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디자이너 카를 라거펠트의 공통점은?

모두 ‘이 남자’가 만든 도장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민국 명장(名匠) ‘인장 공예 1호’인 최병훈(72) 여원전인방 대표. 인터넷으로 이름 석 자만 넣어 주문하면 도장 하나가 뚝딱 배달되는 시대에, 그는 “도장을 새기는 일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맞춤 신분증을 만드는 일”이라며 “의뢰인과 충분히 교감한 뒤 심성(心性)을 다해 만들어야 정확한 분신(分身)이 탄생한다”고 했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 작업실에서 만난 최병훈 명장에게 실제 도장 파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했더니 조각칼을 들고 활짝 웃었다. 날인 대신 서명을 하는 시대이지만, 그는 “지금도 자신을 증명할 때는 도장이 필요하다”며 “도장을 찍는 행위는 믿음과 약속의 징표”라고 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최병훈은 인장(印章)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40년 넘게 전서체(篆書體)를 연구해 글자를 디자인하고, 손톱만 한 인면(印面·글자를 새기는 면)에 네 글자를 조화롭게 새기는 작업을 통해 그 사람을 표현해왔다. 소문이 퍼지면서 힘 좀 쓴다는 국회의원, 관료, 시·구의원 선거를 앞둔 후보들이 앞다퉈 도장을 주문했고, ‘회장님 선물용’으로 도장을 의뢰한 기업도 있다. 하지만 그는 아랫사람을 시켜 도장을 주문하는 이들을 반기지 않는다고 했다. “도장 쓸 주인공을 알지 못한 채 새기는 것은, 얼굴도 모르는 사람 초상화를 그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서울 수유동 작업실에서 이 인장 명인을 만났다. 나무, 옥, 돌 같은 재료부터 새끼손가락 크기의 개인 도장, 조선 시대 어보(御寶) 형태까지 다양한 작품이 전시돼 있었다.

◇도장은 약속과 믿음의 징표

-명장은 도장을 어떻게 만드는지 궁금하다.

“이름을 받으면 자전에서 한자 전서체를 찾아서 그림 그리듯 디자인한다. ‘홍길동인’ 넉 자가 따로 보이지 않고 한 그림처럼 보여야 한다. 먼저 화선지에 크게 글씨를 쓰고, 뒤집어서 1.5㎝ 크기로 축소해 인면에 새기고 칼로 깎는다. 설계도가 나오면 간격을 늘이거나 줄인 뒤 비율을 맞춰 8~9번 다듬은 뒤 완성한다.”

-수정 과정까지 모두 작업 노트로 만들어 보관한다던데.

“그냥 깎아서 만들면 뚝딱 할 수 있지만, 이걸 2~3일씩 집중해 새기면 그만큼 심성이 도장 속에 들어간다.”

-그만큼 혼을 담아서 만든다는 뜻인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물건 팔아먹으면서 ‘장인의 혼을 담았다’는 소리다. 물건 만드는 사람이 자기 심성 다해 새겨주고 대가를 받는 것인데 혼은 무슨 혼. 의뢰인이 분신처럼 쓸 수 있게끔 정성을 다해 만들 뿐이다.”

-요즘은 날인 대신 서명을 하는 시대다. ‘도장을 찍는다’는 의미가 뭘까.

“한마디로 ‘믿음’이다. 아무리 서명이 많이 쓰인다지만 지금도 거래할 때, 서약할 때, 자신을 증명할 때는 도장을 찍는다. 이 엄숙한 행위는 ‘신분 증명’인 동시에 세상과 하는 강력한 ‘약속’이다. 도장에서 가장 중요한 얼굴은 밑바닥에 있는데 이를 인면(印面)이라 하고, 찍히는 순간 남는 흔적을 인영(印影)이라 한다. 즉, 자기 그림자를 문서에 놔둔다는 것. 영구불멸로 남긴 그림자를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다.”

-재료가 다양하다.

