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끝자락, 지는 해를 배웅하기 위해 충남 보령 대천 앞바다로 갔다. 해상 레일 바이크인 '스카이바이크'에서 바라본 일몰은 짧았지만, 강렬한 잔상을 남겼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한 해가 저물어 가는 12월의 한가운데서 지난 1년 열심히 달려온 나를 위해 ‘보상 여행’을 준비한다. 차디찬 겨울 바다 냄새도 실컷 맡고, 살 오른 해산물도 양껏 맛볼 참이다. 한 해를 살아내는 동안 두꺼워진 마음의 굳은살을 말랑말랑하게 녹여낼 노을이 함께라면 더 좋겠다. 그 어떤 위로도 필요 없을 테니.

다가오는 해를 맞이하기 위한 의식을 ‘치르기’ 위해 서해로 갔다. 목적지는 지난여름 경포대, 해운대보다도 뜨거웠다는 충남 보령시 대천 바다. 개통 1년 만에 260만대 차량이 오갔다는 ‘보령해저터널’을 달려 원산도에서 안면도 영목항까지, 77번 국도(국도 77호선)를 따라 서해를 가로질렀다.

◇스카이바이크 타고 해넘이를

명불허전 서해의 일몰 명소로 통하는 태안군 안면도 꽃지해수욕장을 과감하게 지나쳤다. ‘보장된’ 일몰을 뒤로하고 “3대가 덕을 쌓지 않으면 볼 수 없다”는 ‘인생 일몰’을 만나기 위해 대천으로 향했다. 바다 위에 놓인 레일을 따라 해변보다 더 가까이에서 해넘이를 감상할 수 있다는 해상 레일 바이크 대천해수욕장 스카이바이크가 있는 곳이다. 2016년 운행을 시작했지만, 최근 보령해저터널 개통, 보령 머드 박람회 개최 등 지역 ‘특수’로 다시 알려지기 시작해 사랑받고 있다.

한겨울에 들어선 지난 8일에도 스카이바이크를 타려는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매표소 업무를 담당하는 보령시 시설관리공단 직원에 따르면 “겨울철에도 하루 평균 200~300명이 찾는다”고 했다. 그는 “일몰 시각 30~40분 전쯤 스카이바이크에 탑승하면 바다 위 레일에서 무난하게 해넘이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매일 일몰 시각도 다르고, 시시각각 기상도 달라지니 단정할 순 없다”며 웃었다. 상·하행 전체 2.3㎞로 왕복 소요 시간은 대략 40분. 표를 끊는 이 중 일몰 시각과 이동 거리 등을 철저하게 계산하고 온 듯한 ‘고수 커플’도 보였다.

어쩐지 ‘3대가 덕을 쌓은 것만 같은 인상’의 커플 뒤를 이어 스카이바이크에 오른 시각은 오후 4시 35분. 서서히 페달을 굴러 바다로 나아갔다. 출발 후 반대 선로 탑승객들과 손 인사를 나누는 여유도 잠시, 이후 야트막한 경사로를 지나며 페달을 구르느라 추위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숨소리가 거칠어질 즈음 해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해 절반 지점에서 회차해 나올 때쯤 하늘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갔다. 구름의 방해로 ‘인생 일몰은 이걸로 끝인가?’ 싶었는데, 바다로 뻗어나가는 듯한 레일의 곡선 너머 구름 사이로 해가 잠시 고개를 내밀어 주었다. 옆자리 탑승객은 탄성을 질렀다. “이야~ 코스 한번 잘 ‘설계’했네!”

대천 바다 해안선을 따라 바다 위를 천천히 달리는 '스카이바이크'. 매표소 직원에 따르면 "요즘같은 겨울철에도 200~300명 정도가 이용한다"고 했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따뜻한 곳에서 편히 해넘이를 보기엔 대천전망대가 낫다. 스카이 집트랙의 출발지이기도 한 타워 꼭대기 층에 있다. 52m 높이, 20층 전망대 카페 삼면이 바다 전망이다. 남쪽으론 대천해수욕장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서쪽과 북쪽 자리에 앉으면 차 한잔의 여유를 만끽하며 황혼을 감상할 수 있다. 스카이바이크 탑승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정오부터 오후 2시까지 휴식 시간) 당일 현장 발권으로만 가능하며 2인 승차 시 2만2000원, 3인 승차 시 2만6000원, 4인 승차 시 3만원이다. 주말엔 현장 상황에 따라 원하는 시간대에 대기표를 받을 수 있다. 단, 눈·비·강풍 등 기상 상황이 좋지 않을 땐 운행하지 않는다. ‘머드 박람회장’ 내 솔밭 일대엔 17일부터 내년 1월 29일까지 야간 경관 조명이 더해지고, 23일부터 25일까지 대천해수욕장 일대에선 ‘2022 대천 겨울 바다 사랑 축제’도 열릴 예정이다. 23일부터 내년 2월 17일까지 인근 ‘보령 머드 광장’엔 스케이트테마파크도 들어선다.

