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풀타임’의 한 장면. 홀로 두 아이를 기르는 쥘리가 파리 근교에서 시내로 출근하기 위해 기차역으로 달리고 있다. /슈아픽쳐스

파리 근교에 사는 두 아이의 싱글맘 쥘리 루아(로르 칼라미). 해 뜨기 전에 일어나 아이들을 씻기고 먹이고 이웃집 뤼지니 아주머니에게 아이를 맡긴 후 기차역으로 뛰어간다. 파리 시내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더 힘들다. 철도 파업이 벌써 5일째 계속되고 있다. 대체 노선과 버스, 카풀을 이용해서 가까스로 출근 시간을 맞추고 평소보다 훨씬 늦게 집에 돌아온다. 오늘은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뤼지니 아주머니는 시큰둥하다. “오늘도 기차 없을 텐데. 기차 없인 소용없죠.”

쥘리는 5성 호텔의 수석 룸메이드. 잠시 한숨 돌리는 식사 자리에서 동료들과 파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정부에서 파업 때문에 재택근무 권장하더라.” 부자들이 더럽힌 방을 치우며 몸으로 일해야 하는 룸메이드들은 콧방귀를 뀐다. “컴퓨터로 변기 닦을 수 있대?” 쥘리는 더 나은 일자리가 필요하다. 무단 조퇴를 저질러가며 면접을 보러 간다. 2021년 제78회 베네치아 국제영화제 오리종티 최우수 감독상, 오리종티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휩쓸며 극찬을 받은 영화 <풀타임>의 내용이다.

매분 매초 시간에 쫓기는 삶. 이런 일상은 쥘리만 겪는 것이 아니다. 모든 현대인, 특히 아이를 기르며 직장 생활을 하는 여성들이라면 모두 경험하는 일이다. 시간 빈곤, 혹은 ‘타임 푸어’라 불리는 현상이다. <워싱턴포스트>의 기자이며 두 아이의 엄마인 브리짓 슐트의 책 <타임 푸어>는 워킹맘의 삶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엄마들은 늘 머릿속이 복잡하다. 카풀을 예약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아이들의 숙제 마감이 걱정되고, 오늘 저녁에 어떤 음식을 만들어야 하나 고민된다. 그러는 한편으로 가족들의 기분을 살피고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엄마들의 머릿속은 24시간 물류 관리를 하는 것처럼 쉴 새 없이 앵앵거리며 돌아간다.”

시간 빈곤은 본격적으로 논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개념이다. 아직 명확한 정의가 내려져 있지 않다. 여가 시간의 절대적 부족을 기준으로 삼을 수도 있고, 주어진 시간을 얼마나 본인의 재량껏 쓸 수 있느냐에 따르는 연구도 존재한다. 어떤 기준으로 보건 모든 현대인은 어느 정도 타임 푸어, 시간 빈곤층이다. 매일 아침 시간 맞춰 출근하고, 하루 종일 눈치 보며 일하다가, 윗사람이 퇴근한 후에야 비로소 귀갓길에 오른다. 집에서도 살림과 육아에 치이며 약간의 짬이 나도 마음 편히 쉴 수 없다. 뒤처지지 않으려면 자기 개발에 힘써야 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끝나지 않는 고단한 일상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쫓기는 이들이 누굴까? 워킹맘이다. 일하는 엄마들의 바쁨과 시간 빈곤은 남성들의 그것보다 강도가 높다. 한국노동연구원에서 2018년 발행한 논문 “시간 빈곤(Time-Poor)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그렇다. “다른 조건이 통제된 상태에서 기혼 유배우 변수는 여성의 시간 빈곤 가능성을 유의하게 증가시키나, 남성에 대해서는 유의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현상은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타임 푸어>의 한 대목을 읽어 보자. “영국인을 대상으로 한 어떤 연구에 따르면 남자들은 장보기, 요리 등 자신이 좋아하는 집안일만 골라서 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여자들은 끊임없이 일하고, 좋아하는 일이든 아니든 간에 끝까지 해야 한다.” 남편에게 살림은 취미 생활이지만 아내에게는 직업이다. 워킹맘에게는 퇴근이 없다.

타임 푸어의 해법은 무엇일까? 개인적 차원의 답은 단 하나뿐. 꼭 필요한 것, 정말 해야 할 것만 하고, 나머지는 놓아버리는 것이다. 모든 것을 챙기느라 10분씩 여섯 번 왔다 갔다 하지 말고, 단 한 시간이라도 온전히 자신을 위해 써야 한다. 그래야 의미 있는 여가(leisure)를 통해 심신을 회복할 수 있다. 가사 노동에 시달리는 주부뿐 아니라 모든 현대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 조언이다.

하지만 쥘리처럼 저임금 고강도 노동을 하는 이들에게는 아득한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벗어나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고 좋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일, 노동 시간과 강도를 스스로 조절하며 시간의 주도권을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는 직업을 찾는 것이 급선무다. 근본적인 변화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루어낼 수 없다. 사회가 함께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지난 1월 1일 윤석열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노동, 교육, 연금 3대 개혁을 거론했다. 윤석열 정부 노동 개혁의 핵심은 유연안정성과 노동시장의 이중 구조 개선이다. 유연안정성이란 근로자가 일하는 시간에 대한 주도권을 가질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작년 10월 <조선일보>에 보도된, 새벽에 일을 시작해서 오후에 퇴근하는 ‘아침형 근무 제도’를 통해 직원들의 출산율을 끌어올린 일본 이토추상사의 경우를 떠올려볼 수 있다.

이런 제도가 지금도 상대적으로 많은 혜택을 누리는 대기업, 공기업, 공무원 등 정규직 노조에만 해당된다면 의미가 없다. 모든 사람이 신나게 일하는 나라가 되려면 노동시장의 이중 구조를 타파해야 한다. ‘귀족 강성 노조’ 표현으로 인해 과격한 발언으로 치부당한 듯하나, 대통령 신년사에서 제시한 노동 개혁은 올바른 방향이다. 일하는 엄마, 야근하는 아빠, 일하는 청년들이 타임 푸어에서 벗어나려면 기업뿐 아니라 노동 역시 달라져야만 하는 것이다.

<풀타임>으로 돌아와 보자. 쥘리의 노동 시간은 전혀 유연하지 않다. 대타를 구하지 못하면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안정성 또한 희박하다. 관리자가 언제든 마음대로 잘라버릴 수 있는 파리 목숨에 불과하다. 노동시장의 이중 구조 역시 쥘리를 괴롭히고 있다. 철도노조는 기간 산업을 틀어쥐고 며칠이건 몇 주건 파업을 이어갈 기세다. 반면 쥘리는 새벽에 일어나 어떻게든 일터로 와야 한다. 파업할 수 있는 노동자와 파업조차 할 수 없는 노동자의 간극은 너무도 넓고 깊다.

과연 쥘리는 타임 푸어 워킹맘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은 노동 개혁을 통해 출산율을 회복하고 삶의 질을 높이며 일상의 기쁨을 되찾을 수 있을까. 시간에 쫓기며 첫 차를 타고 막차에 몸을 맡기는 타임 푸어 엄마들과 아빠들이 시간 부자가 되어 아이들과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 사회의 숙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