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자신의 건강뿐만 아니라 동물을 해치면서까지 건강하지 않은 음식을 먹을까?”
10년 전 영국 에든버러 대학에서 의료생물학을 공부하던 안백린(29)은 의문을 가졌다. 석사과정으로 ‘영성과 건강’ 분야를 공부하며 고민을 이어간 끝에 내린 답은 간단했다. 몸에 안 좋아도 맛있으니까! 그렇다면 비건(vegan: 엄격한 채식)은 감히 맛있을 수 없는 음식일까.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매혹되는 비건 음식을 찾아야 했던 그는 식물성 요리 전문학교로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으로 치면 그간 밟은 의학전문대학원 코스를 포기하고 완전히 새로운 길을 밟겠다고 자처한 셈. 안백린은 미국에서 로푸드 요리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미슐랭 식당에서 채식 요리를 배웠다. 한국에 돌아와선 서울 이태원 해방촌에 사찰음식점 ‘소식’을 열었다가 코로나 여파로 문을 닫았고, 다시 2020년 6월 서울 서초동에 ‘천년식향’을 열었다.
변혜정(58)에게 딸의 진로 변경은 난데없는 소식이었지만, 그 선택을 존중했다. ‘천년식향’에 아예 소믈리에로 합류했다. 그는 <섹슈얼리티 강의> <누구나 다 아는 비밀은 비밀이 아니다> 등의 책을 펴내고, 서강대 성평등상담실 상담교수,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원장으로 일한 여성학자다. 그가 딸과 동업하겠다고 했을 때 주위에선 극구 말렸다. 엄마와 딸 사이라도 세대 간 간극을 절대 좁힐 수 없다고 했다.
‘천년식향’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탈색해 백금발이 된 모녀의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변혜정은 “공직에 있을 땐 절대로 할 수 없던 걸 꼭 해보고 싶었는데 그중 하나가 요란한 색깔의 머리다. 딸이 직접 해줬다”며 웃었다.
비건? 무엇보다, 맛있으니까!
천년식향의 대표 메뉴는 둘이다. 식물성 고기와 채소를 다진 양념들을 넣어 떡갈비 모양으로 빚고, 식물성 버터와 마라 소스, 눅진하게 끓인 채수와 함께 내는 ‘플레저 앤 데인저(Pleasure and Danger)’, 불맛 나게 구운 당근과 퓌레, 갈릭 사워도우가 곁들여 나오는 ‘베러 댄 섹스(Better than Sex)’다. 여기에 변혜정이 직접 들여온 발효향 쿰쿰한 내추럴 와인이 곁들여진다.
지난 15일 뉴욕타임스(NYT)가 꼽은 ‘서울 여행 시 추천하는 식당’에 천년식향이 올랐다. NYT는 “한식 하면 흔히 구운 고기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 틈을 비집고 나온 채식 식당”이라며 “대표 메뉴인 ‘베러 댄 섹스’는 대담한 이름에 걸맞은 맛”이라고 평했다.
-NYT도 인정한 식당이 됐다. 비건 셰프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안백린(이하 안): “다양한 재료로 감칠맛을 내려 한다. 자연이 입안에서 머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어서다. 우선 블랙 솔트, 효모 소금, 흑마늘 소금, 사해 소금 등으로 맛과 풍미를 낸다. 사해 소금은 삶은 달걀과 같은 향이 난다. 수박으로 만든 요리 ‘세비체(ceviche)’를 낼 때는 로즈마리 등 다섯 가지 허브의 잎사귀가 20g 정도 들어간다. 비건 버터나, 치즈, 발효 소스, 생면 같은 경우도 수제 순식물성으로 만든다. 접시에 낼 때도 생명력을 구현하고 싶어, 농장에서 직송된 식용 꽃과 각종 허브로 장식한다.”
-손이 많이 가겠다.
안: “리코타 치즈를 만들려면 아몬드를 불려 껍질을 까고, 오랜 시간 갈아서 아몬드 우유를 만든다. 그다음 우유를 저온에서 끓여낸 다음 구연산을 넣어 하루 정도 굳혀야 한다. 피자에 올라가는 모차렐라 치즈는 칡 전분을 저온에서 저어서 도우(dough) 형태로 만든다. 콩고기에서 콩의 맛을 빼내기 위해 불리고 찌는 과정을 다섯 번 이상 반복한다. 버섯이나 연시 등 식재료의 식감을 쫄깃하게 만들기 위해서 5시간 동안 저온 조리한다. 시간이 절대 필요한 일이다.”
-뉴욕타임스가 천년식향을 꼽을 만큼 인정받은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변혜정(이하 변): “맛있으니까! 우리 셰프가 요리 하나하나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웃음). 뉴욕타임스에 실리기 전에도 외국인 손님들도 자주 왔다.”
-손님은 주로 어떤 사람들인가?
변: “손님의 90%가 채식인이 아니다. 오고 나서야 비건 메뉴를 파는 걸 알더라. 음식을 다 먹고 나갈 때까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웃음). 막연히 와인바로 알고 온 인근 직장인들, 중년 남성들, 인테리어가 근사하다며 소중한 사람과 식사하기 위해 찾는 분 등 다양하다.”
