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과 후 하교하던 아이가 또, 숨졌다. 서울 강남 한복판, 그것도 학교 후문 앞 인도가 없는 스쿨존에서 음주 운전 차량에 치였다. ‘민식이법’이 시행된 지 불과 2년 만이다.
지난 5일 오후 2시, 서울 강남구 청담동 A초등학교 후문에서 10m쯤 떨어진 도로변 한편엔 국화꽃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곳은 지난 2일 오후 5시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던 3학년 학생 B(9)군이 숨진 장소다. 꽃다발 사이로 ‘친구야, 잊지 않을게!’ ‘형, 편히 쉬세요’ 같은 글을 적은 메모지들이 붙어 있고, 초콜릿과 바나나 우유, 인형과 손난로가 놓여 있었다.
5일 오전엔 B군의 운구차가 학교에 들렀다. ‘마지막 등굣길’을 지켜보는 학교는 눈물바다가 됐다. 학생들은 “왜 친구를 더 이상 볼 수 없어요?” “네가 없는 우리 반이 너무 조용해”라며 운구차를 붙잡고 울었다. 학부모들도 오열했다. “어떻게 강남 한복판에서 한낮에 하교하던 아이가 죽을 수 있나. 아이를 도대체 어디에 맡겨야 안전하냐”며 격앙한 목소리도 나왔다.
다음 날 사고 현장에서 만난 B군의 부모는 당시 상황을 목격한 증인들을 수소문하고 있었다. 생전의 아들에 대해 묻자 “덩치가 크지 않은데도 누군가 반 친구를 괴롭히려고 하면 나서서 막던 아들”이라며 “우리가 오히려 조언을 받을 만큼 성숙한 아이였다. 자식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를 잃은 것 같다”며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아냈다. 아홉 살 아이의 비극을 막을 방법은 없었을까.
폭 4m, 인도 없는 양방향 차도
사고가 발생한 교차로는 폭 4m 남짓한 이면 도로다. 한쪽 도로는 경사가 60도쯤 되는 가파른 오르막길, 위에서 내려오는 차의 시야가 제한된다. 양방향으로 차가 오가지만 보도와 차도를 구분해주는 차단봉이나 경계석은 따로 없다. 횡단보도는 있지만 신호등은 없는 곳. 5일 오후에도 하교하는 학생들은 차들이 오가는 가운데 횡단보도 끝 B군이 사고를 당한 곳을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차량이 완전히 지나가고서야 학생들은 재빨리 횡단보도를 건너 달려갔다.
교차로에선 아찔한 순간이 여러 차례 보였다. 오르막길에서 내려오던 차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자 보안관은 지나가려던 아이를 안전 지시봉으로 제지했다. 대형 SUV가 지나가자 한 학생이 “야! 조심해” 하며 도로를 건너려는 친구에게 외쳤다. 사고 현장에 포스트잇을 붙이던 4학년 박모군은 “평상시에도 큰 차들이랑 오토바이가 쌩쌩 오가서 오갈 때마다 무서웠던 곳”이라고 했다.
전교생이 1793명이나 되는 대형 초등학교, 학생들은 매일 위험하게 등·하굣길을 오간다. 아이를 데리러 온 학부모 이진일(43)씨는 “좁은 길에 인도도 없이 차량이 뒤섞여 다니는 공간이라 이전부터 학부모들이 여러 차례 민원을 넣었지만 개선되지 않았다”고 했다.
학교 측은 2019년 강남구청에 진입로 양방향 도로를 일방통행 도로로 바꿔달라고 요청했지만, 인근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보행자 보도 설치와 저속 주행을 위해 도로를 사괴석으로 포장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관련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진행되지 않았다.
