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남부 끄라비주에 있는 코란타섬 서쪽 해변. 에메랄드빛 바다와 푸른빛 하늘이 맞닿은 선이 조금씩 주황빛으로 물든다.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30분. 해가 질 시간이다.
수평선 가운데 점처럼 박혀 있는 작은 섬으로 태양이 천천히 내려온다. 한낮 동안 이 섬을 밝히느라 힘들었던 태양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 섬의 원래 이름은 다섯 개의 섬이라는 뜻인 ‘코 하(Koh Ha)’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태양이 지는 섬이라고 해 ‘선셋 아일랜드’라고 부른다.
900m에 달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해변. 바다와 하늘과 섬이 황금빛으로 물들자, 마음껏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올해의 마지막, 이 순간을 기억하리라.’ 이 정도면 됐다 싶어 발길을 돌리려고 하자 차린팁 티야폰(41) 피말라이 리조트 앤 스파 대표가 팔을 잡는다. “아니, 지금부터 시작이야.”
그의 말에 모래사장 위에 놓인 빈백 의자에 파묻히듯 앉았다. 해변의 모래는 베이비 파우더처럼 부드럽다.
하늘의 색은 시간이 조금 지나니 황금빛에서 분홍빛으로, 이어 청록빛, 붉은빛, 보랏빛이 켜켜이 층을 이루며 빛났다. 우주를 유영하는 것 같기도 하고, 북극에서 오로라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불 켜진 고기잡이 배들만이 이곳이 현실 세계임을 알려줬다. 이윽고 모든 색이 합쳐져 검정이 되며, 바다와 하늘에 어둠이 내렸다. 주위엔 파도 소리와 매미 소리만 들렸다.
이곳에 오는 길은 쉽지 않았다.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 비행기로 1시간 반, 다시 차로 1시간을 달린 뒤, 배로 또 1시간, 총 세 가지 수단으로 5시간 가까이 이동해 도착했다. 그러나 주변 일대 134㎢가 1990년 ‘무코란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태초의 자연, 아프리카 같은 원시의 태국을 간직한 곳이다. 묵은해를 떠나보내고, 새해를 맞이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해가 지는 섬, 코 하
한국인 관광객에게 끄라비는 낯선 도시다. 그러나 그 역사는 기원전 3만5000년까지 올라간다. 이곳엔 기원전 2만5000~3만5000년 호모 사피엔스의 고향이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 도시 곳곳에 석기, 고대 채색화 흔적들이 절벽과 동굴에 남아 있다. 태국에서 가장 오래된 정착지 중 하나다. 도시 이름인 끄라비의 뜻은 ‘칼’. 도시가 세워지기 전 고대의 칼이 발굴된 전설에서 유래한다. 역사 속 첫 기록은 1200년대 들어선 나콘시탐마랏 왕국이다. 원숭이를 상징으로 삼았던 나라답게, 숙소 주변에서도 원숭이를 쉽게 볼 수 있었다.
끄라비주는 태국 남부의 안다만해 해안에 있는 154개 섬을 모두 포함하는 곳이다. 솟아오른 산맥 옆 반짝이는 모래 해변, 투명한 안다만해와 그 안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바다, 이 모든 것을 갖고 있다. 끄라비 첫날, 티야폰 대표가 안내한 첫 장소는 이 안다만해 바닷속이었다.
바닷속을 즐기려면 대양(大洋)으로 나가야 한다. 배를 타고 50분을 달렸다. ‘너무 멀어!’라고 불평하기엔 가는 길이 절경이다. 터키석을 뿌려놓은 듯한 바다 위로 기암절벽이 펼쳐진다. 마치 ‘다도해’ 같기도 하다. 그 절벽 위로 나무들이 뿌리를 내놓고 살고 있다. 영화 ‘아바타’의 판도라 행성 같은 착각도 든다. 그러다 배는 한 섬 뒤편에 멈춘다. 어제 석양이 질 때 본 ‘코 하’ 섬이다. 해변에서 볼 땐 가까웠는데. 역시 아름다운 것은 보기보다 멀리 있다.
