 한겨울에도 지열(地熱)로 인해 30도 안팎의 기온을 보이는 광부들의 일터다. 식사도 휴식도 여기서 한다. 밥은 대개 광업소 구내식당에서 파는 도시락을 챙겨오지만, 김밥을 싸오는 광부도 있다. 커피믹스 보관박스도 따로 있다. ‘막장의 벗’ 쥐들이 파먹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최근 경북 봉화 아연 광산에서 지하 갱도가 무너져 고립됐던 광부 두 명이 221시간 만에 구조됐다. 기적과 같은 생환이 온 국민에 희망을 불어넣었지만, 불과 두 달 전 태백 장성광업소에서는 한 광부가 석탄이 물과 뒤섞여 펄처럼 된 죽탄에 휩쓸려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대한석탄공사가 설립된 1950년부터 지난해까지 전국 탄광에서 발생한 사고로 사망한 피해자만 4569명. 매년 탄광 사고로 63명이 사망했다.

2022년에도 광부들은 여전히 목숨을 걸고 입갱(入坑)하고 있다. 광산 밖으로 나와 햇빛을 보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곳. 광업소 면적만 140㎢, 지하로 굽이굽이 난 갱도 길이가 총 348km에 이르는 국내 최대 장성광업소를 <아무튼, 주말>이 다녀왔다.

채굴된 석탄을 정탄과 폐석으로 분리하는 작업을 하는 선탄부(選炭婦)들의 모습.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오늘도 무사히!

‘오늘도 무사히!’ ‘안전관리헌장’ ‘나는 절대 다칠 수 없고 나로 인해 동료를 다치게 할 수 없다’.

장성광업소 곳곳에는 안전과 관련한 문구들이 곳곳에 붙어 있다. 갱내 작업장이라는 특수한 환경 탓에 예측하기 어려운 갖가지 재해가 광부들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20년 근무한 김원문(46) 생산계장은 “자연과 싸움에서 완벽한 대비책은 없다”고 했다. 채굴을 위해 발파 작업을 하다가 갱도가 무너져 내리는 경우는 물론, 터져나온 지하수와 석탄이 뒤섞여 휩쓸리는 사고도 발생한다. 일산화탄소와 메탄가스에 질식하거나, 폭발 사고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광부들은 저마다 목숨을 잃은 뻔한 경험이 있다. 30년째 막장에서 채탄 작업을 하는 홍성현(50)씨는 무너진 석탄으로 고립됐다가 가까스로 구출된 경험을 포함해 크고 작은 사고만 15번 정도 겪었다. 아침에 막장에 같이 들어갔던 동료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오는 경우도 다반사다. 은퇴한 광부 현영기(65)씨는 생사의 갈림길에 3번 넘게 섰다. 막장에서 갱도가 무너져 가까스로 머리만 빼놓고 전신이 다 묻혀버리는 사고도 겪었다. 10분 차이로 빠져나간 막장에선 지하수가 터져 휩쓸려갈 뻔한 적도 있다.

인차를 타고 이동하는 광부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광부들은 ‘오늘도 무사히’라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었다. 탄광 도시인 태백시의 표어다. 장성광업소에서 작업 도중 삶을 마감한 광부들만 1014명. 광부들은 “일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동료들과 함께 딱 햇빛을 보는 순간에야 오늘도 무사히 살아 나왔다고 느낀다”고 했다.

목숨이 오가는 상황이지만 광부들은 탄광을 쉽사리 떠나지 못했다. 태백 토박이 김원문 계장의 아버지는 광부였다. 진폐증 후유증을 앓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며 광부의 삶만은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IMF라는 변수가 생겼다. 돌고 돌아 그는 결국 2002년 장성광업소로 돌아왔다. 다섯 살 난 자식과 아내를 뒤로하고 매일 갱도로 들어선다.

남편을 광부로 둔 가족들은 하루하루 애끓는 마음으로 산다. 광산 지역엔 ‘남편이 출근한 후 신발을 방 안쪽으로 향하게 놓는다’는 관습이 있다. 밖으로 나갔던 남편이 탈 없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 신발을 거꾸로 돌려놓는 것이다. 올해 구순인 김형옥(90) 할머니는 “아침에 나갔다가 빈 도시락통 들고 들어와야 안심을 하지. 들어와서 밥 먹어야 살아있는 줄 알지”라고 했다.

평생 광부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살아온 정영희(88)씨는 “남자들이 출근하면, 여자들은 그 위험한 데 가는 남자들한테 부정이라도 탈까 봐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지”라며 회상했다. 이 밖에도 ‘도시락에 밥을 4주걱 푸지 않는다’ ‘전날 밤 꿈자리가 뒤숭숭하면 출근하지 않는다’ 등의 각종 금기 사항이 있다.

지하 작업장으로 내려가는 승강기에 광부 50여 명이 탔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지상의 막장’에서 일하는 선탄부

사고로 남편을 떠나보낸 여성들은 ‘지상의 막장’에서 여성 광부인 선탄부(選炭婦)로 활동했다. ‘선탄’은 채굴된 석탄을 정탄과 폐석으로 분리하는 일로, 잡석과 갱목 등 온갖 이물질들을 선별하는 작업이다. 광업소 측은 막장 사고로 순직한 광부의 아내들을 선탄부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채용했다. 굉음이 흘러나오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선 이들은 먼지와 돌가루가 날리는 돌을 분류하고, 커다란 돌은 거대한 망치를 들고 내려쳐 잘게 부순다. 최전성기에는 200명이 선탄부로 활동했으나 지금은 10명의 여성 광부들이 남았다. 남편 벌이로만 충분치 않아 뒤늦게 선탄 작업에 뛰어든 여성들이다.