“나무, 옥, 돌 등 많은 재료가 있지만 역시 가장 좋은 재료는 나무다. 나무는 대패질, 니스칠도 하지 않고 호두 기름을 짜다가 인재(印材·도장 만드는 재료)에 문질러 바른다. 인재에 니스를 칠하면 나중에 칠이 벗겨지면서 도장이 깨진다.”

-어떤 나무가 좋은 인재인가.

“회양목이 단단하면서 결이 거칠지 않아 도장 파기에 가장 좋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는 도장으로 만들면 복이 든다고 해서 인기가 있다. 다른 나무는 벼락 맞으면 귀신 붙은 나무라고 안 쳐주는데, 대추나무는 액운을 막아준다는 속설이 있다. 나무는 자연 그대로 만든 무늬가 제일 멋스럽다. 뒤틀린 나무는 뒤틀린 대로 멋지다.”

①이건희·홍라희 부부의 세트 도장. 연꽃 아래 원앙 두 마리가 다정하게 노는 모습을 몸체에 새겼다. ②1988년 만든 김대중 전 대통령 도장. ‘계동 지인’이 의뢰해 ‘인(印)’ 대신 ‘신(信)’을 넣었다. ③디자이너 카를 라거펠트 방한 때 만든 한글 도장. /최병훈 명장 제공

◇이건희 부부에겐 원앙, 김대중은 ‘믿을 신(信)’

-이건희·홍라희 부부의 도장을 세트로 만들어 화제였다.

“삼성 계열사에서 이건희 회장에게 생일 선물을 한다고 부부 도장을 주문했다. 연꽃 밑에서 원앙 두 마리가 다정하게 노는 그림을 가져와서 몸체에 새겨달라고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화가가 그림에 낙관을 찍듯이 나는 도장 옆면에 측관을 새겨왔는데, 삼성 쪽에서 측관은 안 된다는 거다. 그러면 나는 못 하겠다, 세월 지나면 이 도장을 누가 만들었는지 어떻게 아느냐, 일단 샘플을 만들어 보낼 테니 보고 나서 괜찮으면 다시 만들어드리겠다고 했다. 결국 측관까지 새겨서 완성품은 삼성에 보냈고, 샘플은 내가 갖고 있다.”

-그 도장에 행운이 깃들었다던데.

“도장을 찾아가는 날, 회장님이 사면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만들어서 그런가(웃음). 도장에 복이 든 게 아니라 내가 복을 받은 기분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도장도 만들었다.

“1988년이니까 오래전 얘기다. 한복 입은 노인이 ‘계동 지인’이라면서 찾아왔다. 김대중씨가 옆에 사람이 없어서 잘 안 풀리니까 도장에 ‘인(印)’ 자 대신 ‘사람 인(人)’이 들어가는 ‘믿을 신(信)’ 자를 넣어서 사람이 잘 따르게 새겨달라고 주문했다. 그분은 새기는 시간까지 조건을 달았다. 어느 날 몇 시에, 내가 전화하면 그때부터 파 달라고 하더라.”

-카를 라거펠트 도장은 한글로 새겼더라.

“2015년 라거펠트가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서울에 왔을 때 기획사에서 의뢰했다. 방한 기념이니 영어 말고 한글로 만들어달라고 해서 세로로 긴 타원형에 ‘칼 라거펠트’라고 새겼다.”

-한화 김승연 회장의 인장은 꼭 조선시대 어보 같다.

“한화생명에서 연말 시상식 때 임직원 보답용으로 메시지를 적고 회장님 도장을 찍는다고 ‘최대한 고급스럽게’ 해달라고 했다. 크기가 10㎝나 되고, 모양은 일곱 가지 동물을 형상화한 어보 모양으로 해달라고 주문해서 값을 상당히 받았다.(웃음)”

대한민국 명장 '인장공예 1호'인 최병훈 여원전인방 대표. 작업실에는 그간 모은 인장 관련 자료와 도구, 재료, 그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도전 끝에 스스로 쟁취한 명장