말발굽 같은 산 둘레 안에 해변을 숨겨 놓은 곳. 한 커플이 그 해변에 한가로이 누워 햇볕을 쬐고 있다. 흰색 전신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티야폰 대표는 바닷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여덟 살 때부터 다이빙을 즐겼다는 그에게 바다란 집 앞 놀이터였다.
다이빙은 처음인 내게 그는 조교 한 사람을 붙여 줬다. 이 조교는 흔히 보던 태국 사람보다 조금 더 피부가 까무잡잡했다. 그는 현지에서 ‘차오 레이’로 불리는 바다 집시다. 수백 년 동안 이 지역을 점령했던 사람들로 원래 배 위에서 살다, 지금은 해안을 따라 지은 수상 가옥에 정착했다. 맨몸으로 바다를 헤엄쳐 해산물을 채취해 생활한다. 끄라비의 해남(海男), 해녀(海女) 들인 것이다. 그와 함께 바닷속을 유영했다. 그 순간 ‘물의 길’이 펼쳐졌다. 영화 ‘니모를 찾아서’에서 니모 역을 맡고 있는 흰동가리가 떼를 지어 이동했다. 색색의 산호초 위로 투명한 말미잘이 요리조리 헤엄쳤다. 그 순간 그가 외쳤다.
“샤크 샤크!”
살짝 긴장해 돌아보니, 조그만 미니 상어가 눈앞을 지나간다. 색색의 불가사리는 하늘의 별처럼 바다에 박혀 있다. 크고 작은 물고기 떼에 넋을 잃고 있다 보니 벌써 1시간이 흘렀다. 사뭇 아쉬워하자 티야폰 대표가 권한다. “이번 기회에 다이버 자격증 한 번 따보는 건 어때? 지구의 70%가 바다라는데, 나머지 30%만 즐기고 죽는 건 너무 아깝잖아.”
◇살아있는 화석, 맹그로브 숲
이젠 강을 즐길 차례다. 도착한 곳은 ‘텅예펭 마을’의 부두. 코란타섬의 주요 부족마을 중 하나다. 이들은 여기서 100년 넘게 마을을 이뤄 살고 있다.
마을 안에는 이슬람 사원과 검은색 히잡을 쓴 여인들이 보인다. 태국인의 95%가 불교지만, 이곳은 이슬람 문화권이다. 예펭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터를 잡고 살던 선조의 이름. 이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숲과 바다로부터 식량을 얻으며 살고 있다.
이들의 주요 삶의 터전이 랏보내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맹그로브 숲’이다. 맹그로브란 열대나 아열대의 큰 강변, 하구, 바닷가 진흙 바닥에 자생하는 나무다. 평균 높이가 5m에 달한다. 중생대 백악기 말부터 생존해 살아있는 화석으로도 불린다. 나무뿌리가 물 밖으로 튀어나와 호흡하는데, 마치 나무들이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다. 맹그로브 숲 투어는 모터가 아닌 손으로 노를 젓는 카약이나 보트로만 가능하다. 모터 소리에 숲속 생명체들이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배를 타고 강을 따라 큰 바다로 향하는 길. 갑자기 조잘거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 보니 맹그로브 나무 아래 원숭이 가족들이 우릴 바라보고 있다. 노를 젓던 부족인은 “걱정 마”라며 “여긴 원숭이만 많고 악어는 없다”고 했다. 그가 간식으로 태국 차와 바나나잎에 싸 쪄낸 밥을 꺼낸다. ‘이 밥을 건네면, 원숭이가 보트로 뛰어올까?’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강물을 따라 머릿속 근심도 함께 흘려보냈다.
점심을 먹기 위해 도착한 곳은 올드타운에 있는 식당 ‘샤인 타레이’다. 어제 다이빙을 도와준 해남, 해녀들이 잡은 해산물을 즉석에서 요리해 파는 곳이다. 회색의 큰 고무 대야에 담긴 랍스터와 오징어, 새우, 조개를 골라 무게를 측정해 시가로 판매한다. 즉석에서 살아있는 랍스터를 꺼내 무게를 단 후 쪄내는 모습을 보니 제주도 ‘해녀식당’에 온 것 같다.