◇원산도로 가는 가장 빠른 길

대천해수욕장 가까이엔 작년 12월 개통한 보령해저터널 남측 입구가 있다. 안면도에 이어 충남 서해에서 둘째로 큰 섬인 원산도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그동안 배를 타고 입도해야 했던 원산도는 세계에서 다섯째 긴 해저터널로 이름을 올린 보령해저터널 개통과 함께 올해 77번 국도에서 가장 주목받는 섬으로 떠올랐다. 대천에서 터널을 통하면 불과 10분대에 원산도에 닿는다. 여기에 안면도와 원산도를 잇는 원산안면대교까지 이용할 경우 대천해수욕장에서 태안 안면도 영목항까지는 20분도 안 걸린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출발해 조금 부지런히 움직이면 섬 여행은 물론 당일치기 해넘이 여행까지 가능해진 셈이다.

폐소공포증이 있지만, 보령해저터널을 통해 원산도로 향했다. 터널의 길이는 총 6.927㎞로, 이 중 순수 해저 구간은 5.2㎞ 정도 된다. 바다 밑 암반을 뚫고 만들었다는 터널은 해저면으로부터 55m, 해수면으로부터 최대 80m 아래에 있다. 터널로 진입해 시속 70㎞ 구간 단속을 지키며 달리다 보면 ‘해저 시점’이란 푯말이 보인다. 때로 귀가 먹먹해지는 이유다.

터널을 빠져나와 선촌선착장에 도착하니 바다 건너 효자도 위로 밝은 달이 청사초롱불처럼 마중 나왔다. 살랑살랑 일렁이는 작은 어선들과 달빛을 비추는 밤바다, 멀리 원산안면대교의 야간 조명까지, 고요하고도 적막한 원산도의 달밤은 어쩐지 낭만적이다. 잠시 동안 하얀 입김을 한껏 쏟아내고 청량한 밤공기를 채운 뒤 원산도 ‘체크 아웃’을 했다.

빨간 등대와 밝은 달 그리고 고요한 바다가 그림같이 어우러진 원산도 선촌선착장의 달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탁 트인 바다 너머 원산안면대교가 보이는 원산도 전망 카페 '바이더오'의 그네 포토존. 원산도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하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원산도는 낮과 밤 풍경이 확연히 다르다. 낮보다는 밤에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낮엔 드라이브 삼아 원산도를 찾는 이들이 많다. 원산도는 30㎞에 이르는 해안선 따라 사창·구치·원산도·저두 해변을 품고 있다. 곳곳이 ‘개발 중’이기는 하나 아직 높은 건물은 없다. 가장 높은 곳은 해발 116m 오봉산이다. ‘현재까지’ 전망 명소로 꼽히는 곳은 원산도의 북서쪽 초전항 부근 카페 바이더오 원산도커피다. 바이더오는 실내외 어디서든 탁 트인 바다와 마주할 수 있는 자리가 넉넉하다. 특히 야외석은 크루즈를 탄 듯 앉은 자리가 바다와 가깝게 느껴진다. 루프톱에선 원산도 일대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포토존인 동그란 그네에 앉으면 원산안면대교와 눈높이가 나란히 맞춰진다. 전망 감상을 여기서 끝낸다면 후회한다. 카페에서 나와 왼쪽 해안선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호젓한 바다가 기다리고 있다. ‘군관도’ ‘시루섬’ 등 크고 작은 서해의 섬들은 맑은 날이면 더욱 가까이 느껴진다.

