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우한’이라는 도시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최근 ‘우한 폐렴’으로 유명해진 도시 말이다. 병명(病名)에 편견을 심을 수 있는 고유명사를 넣을 수 없다는 원칙에 따라 ‘COVID-19′가 국제 공식 명칭이 되었지만, 코로나가 처음 발생했을 때 한국에서는 이 병을 ‘우한 폐렴’이라고 불렀다.
우한은 중국 대륙을 가로지르는 양쯔강을 따라, 내륙으로 한참 들어간 지점에 있다. 1858년 톈진조약으로 개항한 도시 10곳 중 하나로, 이후 외국 열강의 조계지가 형성된 국제도시로 급성장했다. 한때 별명이 ‘중국의 시카고’였다. 우한은 양쯔강과 한수이(漢水)강이 구분하는 세 구역, 즉 한커우(漢口), 한양(漢陽), 우창(武昌)을 포함하며, 1930년대 기준 중국에서 둘째로 큰 도시였다. 무엇보다 양쯔강을 따라 동서를 가로지르는 뱃길과 북으로 베이징, 남으로 광저우를 잇는 철길이 만나는 지점이었으니, 그야말로 교통의 요지였다.
우한이 20세기 세계사에 소환되는 또 하나의 중대 사건은 중일전쟁(1937~1945)이었다. 충칭으로 쫓겨 간 국민당 정부의 마지막 보루가 우한이었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 어느 쪽에서도 양보할 수 없는 결전이 우한 일대에서 일어났다. 일본군에 점령당했다가 중국이 되찾기를 몇 차례나 반복했던 치열한 격전지였다.
바로 그 중일전쟁이 한창일 때 우한에 살고 있던 한 조선인 화가가 있었다. 이름은 임군홍(林群鴻·1912~1979). 그는 소년 가장으로 출발해, 생계를 위해 광고, 디자인, 인쇄 사업을 하는 한편, 꾸준히 유화 작품을 발표해 1930~40년대 서울, 베이징, 톈진, 신징(만주국 수도, 현 창춘) 등에서 전시회를 열었던 화가였다. 1939년부터 1946년까지 우한 한커우에 정착해 사업을 하는 동시에 틈틈이 중국의 일상과 풍경을 그린, 풍부한 경험과 넓은 스펙트럼을 지닌 화가였다.
그러나 해방 후 임군홍은 이념 갈등의 희생양이 되어 억울한 옥살이를 했고, 좌익으로 낙인찍혀 한국전쟁 중 북으로 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소년 가장에서 디자이너, 화가로
임군홍(본명 임수룡)은 191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구한말 무관 출신이었고, 부친은 장사를 크게 했던 꽤 부유한 집안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급격히 가세가 기울면서, 임군홍은 보통학교 졸업 후 졸지에 가장(家長) 역할을 하는 처지가 되었다. 상급 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고, 외가 친척이 운영하는 치과 병원에서 기공사로 일했다.
그가 그림에 관심을 가진 것은 주교공립보통학교에서 만난 김종태와 윤희순 덕분이었다. 한 명은 조선미술전람회 스타 화가였고, 또 한 명은 화가 및 평론가로 활동한 존경받는 미술인이었다. 이들의 영향 아래 임군홍은 보통학교 졸업 후에도 화가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시간을 쪼개 유화를 배우고 야간 학교를 다녔다.
1936년 임군홍은 치과 기공사로 일하면서 만난 간호사 홍우순(1915~1982)과 5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했다. 홍우순은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화가를 꿈꾸는 청년과 결혼을 강행할 만큼 당찬 여성이었다. 결혼 전부터 이미 임군홍의 작품에 반라(半裸)의 모델로 등장하는 대담한 ‘신여성’이었다. 여담이지만, 홍우순은 현재 가수이자 화가로 활동하는 ‘솔비’의 이모할머니다.
