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전통 의상을 갖춰 입고 지난 18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들어가고 있다. / AFP 연합뉴스

지난 17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무함마드 빈 살만(37)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국내 주요 대기업 총수들의 차담회. 한국인들은 빈 살만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주목했지만, 아랍의 젊은이들은 그의 전통 의상 ‘토브’ 밑에 드러난 짙은 갈색 옥스퍼드화에 주목했다.

지난 17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국내 주요 대기업 총수들과의 차담회에서 그는 흰색 토브 위에 회색 재킷을 입고, 갈색 옥스퍼드화를 신었다. / Bader Al Asaker

사우디 국영 영자지 아랍뉴스에 따르면, 이 구두는 영국 신발 회사 ‘크로켓 앤드 존스’에서 판매하는 ‘할람’ 모델로 가격은 470파운드(약 75만원)이다. 아랍뉴스는 “왕세자의 구두는 ‘우아하다’는 평을 받으며 트위터와 아랍 젊은이들 사이에서 엄청난 화제가 됐다”고 18일 보도했다. 아랍 뉴스는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발행되는 영자지로, 빈 살만의 남동생인 투르키 빈 살만 알 사우드가 회장으로 있다.

왕세자의 패션이 화제가 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사우디 국부펀드 이사회에서 의장 자격으로 참석한 빈 살만이 입은 프랑스 캐시미어 브랜드 ‘프랭크 나마니’의 조끼는 ‘왕세자의 조끼’로 불리며 아랍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그가 입은 제품은 2020~2021 가을·겨울 컬렉션 모델로 6551달러(약 887만원)다. 카멜색 겉면과 밝은 청록색 안감이 주는 독특한 배색이 특징이다. 머리에 쓴 슈마그도 전통 붉은 체크무늬가 아닌 카멜색으로 톤을 맞췄다. 이것은 ‘카슈미르 샤투슈’ 제품으로 746달러(약 102만원)에 판매되고 있다고 한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브랜드는 아니었던 ‘프랭크 나마니’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저희 브랜드를 주목받게 해주신 왕세자에게 감사드린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지난해 사우디 국부펀드 이사회에 의장 자격으로 참석한 그는 검은색 토브 위에 프랑스제 조끼를 입었다. / 사우디 통신사 SPA

◇빈 살만 패션의 ‘로열 효과’

패션계에는 ‘로열 효과(Royal Effect)’라는 것이 있다. 부(富)와 권력을 동시에 가진 왕족이 입은 옷들이 대중에게 유행하는 현상이다. 과거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과 다이애나 왕세자비, 최근엔 케이트 미들턴 왕세자비의 패션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왕가의 특성상 남성 패션이 유행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레이스 켈리 모나코 왕비의 외손자인 안드레아와 피에르 카시라기 형제 패션이 주목받는 정도였다.

특히 사우디 등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지켜야 할 의상 규율이 많다. 남자의 경우엔, 옷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흰색 ‘토브’와 바지 ‘서월’, 추울 땐 외투 ‘미실라’나 자수가 놓인 ‘비시트’를 입어야 한다. 머리엔 흰색 모자 ‘타키야’와 붉은색 체크무늬 ‘슈마그’를 쓰고, 검은색 원형 띠 모양의 ‘이칼’을 올려야 한다. 신발도 발가락이 보이는 사우디 전통 샌들인 ‘마다스’를 착용해야 한다. 여성의 경우엔 더욱 엄격하다. 어깨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덮는 ‘아바야’를 입고, 머리에는 눈만 겨우 내놓는 ‘니캅’을 착용해야 한다.

그러나 빈 살만은 2018년 “여성은 자신의 옷을 스스로 선택할 자유가 있다”며 아바야 착용 의무를 풀어줬다. 자신도 전통 의상을 벗어나 TPO(시간·장소·경우)에 맞게 옷을 입었다.

빈 살만이 201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마크 저크버그 페이스북 창업자를 만났을 때는 청바지와 흰색 셔츠, 캐주얼 회색 재킷으로 ‘실리콘밸리룩’처럼 입었다. 2018년 미국 시애틀에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를 만났을 때는 보수적인 MS 분위기에 맞춰 짙은 회색 정장에 빨간색 넥타이를 착용했다.

2018년 미국 시애틀 마이크로소프트 본사를 방문한 빈 살만이 정장을 입고 빌 게이츠 창업자를 만나고 있다. / Bader Al Asaker

전통과 현대의 믹스매치

그의 패션이 주목받기 시작한 건 2019년 사우디 리야드에서 열린 전기차 레이싱 대회 ‘포뮬러 E 행사장’이었다. 이날 그는 흰색 토브와 붉은 체크 슈마그, 검은색 이칼까지는 전통 의상으로 챙겨 입었지만, 그 위에는 영국 브랜드 바버의 남색 재킷을 걸치고, 톰포드 에비에이터 선글라스를 쓴 다음, 검은색 아디다스 이지부스트 350 운동화를 착용해 코디했다. ‘전통과 현대의 믹스매치룩’을 선보인 것이다. 빈 살만이 착용한 바버 재킷은 순식간에 ‘왕세자 재킷’이라며 화제가 됐다. 사람들은 트위터에 구입 영수증 인증 샷을 올리기도 했다. 힙합 가수들이 즐겨 신는 이지부스터를 신은 왕세자의 패션은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친근감도 불러일으켰다.

이때부터 빈 살만은 ‘전통과 현대의 믹스매치룩’을 주로 선보였다. 믹스매치룩은 여러 가지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먼저, 사우디 내부적으로는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기성 세대와 개방을 원하는 젊은 세대를 동시에 설득할 수 있다. 사우디 정치인이자 기업인인 그는 패션을 통해 두 역할을 오가기도 한다. 최근 방한했을 때도 윤석열 대통령을 만날 때는 흰색 토브 위에 회색 정장 재킷, 카멜색 미실라를 입어 정치 군주의 느낌을 강조하고, 기업인들을 만날 때는 미실라를 벗어 비즈니스 느낌을 더 강조했다.

※스마트폰으로 아래 QR코드를 찍으면 더 많은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믹스매치룩은 그의 외형과도 잘 어울린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는 키 183cm에 체격도 큰 편이다. 얼굴은 이목구비가 짙으면서, 이마가 넓고, 수염이 풍성하다. 머리를 전통 의상으로 감싸면서, 현대 의상으로 포인트를 주는 패션 스타일이 그의 체형과 잘 맞았다는 것이다.

빈 살만은 지난 20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사상 최초 중동 월드컵 개막식에서도 흰색 토브와 미색 미실라를 입어 군주로서의 위엄을 보여줬다. 이후 열린 개막전 경기에서는 미실라를 벗고 빨간색 축구 응원 수건을 목에 걸쳤다. 그가 앉은 자리는 카타르의 현 국왕인 타밈 빈 하마드 알사니와 잔니 인판티노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 옆. 현재 중동의 최고 권력자가 누구인지를 패션과 자리로 보여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