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전주MBC의 사원 모집 영상이 화제가 됐다. ‘어차피 날리면! 비행기 당장 못 탐. 여권 X. 듣기 평가 X. 채용자에게 고급 슬리퍼 제공.’ 눈치 빠른 분들이라면 이 영상이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영상을 만든 이들은 자신들의 센스에 감탄했을지 모르겠지만, 여론은 좋지 않았다. ‘공영방송이 특정 정당의 나팔수 노릇 하는데, 민영화해야 한다’ ‘저래놓고 본인들은 편향적이지 않단다’ ‘이 정도면 이성을 잃었네’…. 실패한 걸 깨닫자 전주MBC는 그 영상을 내렸지만, 그렇다고 MBC가 현 정권과 싸우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슬리퍼를 신고 대통령에게 고성을 지른 기자에게 타의 모범이 됐다며 우수상을 주고, 특정 회사의 정치 애플리케이션 이용자를 대상으로 한 찬반 조사 결과를 이용해 ‘현 정부의 화물연대 업무 개시 명령에 반대 의견이 더 높았다’며 여론을 조성하기도 했다. 탐사 기획 프로그램을 자처하는 ‘스트레이트’는 민주당 이재명 대표나 신현영 의원에 대해 다루는 대신, 연일 윤석열 정부와 대통령 부인을 비하한다.
MBC의 외로운 싸움에 자극받은 것일까. YTN도 반정부 투쟁에 동참한 모양새다. 그 전이라고 윤 정부에 호의적인 건 아니었지만, 왜곡과 선동의 깊이가 MBC 수준에는 한참 미달했다. 그랬던 YTN이 이제 MBC와 한 팀이 되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십자가를 진 건 간판 프로그램인 ‘돌발 영상’이었다. 2003년 처음 방영한 ‘돌발 영상’은 종전 뉴스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정치인의 이면, 특히 뻔뻔스러운 모습이나 실수 장면을 방영해 인기를 끌었다. 예컨대 올해 8월 12일 방영분에서는 수해 복구에 나선 국민의힘 의원들이 “솔직히 비 좀 왔으면 좋겠다. 사진 잘 나오게”라고 말하거나 여성의 외모를 품평하는 식의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장면을 내보냈다. ‘돌발 영상’ 취지에 딱 맞는 내용이다.
그런데 지난 19일 방영한 돌발 영상은 여기가 MBC인지 YTN인지 헷갈릴 정도로 악의적이었다. 12월 15일,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 패널 100명과 함께 국정 과제 점검 회의(이하 점검 회의)를 주재했다. 과거 정부의 ‘국민과의 대화’처럼, 국민과 한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지 짚어보자는 취지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방송에는 리허설이 있었다. 생중계하는 방송사가 조명과 음량, 구도 등을 미리 점검하도록 하는 게 리허설의 이유. 그런데 YTN은 송출해서는 안될 리허설 영상을 편집한 뒤, 이를 생방송과 대조시켜 ‘돌발영상’으로 내보낸다. 대통령 대역이 리허설 때 한 답변과 생방송에서 대통령이 한 답변 하나가 비슷하고, 리허설 때 질문한 국민 패널이 본방에서도 질문했다며 ‘점검 회의’ 자체가 사전 각본에 따라 이루어진 ‘쇼’였다고 지적한 것이다. 심지어 국민 패널 두 명이 화물연대 파업에 반대하는 등 정부 정책을 지지했다며 이 방송을 ‘일부 국민과의 대화’라고 폄하했다.
늘 그렇듯이 민주당이 나섰다. “리허설과 본방송이 일치하는 것을 보니 속았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천박한 쇼다.” 좌파 매체도 공격 대열에 동참했다. 이 과정에서 한겨레와 오마이뉴스는 한동훈 장관이 본방에서 한 “국민들로부터 직접 질문을 받으니 참 많이 떨린다”는 발언을 리허설 때도 했다고 기사를 썼다가, 한 장관의 항의를 받고 삭제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든다. 한 장관이 ‘떨린다’는 말을 리허설 때 한 게 사실이라 한들, 그게 그렇게 욕먹을 일일까? YTN 역시 빛의 속도로 영상을 내렸다. 리허설은 테스트용으로 송출한 것이라, 실제 방송에 사용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거품 물고 리허설을 욕하는 민주당이지만, 그들이 집권하던 시절에도 리허설은 있었다. 2017년 8월 20일 생방송으로 진행한 ‘대국민 보고 대회’의 한 장면을 보자.
고민정 대변인: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니까 가족 생각이 나고, (대통령) 옆자리가 허전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배성재 아나운서: 지금 객석에 김정숙 여사님이 몰래 와 계신데, 앞으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그 뒤 박수와 함께 김정숙 여사가 등장한다. 사회자는 김 여사가 수해 현장에서 봉사하는 사진을 띄운 뒤 “그날 힘들지 않았냐”고 질문한다. 김 여사는 청산유수로 답변한다. 이건 즉석에서 이루어진 것일까. 당시 리허설에선 다음과 같은 장면이 연출됐다.
고민정: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누구에게 들으면 좋을지 모르겠네요.
배성재: 김정숙 여사님이 몰래 와 계십니다. 앞으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김 여사와는 체형이 정반대인, 대역을 맡은 여성이 등장한다. 그렇다. 김 여사의 깜짝 등장과 답변은 사전에 기획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보고 대회’가 국민을 속인 ‘천박한 쇼’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생방송에서 실수가 나오지 않으려면 리허설은 꼭 필요한 법이니까. 당시는 ‘돌발 영상’을 쉴 때긴 하지만, YTN은 이 리허설을 구실로 ‘보고 대회’를 쇼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그런 YTN이 지금 이러는 이유는 뭘까. 문재인 정권 당시 지나치게 정부를 편든 게 부끄러워, 이제라도 언론의 본분을 다하겠다고? 그럴 리가. 이재명 대표의 민심 투어를 다룬, 12월 17일 ‘돌발 영상’에 그 답이 있다. “막상 현장에 가보니 민심 못지않게 팬심의 목소리도 컸습니다”라는 앵커의 코멘트를 시작으로 낯 뜨거운 자막이 이어졌다. “포옹도 OK! 흔쾌히 시민과 스킨십도” “엄청난 인파” “이번엔 더 본격적으로 민심 청취하는데”….
YTN이 윤 정권만 악의적으로 공격하는 건 언론의 본분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이재명 대표는 무서운 반면 윤 대통령은 만만하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이 발생했을 때 대통령실이 한 조치는 “악의적 편집”이라며 “스스로 언론인의 윤리에 부합하는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주기 바란다”고 말한 게 전부. 반면 경기도지사에 당선됐을 때 이 대표는 인터뷰를 요청한 언론사를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이거 하고 더 이상 하지 마. 엉뚱한 질문을 자꾸 해서 안 돼. 약속을 어기기 때문에 다 취소해. 여기까지만 하고, 이것도 인터뷰하다 딴 얘기 하면 그냥 끊어버릴 거야. 예의가 없어. 다 커트야.” 무서운 건 인정하지만, 한마디만 하자. 좋게 대한다고 짖고, 무섭게 한다고 꼬리를 내리면, 그건 언론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