결혼 후 임군홍은 하고 싶은 미술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요즘 말로 하면 ‘디자인’ 관련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이름도 멋진 ‘예림스튜디오’라는 회사를 설립해서, 간판이나 포스터 디자인부터 무대장치, 실내장식 사업을 벌였다. 그러면서 틈만 나면 유화물감과 씨름했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유화 작품을 발표해 연이어 입선했고, 청년 화가끼리 어울려 유치진이 운영하던 ‘살롱 플라탄(Salon Le Platane)’에서 그룹전을 열기도 했다. 그는 미술도 하고 돈도 버는 ‘두 마리 토끼’를 좇아 열심히 살았다.
◇1940년대 중국 풍경
1930년대 말 임군홍은 시야를 넓혀 중국 진출을 꿈꿨다. 광고 디자인 사업에는 번화한 대도시가 당연히 유리하다. 마침 한 친구가 종군 화가로 우한에 머물면서 조선에 전쟁 소식을 알리고 있었는데, 그를 통해 임군홍은 우한에 대한 정보를 접했을 것이다. 우한은 전쟁 통이라 위험이 따르는 곳이었지만, 위험할수록 돈을 벌 기회도 많은 법이다.
1939년 임군홍은 한커우 화루가(花樓街) 45호에 터를 잡았다. ‘건물마다 꽃 장식을 한 거리’라는 매력적인 이름의 ‘화루가’는 “밤이 깊어도 노랫소리가 그치지 않는다”는 우한 최고의 번화가였다. 이곳에서 임군홍은 조선에서 하던 일을 확장해 영화관 광고, 버스 광고, 인테리어 사업 등을 벌였다.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또한 중국에 남아 있던 조선인 서화가의 작품을 사서 서울에 가져다 파는 일도 했다. 간송 전형필이 그의 주 고객이었다.
늘 그랬듯, 임군홍은 사업을 하면서 동시에 작품 제작에 매달렸다. 그는 먼저 자신이 주변에서 보고 사랑하는 것들을 기록하듯 화폭에 담았다. 우한에서 태어난 아들과 딸, 고국에 계신 어머니와 형의 그림이 유난히 많은 것은 가족에 대한 그의 애틋한 사랑 때문이었으리라. 빛이 들어오지 않는 화루가의 어두운 골목, 야채 가게의 풍경, 정육점에서 일하는 아저씨 등 화루가를 둘러싼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담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한창인 우한에서 그가 만난 현실은 끔찍한 것이었다. 임군홍은 가슴에 상처를 입은 벌거벗은 여인, 나병에 걸려 길거리를 헤매는 행려병자의 참혹한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시체가 나뒹구는 처참한 장면을 찍은 사진도 그의 아카이브에 남아 있다. 현실은 어둡지만,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지 않나. 무참한 현실을 보고 겪은 만큼, 임군홍의 시선은 더욱 인간적이고 따뜻했다. 예술가로서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허위의식이 그에게는 없었다. 대신, 주변의 사람과 풍경이 이루는 소소한 일상을 소중하게 기억하는 법을 그는 알았다.
◇해방 후의 시련
조선이 해방되고 중국 내전이 본격화될 무렵 임군홍은 서울로 돌아왔다. 1946년 귀국 후 그는 비슷한 사업을 계속했다. ‘고려광고사’라는 광고, 디자인, 인쇄 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이 회사는 해방 후 서울에서 미술가가 설립한 첫 디자인 회사였던 셈이다. 서울역과 지방 역 대합실의 광고 대행 일을 따내서 사업 규모도 상당했다.