전북 장수 출신인 최 대표는 “가난 때문에 먹고살려고 시작한 일이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열네 살에 단돈 600원 들고 서울로 와 종로 서예 학원에 사환으로 들어갔다. “배는 고픈데 공부는 하고 싶어서” 월급 1500원 받고 심부름하며 어깨너머로 글씨 공부를 했다. 밤마다 붓글씨 연습을 한 끝에 중앙여중·고 필경사(筆耕士)로 취직할 수 있었다. 각종 문서나 시험지 등사판 글씨를 쓰는 게 그가 맡은 일이었다. 그는 “너무 어리니까 교장 선생님이 따로 불러서 꼭 양복 입고 다니고 학생들하고 문제가 없어야 한다고 약속을 받았다”며 “5년 동안 시험문제 베껴 쓰면서 중·고등학교 과정을 곁다리로 공부했다”고 했다.

-또래 학생들 틈에서 일하느라 힘드셨겠다.

“취직한 게 어딘데. 지금 같은 세상이 아니었다. 군 제대하고 다시 금곡고등학교 필경사로 들어갔는데, 윤전기와 복사기가 등장하면서 직업이 없어졌다. 인쇄소로 옮겨 도장 파는 일을 시작했다. 글씨는 종일 베껴 쓰면 손이 아픈데, 도장은 팔 때마다 글자가 달라지니 재미있더라. 기술을 빨리 배우고 싶어서 잘된다는 업소 100여 곳을 찾아다녔는데, 커피만 타주고 안 보여줬다. 인장업은 보조가 필요하지 않고 서로 경쟁하는 일이라 도제가 없다. 그러다 인장협회에서 마련한 야간 강연을 들으며 칼 쓰는 법을 정식으로 배웠다.”

-도장 가게를 내셨나.

“내가 못 배운 한이 있어서 없는 살림에 큰애를 사립초등학교에 보냈다. 학교에서 가정 환경 조사서를 써오라는데, 아내가 아버지 직업을 인장업 대신 인쇄업으로 쓰자고 했다. ‘애 기죽이면 안 된다’면서. 자존심이 상해 대판 싸웠다. 아이들이 결혼할 때 부끄러운 아버지가 안 되려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최병훈 명장의 작업실. 그는 "인장문화의 발전을 보여주는 이 자료들을 모두 기증하고 싶다"고 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어떤 도전인가.

“1980년대 들어 미술대전에 전각 부문이 생겼다. 사람들이 인장은 기술인데, 전각은 예술이라더라. 낮에는 인장으로 돈 벌고, 밤에는 전각에 몰두했다. 1983년 대한미술전람회를 시작으로 일본 동화미술대전 최우수상, 현대미술대상전 금상을 받았고,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문화재청장상도 받았다. 아이들과 상 타기 경쟁을 하니 신이 났다. 그러다 우연히 신지식인 모집 광고를 봤다. 구청 직원이 처음엔 ‘도장 파는 사람은 안 된다’더니 한 달 지나 나를 찾아왔다. ‘전각의 달인’으로 신지식인에 선정됐다.”

그가 2001년 ‘인장 공예 1호’로 대한민국 명장이 된 것도 집요한 도전의 결과다. 1986년부터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선정하는 명장은 산업 현장에서 숙련된 기술을 보유한 기술자를 뽑아 예우하는 제도. 그는 “공단에 신청하러 갔더니 ‘인장은 산업 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홀대하더라. 10년 싸운 끝에 애초 97종목에서 2000년 167직종 전체로 확대됐다. 미용사는 물론 세탁 분야까지 명장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했다.

-자료를 기증할 곳을 찾고 있다고 들었다.

“눈으로 일하는 직업인데 일흔이 넘으니 점점 힘이 든다. 칼끝에 온 신경을 집중해 깎는데 0.01㎜만 틀어져도 글자가 돌아가 버린다. 우리나라 인장 문화를 보여줄 시대별 자료와 작업 과정을 모두 보관하고 있다. 뜻이 통하는 곳이 있다면 전부 기증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