태국 남부와 북부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이 음식이다. 보통 태국 남부 음식이 북부보다 맵고 향신료 맛이 강하다. 북부는 농업 기반, 남부는 어업 기반으로 해산물을 이용한 요리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태국 남부 요리에 가장 많이 이용되는 건 ‘베텔잎’이다. 그냥 봐서는 평범한 나뭇잎인데, 이걸 끄라비 사람들은 커리에도 넣어 먹고, 견과류와 채소를 싸 에피타이저로도 먹고, 고기와 함께 볶아 먹기도 한다. 그 향과 맛이 특이하지만, 한 번 먹고 나면 중독된 듯 찾게 된다.
저녁 식사를 위해 방문한 식당은 해변에 위치한 ‘스파이스 앤 라이스’였다. “매운 거 잘 먹어?”라는 티야폰 말에 “당연하지”라며 맵부심을 부렸다. 나온 요리는 다진 고기를 매운 향신료에 볶아낸 것, 조금도 빨갛지 않은 색상에 크게 한 스푼 떴다가 톡 쏘는 매운 맛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티야폰이 말한다. “원래 태국 고추가 작고 매운 걸로 유명해”.
그다음은 디저트. 당연한 듯 망고와 라이스를 시키자, 티야폰 대표가 타로 디저트를 권한다. 따뜻한 코코넛 밀크에 쫀득한 타로 만두가 들어 있는 디저트다. 이상할 것 같아 거절하자, 자길 한 번 믿고 먹어보란다. 달콤하고 쫀득하고 부드러운 식감. 이상하게 숟가락이 멈추질 않았다.
◇전통을 간직한 섬
먹었으니 이젠 칼로리를 소비할 시간. 끄라비 곳곳에는 무에타이 체육관이 있다. 800년 넘은 태국의 격투 기술로 유럽인들은 이곳에서 한 달씩 머물며 무에타이를 배워간다고 했다. 무술이라고는 어릴 때 태권도를 배운 게 다지만, 호기롭게 체육관 문을 두드렸다.
체육관에서 건넨 금색 실로 수가 놓인 트렁크 바지와 민소매 티를 입고, 흰 붕대로 손과 손목을 감싸니 벌써부터 무에타이 선수가 된 것 같다. 기본적으로 무에타이는 주먹, 팔꿈치, 무릎 등 신체의 단단한 부위를 사용해 상대방을 때려 눕히는 격투 방식이다. 몸을 리듬감 있게 움직이며 상대를 빠르게 공격하는 것이 중요하다. 1시간 정도 기본 동작만 했을 뿐인데, 온몸에 땀이 잔뜩 흘렀다.
이 모든 걸 끄라비에서 즐기려면 매년 10월에서 5월 사이에 가는 것이 좋다. 이 기간을 제외하고는 바다를 닫아 다이빙을 즐길 수 없다. 산호초와 바다 생물들이 사람 없이 쉴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함이다. 같은 기간 무코란타 국립해양공원도 휴식기를 갖는다. 그동안 인근 리조트 직원들은 자원봉사 개념으로 해변과 바닷속을 청소하는데, 이렇게 걷힌 쓰레기가 2000~3000t에 달한다.
티야폰 대표가 이곳에 처음 온 건 30년 전이다. 당시만 해도 길도 없고, 전기도 없고, 차도 없이 바다 집시들만 살던 섬이었다. 이곳을 그의 아버지는 별장을 지으려고 샀다가, 1999년 끄라비에 공항이 생기면서 리조트로 계획을 바꿨다. 태국어로 ‘낙원’이란 뜻의 피말라이 리조트다. 인근 리조트들도 대부분 10년 전후로 생긴 곳. 이들의 꿈은 끄라비를 발견 당시처럼 아름다운 열대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간직하는 것이다. 티야폰 대표는 “리조트에서 나온 물은 정수돼 식물을 키우는 데 사용되고, 배출한 쓰레기의 80%는 재활용되고 있다”며 “앞으로는 재활용 비율을 더 높이고 내부적인 처리를 통해 단 1%의 쓰레기도 외부로 반출되지 않도록 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끄라비(태국)=이혜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