◇오천항과 영목항

원산도에서 77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달리면 원산안면대교를 건너 안면도 영목항에 닿는다. 영목항은 안면도 최남단에 있는 항구로 한 발짝 떨어져서 원산도를 감상할 수 있다. 항구에 서면 바다 건너 원산도를 비롯해 효자도, 추섬, 빼섬 등이눈에 담긴다. 안면도의 새 전망대로 기대를 모으는 영목항전망대는 내년 3월쯤에나 개방한다니 아쉬운 대로 보행로가 있는 원산안면대교를 잠시 거닐어봐도 좋다.

겨울이지만 따스하고 포근한 운치가 느껴지는 오천항. 영보정은 오천항을 내려다보기 좋은 전망대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오천항 일대를 두른 '충청수영성'의 아치형 망화문터.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수도권에서 출발해 원산도로 향한다면 내비게이션은 대천을 거친다. 오천항은 오가는 길에 일부러 들러볼 만한 보령의 보석 같은 항구다. 원래 키조개 산지로 유명하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통해 전국구 명소가 됐지만, 낚시꾼들에겐 서해 성지와 같은 곳이다. 이맘때 낚싯배들은 광어·우럭을 낚아 올린다. 항구를 파고드는 금빛 노을과 달밤의 운치도 ‘제철’이다. 보령충청수영성에 서면 이유를 알 수 있다. 보령충청수영성은 충청도 수군절도사영이 있던 ‘수영(水營)’의 성으로 1510년쯤 축조된 것으로 알려졌다. 바다를 관측하기 위해 해변의 구릉을 활용해 쌓은 성은 500여 년이 지나 여행객들에게 오천항 최적의 전망 명소가 됐다. 성곽의 높은 곳에 자리한 영보정은 1504년 수사 이량이 처음 지었다가 개축과 복원 등을 거친 것으로 정약용과 이항복도 조선 최고의 정자라 극찬했다고 전해진다. 영보정 앞엔 ‘해유시화첩’(1842년) 안내도가 있다. 이정자 문화해설사는 “해유시화첩은 조선 후기 실학자 규남 하백원과 보령 출신 문인 5인이 함께 만든 기행시화첩”이라며 “그림 속 숨어있는 영보정의 당시 모습과 수영성에 정박해 있는 거북선을 찾아보라”고 귀띔했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배경으로 나왔던 장항선 청소역도 오천항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어 들러볼 만하다.

◇천북굴단지서 굴사냥

장은리 천북굴단지는 굴이 제철인 이 시기에 가장 활기가 넘친다. 봄·여름·가을 조용하던 식당들도 겨울에 들어서면 들썩이기 시작한다. 바닷가 따라 이어진 식당 앞에서 굴을 수북이 쌓아놓고 손질하는 것도 이곳만의 겨울 한정판 풍경이다. 현재 90여 식당 중에는 마을 주민들이 농한기를 이용해 직접 운영하는 곳이 많다. 생굴부터 굴구이, 굴밥, 굴전 등 다양한 메뉴를 판매해 주말 점심·저녁 시간대엔 ‘굴 사냥’을 나선 차량 행렬이 길게 늘어선다.

굴 손질부터 시작하는 천북굴단지의 아침 풍경. '해당화 굴수산' 주인이 싱싱한 굴을 고르고 있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굴단지에서 10~20여 분 거리에 있는 보령우유창고, 학성리 공룡 발자국 화석이 있는 맨삽지는 어린아이를 둔 가족이나 커플들의 나들이 코스로 인기다. 보령우유창고는 우유갑 모양 건물부터 눈길을 끈다. 1982년부터 개화목장으로 운영해오다 공장과 체험장을 추가로 갖추며 우유 테마 체험 목장으로 소문나고 있다. 겨울 볕 아래 건초를 질겅질겅 씹는 젖소를 보다가 어딘가에서 갑자기 뛰어나온 토끼를 만나는 것도 즐겁다. 목장 견학(건초 주기 체험 포함 5000원)을 비롯해 아이스크림·치즈·버터 만들기 체험(9000~1만5000원) 등을 할 수 있다. 카페에선 보령우유로 만든 커피와 음료를 맛볼 수 있다.