-요리 이름이 왜 ‘베러 댄 섹스’인가?
변: “개업 초반 외국인 남자 손님이 한 분 온 적이 있는데 베이컨 맛으로 훈연한 당근 요리를 먹고는 어떤 고기인지 맞히려고 하다가, 채소임을 알고 ‘베러 댄 섹스!’라고 외치더라. 그 모습이 너무 인상 깊어 요리 이름에 그대로 반영했다.”
-비건 음식인 줄 모르는 손님이 많다는 뜻일까?
안: “뒤늦게 비건 음식인 걸 알고 선입견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예약 없이 ‘내추럴 와인바’라는 간판만 보고 오신 손님들 중엔 비건이란 말을 듣자마자 바로 그 자리에서 나가는 경우도 있다(웃음).”
딸은 셰프, 엄마는 소믈리에
-모녀가 동업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변 : “여성학자로서, 공무원으로서 나 자신을 돌아볼 새도 없이 일했다. 그러나 여성인권진흥원장으로 재직하던 2019년 초 내부 성희롱 사건을 처리하던 중 감사를 받고 해임됐다. 3년 만인 지난 5월 법원에서 ‘부당해임’이란 판결을 받았지만, 나에겐 ‘사회적 죽음’과 같은 것이었다. 마침 그 시기에 우리 딸이 ‘천년식향’을 열기 위해 뛰고 있었다. 와인을 좋아하는 내가 보탬이 되지 않을까 싶더라. 음식에 내추럴 와인을 같이 내도 좋을 것 같았다. 첨가물을 넣지 않고 과실의 맛을 고스란히 담는 내추럴 와인이 천년식향의 정체성과 부합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여성학자가 어떻게 소믈리에 자격증을 따게 된 건가?
변: “나는 술을 좋아하고 권하는 사람인데, 이상하게도 여성학계 동료들은 술을 안 좋아하더라. 좋은 의미로 다들 금욕적이랄까. 열렬한 환경보호자는 물론, 아예 소비 자체를 지양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니면 부어라 마셔라 폭음하는 한국식 술 문화에 질려서일지도 모르고(웃음). 혼자 눈치 보면서 와인을 홀짝홀짝 마시다가 맛있는 와인을 사람들에게 널리 소개하고 싶어 직접 수입사(엠버앤처빌)를 차리고 소믈리에 자격증도 땄다. 지금은 천년식향에서 눈치 보지 않고 와인을 마실 수 있어서 좋다(웃음).”
안 : “우리 식당 음식이 채식인데도 달고 짠 맛이 강하다는 분들이 간혹 있는데, 엄마가 추천해준 내추럴 와인을 곁들이면 마리아주(음식과 술의 궁합)가 좋다고 평가받는다.”
-모녀가 같이 일하면 싸우게 되지 않을까.
변: “많이 싸웠지. 식당을 오픈하기 전부터 싸웠다. 안 셰프가 도색, 리폼, 가구 제작 등 각종 작업을 전부 혼자 도맡아 하길래 잔소리했다. 외부에 맡기면 한 달이면 끝날 일을 왜 사서 고생하느냐고. 메뉴, 가격 책정 등 사소한 문제들까지 다 충돌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라떼(꼰대)’였다(웃음).”
안 : “내부 디자인은 최대한 숲과 자연의 느낌을 담을 수 있도록 직접 하고 싶었다. 엄마한테 속이 터지는 건 디지털 문맹이라는 점? 같이 식당을 운영하며 느낀 걸 구글 공유 문서함에 적고 있는데, 간단한 작업인데도 엄마가 매번 애를 먹는다. IT 세대 차가 느껴지더라.”
비장하지 않은, 유쾌한 채식
-두 사람이 ‘천년식향’을 통해 실현하려는 가치는 뭔가.
변: “채식은 기후위기에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기후위기의 위험성만 강조하고, 환경운동에 동참하라고 압박하면 역효과가 난다. 공부하기 싫은데 윽박지르면 더 하기 싫어지는 것처럼(웃음). 채식이 즐거운 경험이 됐으면 좋겠다. 비장한 채식이 아니라 일상에서 유쾌하게 실천할 수 있는 채식이 우리의 목표다.”
-젠더 갈등이 심각하다.
“30년을 여성학계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지금 이어지는 (이대남들의) 역차별 논란 등을 보면서 반성하게 되는 면도 있다. 과거의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관을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해야 한다고 열렬히 강의하고 다녔다. 결과적으로 이런 게 부작용을 가져온 것 아닐까. 천년식향의 경험을 갖고 다시 30대 때 강단으로 돌아간다면 강의 내용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더 재밌게!(웃음)”
안: “처음에 비건 요리에 관심을 두게 된 건 지독한 ‘육식주의자’인 오빠에게 비건으로도 맛있는 음식을 선보이고 싶어서였다. 채식하지 않는 분들이 천년식향에 더 들렀으면 좋겠다. 고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한 끼라도 맛있는 채식을 경험한다면 고기를 덜 먹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