그러나 해방 공간의 극심한 혼란 상황은 임군홍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1948년 초 그는 운수부(교통부)의 신년 달력을 제작하는 데 최승희 사진을 활용했다는 이유로 검거되었다.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는 이미 1946년 7월 좌익계 인사였던 남편 안막과 함께 월북한 상태였다. 인기 있는 모델을 활용해 달력을 제작한 것뿐이었겠지만, 이는 남한 사회에서 정치적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검거 이유를 밝힌 철도 경찰청장은 브리핑에서, 최승희가 쓴 붉은 갓은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것”이며, 최승희의 갓끈에 구슬이 16개 달린 것은 “소련 16연방을 의미하는 표시”라고 말했다. 심지어 최승희가 든 부채는 아래 붉은색의 망치와 낫 비스름한 형상이 오른쪽의 경복궁 향원정을 부채질하여, “남조선의 적화(赤化)”를 의미하는 표식이라고 해석됐다. 이런 황당한 해석으로 임군홍은 입건되어 수개월 옥고를 치렀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한번 좌익으로 낙인찍힌 상황이기에 임군홍은 한국전쟁 중 더 이상 남한에 남아 있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1950년 9·28 서울 수복 때 임군홍은 혼자 북으로 갔다. 일단 몸을 피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 이렇게 분단이 고착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미완성작 ‘가족’
임군홍이 북으로 떠나기 직전까지 이젤에 놓고 그리던 작품이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그린 작품이었다. 화면 오른쪽에 그의 아내 홍우순이 우두커니 앉아 있다. 탁자에 팔을 괴고 생각에 잠긴 여자아이는 중국에서 태어난 둘째이고, 엄마의 무릎에 안겨 있는 아기는 넷째이다. 홍우순의 배 속에는 곧 태어날 막내가 있었다. 모두 다섯 자녀와 아내, 그리고 홀어머니를 남겨둔 채 임군홍은 떠났다.
홍우순은 이 가족을 모두 건사해야 하는 처지가 되자 배오개시장, 즉 광장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족’ 그림에 등장하는 온갖 골동품과 값진 물건을 팔았다. 더는 팔 물건이 없어지자 그녀는 1982년 작고할 때까지 평생 광장시장의 2평짜리 가게에서 채소와 과일 장사를 했다. 홍우순은 어떤 상황에서도 임군홍의 작품을 목숨처럼 보전했고, 절대 보여주지도 팔지도 않았다. 1980년대 납‧월북 작가에 대한 해금 조치가 진행되기 전까지 어차피 사회에 내놓을 수도 없는 금기품이었다.
홍우순 사후에는 차남 임덕진이 작품을 지켰다. ‘가족’ 그림에서 엄마 품에 안겨 잠든 그 아이였다. 연좌제로 인해 직업 선택의 제약이 많았기에, 모친이 운영하던 가게를 이어받아 지금까지도 송이버섯 장사를 하고 있다. 그는 세 살에 부친과 헤어져 기억조차 남은 것이 없지만, 평생 작품을 통해 부친과 만나고 또 대화했다고 말한다. 임군홍의 대표작 5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것도 그였다.
북에 간 임군홍은 어찌 되었을까? 전쟁 후 그는 조선미술가동맹 개성시 지부장을 지내며 1961년까지는 어느 정도 지위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주체사상이 고조되던 1962년 현역미술가로 강등되어 하방 조치 되었고, 조선화 제작으로 전향했다가 1979년 작고했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임군홍이 만약 남에서 살아남았다면 어땠을까? 비슷한 연배의 화가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등은 모두 1950년대 이후에 자신의 색채를 찾아 독자적인 화풍을 이뤘다. 이들이 1930~40년대에 그린 작품은 거의 남아있지도 않다. 임군홍도 이들처럼 1950년대를 통과할 수 있었다면, 디자인과 유화를 겸비한 경험으로, 국경을 넘나든 드넓은 시야로, 자신만의 독자적 세계를 찾아내지 않았을까?
그러나 우리가 아는 임군홍은 1940년대 이전에 머물러 있다. ‘가족’ 그림에 등장하는 하얀 백합을 좋아했던, 행려병자의 모습조차 따뜻하게 담아냈던, 쓸쓸한 풍경을 사랑했던, 성실하고, 재주 있고, 꿈 많았던 청년 화가의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