유기농 우유 테마 체험 목장인 '보령우유창고'. 우유갑 모양의 건물이 재미있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학성리공룡발자국화석' 부근에 있는 대형 공룡 조형물. 주변의 원시적 풍광과 어우러져 영화같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이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맨삽지 섬 일대에는 중생대 백악기의 지층인 남당리층(천수만층) 퇴적층이 해안 곳곳에 노출돼 있다. 당시 공룡들의 이동 흔적이 발자국 화석으로 남아 있다. 이 발자국들은 공룡들이 물을 마시러 물가로 이동하면서 남긴 것으로 추정한다. 밀물 때와 썰물 때 풍경이 다르다. 썰물 때 바닷길이 열리면 공룡 발자국 화석이 있는 곳까지 걸어 들어가 볼 수 있다. 부근에 대형 루양고사우루스, 프로박트로사우루스 등 공룡 조형물도 볼거리다. 바다, 섬 등 주변의 원시적 풍경과 어우러져 영화 ‘쥬라기 공원’의 현실판 공간 같다. 밀물이 시작되면 공룡 조형물이 서서히 물에 잠기는 모습도 영화처럼 실감 나게 느껴진다.

[ 바닷가에서 ‘백합 칼국수’ 끓여 먹는 낭만을 아시나요? ]

보령에서 만난 겨울 해산물 맛집
싱싱한 백합을 넣고 직접 끓여 먹는 '베이그릴121'의 백합칼국수. 기호에 따라 전복, 가리비 등을 추가할 수 있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주문하면 커다란 플라스틱 바구니에 주문한 메뉴와 조리 도구를 담아준다. 직원이 바비큐 그릴이나 휴대용 가스레인지 등 ‘장비’들은 챙겨다 주지만, 대부분 ‘셀프’로 운영한다. 충남 보령시 원산도에 있는 셀프 바비큐 전문점 베이그릴121 풍경이다.

실내석 없이 조개, 돼지고기 등 재료를 진열해놓은 ‘셀프 바’와 바람막이용 포장을 두른 바다 전망 야외석만 있는데도 원산도 맛집으로 떠올랐다. 메뉴는 프리미엄 조개구이(2인 기준, 8만9000원), 벌집 삼겹살(300g 기준 3만4000원) 등 바비큐 메뉴 위주다. 뜨끈뜨끈한 국물 요리인 백합칼국수(1인 1만2000원)도 있다. 예약 후 이용 시간에 맞춰 셀프 바에서 개별 포장된 재료들을 챙겨와 직접 해 먹는 방식이다. 백합칼국수를 주문하면 채소, 백합, 면이 바구니에 담겨 나온다. 직원은 “육수에 채소부터 투하한 다음 백합을 넣고 끓이고, 백합이 입을 벌리면 건져냈다가 면을 삶은 뒤 백합을 다시 넣어서 함께 먹으면 맛있다”고 설명했다. 번거로운 건 딱 질색이라는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만, “이것도 낭만”이라며 찾아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식사하는 동안 난로와 보리차가 담긴 주전자를 놓아주는데, 덕분에 잠깐이나마 캠핑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맛보다는 낭만! 홈페이지를 통한 예약제로 운영한다.

맛과 향이 진한 제철 굴에 주인이 농사지은 단호박, 콩 등을 푸짐하게 올린 '해당화 굴수산'의 굴밥. 반찬으로 나오는 굴전, 굴젓 등에 생굴을 추가해 먹으면 '굴 만찬'이다. /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굴을 좋아한다면 장은리 ‘천북굴단지’를 지나칠 수 없다. 어느 식당에서든 싱싱함이 살아있는 생굴부터 시작해 굴전, 굴젓, 굴밥, 굴구이, 굴찜 등 굴 요리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해당화 굴수산은 맛과 향이 깊은 굴과 주인이 농사지은 단호박, 콩 등을 넣고 바로 지어낸 굴밥(1만3000원)을 부담 없이 찾는다. 굴젓, 굴전 등 10여 가지 반찬이 곁들여져 푸짐하다. 굴밥은 굴 자체에 짠맛이 있기 때문에 달래비빔장은 굴밥의 간을 보며 먹어야 맛있다. 생굴(1만원)을 추가해 먹기도 한다.

오천항에선 해산물을 넣은 칼국수가 별미다. 오양손칼국수는 갑오징어를 넣은 오칼(9000원), 키조개를 넣은 키칼(1만원) 등으로 유명하다. 여기에 비빔국수와 조합을 이루는 ‘비·오칼’ ‘비·키칼’도 있다. 인원수대로 주문하면 국수와 보리밥은 ‘무한 리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