여성 광부들의 손은 마디마디마다 휘어 있었다. 석탄 가루가 살 틈에 박혀 생겨난 작은 점들도 선명했다. 어느덧 12년째 선탄 작업을 하는 손모(60)씨 남편도 광부다. IMF 때 사업이 망해 결국 남편 고향으로 함께 돌아왔다. 손씨는 “시집올 때 맞췄던 반지가 이젠 맞지 않아도, 이 일을 한 덕분에 애들 대학 보낼 수 있었지” 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작업을 마친 광부가 장화에 묻은 탄가루를 씻어내고 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태백시의 ‘검은 진주’

석탄 가루가 들러붙은 폐는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광부들의 직업병인 진폐증이다. 태백 사람들은 석탄을 두고 ‘검은 진주’라고 불렀다. 광부들이 지하 900m까지 내려가서 자기 폐를 불살라가며 불씨를 지하에서 캐내는 것이 마치 진주를 빚어내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해서 나온 말이다.

‘검은 진주’를 품은 광부들은 한때 산업화 신화를 일궈낸 ‘산업역군’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살았다. 1996년에 광부 생활을 마친 김홍근(79)씨는 진폐증을 앓고 있어 대화하는 내내 기침을 콜록거렸지만, 광부로서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김씨는 “한때는 태백 아니면 우리나라 연료를 해결 못 했으니까, 대한민국을 다 밝혔던 게 우리 광업소였지”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실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석탄 캐는 광부들을 ‘산업역군’ ‘산업전사’라 치켜세웠다. 채탄 현장에서 사고로 사망한 광부들을 ‘순직산업전사’라 추서하고, 태백 시내 연화산 자락엔 ‘산업전사위령탑’이 세워졌다. 에너지를 만들고 기계를 움직이고, 발전소를 가동시켰던 석탄을 땅속 깊은 곳에서 직접 캔다는 자부심은 남달랐다.

당시만 해도 광부는 꿈의 직종.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꿈을 안고 탄광으로 몰려들기도 했다. 몸은 고돼도 고정적인 월급이 들어오고 산업역군이라는 자부심이 있는 광부는 인기 직종이었다. 1981년엔 외부에서 몰려든 인구 덕분에 삼척군 장성읍과 황지읍이 합쳐져 태백시로 승격됐다. 시내 곳곳엔 광부들의 연립 사택이 들어섰다. IMF 외환 위기 직후엔 반짝 특수도 누렸다. 천안 출신인 김효수(51)씨는 그 시절 태백으로 이주했다. 김씨는 “당시만 해도 광부에 2000명이 지원해서 23명을 뽑았다”며 “뒷돈을 줘야만 들어올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고 했다.

1984년에 준공된 5층짜리 장성광업소 인근의 광부 사택.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폐광 앞둔 탄광

그러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에너지 정책도 바뀌었다. 호황을 누리던 장성광업소는 1989년 시작된 석탄 합리화 정책을 시발점으로 점차 쇠락했다. 석탄은 에너지 생산량에 비해 나오는 공해 물질이 많아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석탄의 자리는 석유난로와 도시가스가 채웠다.

1987년만 해도 전국 363개나 퍼져 있었던 탄광들도 연이어 폐광했다. 지금은 공영 탄광인 장성, 도계, 화순 광업소 3곳과 민영 탄광인 경동 탄광 등 단 네 곳만 남았다. 전남 화순광업소는 당장 내년 말 폐광 예정이고, 삼척 도계 광업소는 2025년 말에 문 닫을 예정이다. 장성광업소도 2024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1979년 최전성기에 장성 광업소의 최대 생산량은 220만t을 기록했지만, 지난해 생산량은 16만4000t에 그쳤다. 최전성기에 비해 생산량이 7% 수준으로 쪼그라든 셈이다. 1970년대만 해도 6000명 규모였던 광부도 현재 274명으로 줄었다.

폐광을 앞둔 이들의 심정은 어떨까. 장성광업소 인근 광부 사택에서 만난 한 주민은 “다 망했는디 그런 거 물어 뭣혀” 하며 고개를 돌렸다. 1984년에 준공된 5층짜리 아파트 단지는 을씨년스러웠다. 총 11개 동이 있지만 붕괴 위험으로 2개 동은 비워져 있다. 인근에 놀이터와 초등학교가 있지만 아이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광부들은 오히려 폐광을 기다린다. 광부 홍성현씨는 “30년간 다닌 회사를 스스로 닫아달라고 할 정도로 이제는 고된 일에 힘이 부친다”고 했다. 김원문 계장은 “지게차 운전 자격증 등을 따서 폐광 이후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후 4시가 넘자 막장 작업을 무사히 마친 광부들이 지상으로 한 명씩 걸어 나왔다. 5도 안팎의 쌀쌀한 날씨였지만, 작업을 마친 이들의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됐고, 얼굴은 탄가루로 시커멓게 뒤덮여 있었다. 언젠가 사라질 일터이지만 ‘오늘도 무사히’ 푸른 하늘을 다시 보게 된 광부들 얼굴엔 안도의 웃음이 번졌다.

막장 작업을 무사히 마친 광부들이 지상으로 걸어나오고 있다. '오늘도 무사히' 작업을 마친 이들의 얼굴엔 안도의 웃음이 번졌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QR코드를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광부들의 삶을 더 엿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