사고 발생 두 달여 전에도 학교와 학부모 측은 일방통행로 설정, 등·하교 시간 차량 통행금지와 함께 사고 위험 지역을 ‘어린이 보호 구역’으로 도색하는 방안을 논의했지만, 정문 쪽에 CCTV와 자동 속도 측정기만 설치됐다. 위험천만한 도로를 녹색어머니회가 등굣길에 지도하는 방법밖엔 없는 상황. 교통 지도가 따로 없는 방과 후 하굣길에서 급기야 사망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민식이법’ 이후에도 5명이 숨졌다
A초등학교뿐 아니다. 어린이 보호 구역 내 신호등을 우선 설치하고, 교통사고 가해자를 가중 처벌하는 ‘민식이법’이 2020년부터 시행됐지만, 그 후로도 스쿨존에서만 교통사고로 5명이 숨졌다. 지난해 5월 한국교통안전공단이 발표한 ‘무신호 횡단보도 운전자 일시 정지 의무 준수 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어린이 보호 구역인 초등학교 앞 도로에서조차 일시 정지 규정 준수율은 5.5%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어린이보호구역의 안전도 여전히 위태롭다. 행정안전부는 올해까지 전국의 모든 어린이 보호 구역에 무인 교통 단속 장비를 설치하고, 보도가 따로 없는 구역의 통행로 확보 등 안전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지만 현재 전국 어린이 보호 구역 1만6400군데 중 무인 교통 단속 장비가 설치된 곳은 1만1669곳으로 71%로 파악된다. 보도가 따로 없는 통학로도 여전히 900여 군데나 남아있다.
도로교통공단 박무혁 교수는 “스쿨존은 어린이 보행 안전의 최후 보루다. 체구 때문에 운전자 시야의 사각지대에 놓이거나, 갑자기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올 수 있는 어린이의 행동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며 “어린이 보호 구역 차도와 보도 분리 등 시설이 개선되고 보행 안전 시설물이 양적으로 확보되면, 교통사고 시 사망으로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낮아진다”고 했다.
“언젠가 일어났을 사고”
가해자인 30대 남성 C씨는 ‘민식이법(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어린이보호구역 치사)’, 위험 운전 치사, 도로교통법 위반(음주 운전) 혐의로 지난 4일 구속됐다. 당시엔 ‘뺑소니 혐의(특가법상 도주 치상)’가 적용되지 않은 상황. 경찰은 C씨가 자택에 주차한 후 약 45초 만에 현장으로 돌아온 점, 이후 현장에 있던 주변인에게 112에 신고해달라고 요청한 점을 근거로 ‘도주 의사는 없었다’고 봤다. 그러나 유가족과 학부모들은 “사고 즉시 구호 조치를 하지 않은 것은 뺑소니나 다름없다”고 반발하며 탄원서를 받아 강남경찰서에 4500장을 제출했다. 결국 경찰은 8일 가해자에게 ‘뺑소니 혐의’를 더하겠다고 밝혔다.
도로 환경 개선을 위한 민원도 이어지고 있다. 학부모들은 ‘학교 앞을 아이들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게 해주세요’라는 청원을 강남구청 온라인 청원 게시판에 올렸다. 현재까지 2048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사고가 난 학교 후문에 과속 단속 CCTV 설치, 바닥 페인트칠과 과속방지턱 설치, 인도 확보를 요구했다.
학부모들 요구가 거세지자 뒤늦게 안전 시설이 들어서고 있다. 구청은 내년에 설치할 예정이었던 과속 단속 카메라를 학교 후문에 달고 주민 반대로 무산됐던 ‘일방통행로 지정과 보도 설치’를 위한 용역 작업에 착수했다. 학교 측은 아이들 가방에 스쿨존임을 나타내는 형광색 안전 덮개를 매일 씌우기로 했다. B군의 부모는 “먼저 떠난 아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른 아이들이 같은 비극을 겪지 않게 바꾸는 것밖에 없다. 음주 운전자를 엄벌에 처하고, 다른 열악한 스쿨존 도로 여건을 개선하는 게 내 아들 삶을 이어 나가는 방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