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영웅’은 칼바람에 굴하지 않고 설원을 꿋꿋이 걸어가는 한 청년, 안중근의 발걸음에서 시작된다. 혹독한 눈길을 걸어 무겁고 고단한 발걸음이 마침내 멈춰 선 곳은 러시아의 어느 눈 덮인 자작나무 숲. 11명의 동지와 손가락 붉은 피로 ‘대한독립’이라 썼던 단지(斷指) 동맹의 현장은 백색의 자작나무가 울타리처럼 둘러친 타국의 숲이었다.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에도 ‘그 숲’이 있다. 새해 첫 달, 자신과 비장한 약속을 하며 아직 녹지 않은 눈길을 걸을 수 있는 곳. 차갑고 알싸한 박하향 진동하는 내설악의 옛길들이 그리워 인제로 새해 첫 여행을 떠났다.
◇맨살의 위용... 한겨울 자작나무 숲
“자작나무 숲은 한겨울이 성수기입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요즘 같은 때에도 하루 500~700명 정도 꾸준히 찾고 있고요. 지난 한 해만 22만여 명이 다녀갔습니다.”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 탐방안내소 직원의 말처럼 세밑, 자작나무 숲은 아침부터 탐방객들의 발길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안내소에선 “눈길이 미끄러워 위험하니 아이젠을 반드시 착용하고 입장하기를 바란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단단히 채비하고 온 등산객도 있었지만, 패딩 점퍼에 방한용 부츠나 운동화를 신은 평상복 차림의 탐방객들이 더 많아 보였다. 아이젠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이들은 주차장 부근 편의점에서 부랴부랴 구입(5000원)했다.
탐방안내소에서 자작나무숲까지 ‘원정임도’를 따라가는 ‘자작나무 숲’ 코스는 3.2㎞로 약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되는 길이나 그건 봄부터 가을까지의 얘기다. 눈길 상황을 고려해 좀 더 천천히, 조심히 걷다 보면 소요 시간이 추가된다. 하염없이 이어지는 듯한 오르막 구간이 지겨울 법도 하지만,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눈길 트레킹의 맛을 더한다.
자작나무 숲 코스는 오르막길을 지나면 평지길이 이어지는 ‘짠단(짠맛과 단맛)’ 코스다. 도착점에 가까워지면 그대로 임도로 이어지는 구간과 ‘자작나무 진입 코스’가 나오는데 짤막하게 겨울 산행의 묘미를 맛보려면 자작나무 진입 코스가 낫다. 좁다란 오솔길을 몇 번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눈 덮인 산자락을 빽빽하게 수놓은 하얀 자작나무 숲이 펼쳐진다. 원대봉 능선 6ha 규모에 40여만 그루 자작나무가 맨살에 꼿꼿한 자태로 강추위, 칼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하늘을 찌를 기세로 밀집해 있는 ‘명품 숲’ 구역은 그 자체로 포토존이다. 아침 햇살까지 스며들면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빛을 발한다.
서울에서 온 김한나(27)씨는 “올라오면서 ‘눈길에 왜 사서 고생하나’ 싶었는데 막상 자작나무 숲에 들어서니 ‘역시 겨울엔 자작나무 숲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겨울에 음침한 느낌이 드는 숲과 달리 밝고 맑은 에너지가 느껴진다”고 했다. 숲 체험 시설로 꾸민 움막 모양의 인디언 집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남기고 탐방로를 따라 걷다 보면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밭도 나온다. 자작나무 숲 입산 가능 시간은 휴무일인 월·화요일을 제외한 동절기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다.
원대리 자작나무 숲에서 내려오면 따뜻하게 몸 녹였다 갈 만한 식당과 카페가 있다. 카페 자작나무 숲의 투데이는 인제의 유기농 약선차인 황제차·황후차(각 5000원), 쌍화차(7000원) 등과 주인이 직접 개발한 자작나무 모양의 자작나무 쿠키(1개 2000원)가 유명하다. 아기자기한 자작나무 공예품을 감상하며 자작나무 숲 여행에 마침표를 찍기 좋다.
◇산촌서 가마솥밥을 지어먹다
자작나무 숲에서 내려와 식사도 할 겸 산골 감성을 느껴보고 싶다면 차로 20여 분 거리에 있는 하추리산촌마을로 향한다. 설악산 아래 시골스러운 삶을 만끽하는 ‘촌캉스’가 기다리는 곳이다. 금·토·일요일 예약자에 한해 가마솥 밥 짓기 체험(2인 식사 포함 4만원)을 해볼 수 있다. 힘들게 등산도 했으니 남이 해준 밥 편하게 맛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색다른 체험이 가져다줄 추억의 힘은 오래가는 법.
카페 겸 방문자 센터 역할을 하는 카페 하추리에서 간단한 안내를 받은 뒤 건물 뒤편으로 가면 옛날 가마가 나온다. 가마솥 밥 짓기 체험을 담당하는 박병철(64)씨의 안내에 따라 솥을 가마에 얹은 다음 씻은 쌀을 물과 1대1 비율로 넣는다. 성냥불을 켠 다음 불쏘시개에 불을 ‘기술적으로’ 붙여 아궁이에 넣은 다음 장작 13개를 엇갈리듯 천천히 넣으라는 지도에 따르니 금세 장작이 활활 타오른다. 이곳 ‘가마솥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박병철씨는 “성냥 한 개비로 장작불 피우는 데 성공해야 고수”라며 “욕심을 부려 장작을 더 넣거나 힘들다고 장작을 덜 넣거나 하면 밥이 잘되지 않으니 딱 13개만 넣으라”고 조언했다.
화력이 더해지자 솥뚜껑 부위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묘한 성취감에 밥 안 먹도 배부른 듯했다. 장작이 다 타고 나면 뜸 들일 차례. “이때 숯 틈에 포일에 싼 감자를 숨겨 놓으면 밥 다 먹은 후에 찐 감자를 후식으로 맛볼 수 있다”는 게 박씨의 얘기다. 밥 짓는 시간은 보통 30~40분 정도 걸린다. 갓 지은 밥을 퍼내고 솥에 숭늉용 물을 부어 놓고 식당으로 가면 채반에 반찬과 국 등을 담아준다. 채반을 식당으로 가져와 식사하고 반납하면 된다. 새참을 먹는 듯한 시골 밥상 한 끼에 특별식은 없지만, 몸은 물론 마음마저 말랑말랑하게 녹여주기에 충분한 상차림이다. 박씨는 “어르신을 동반한 가족 체험객들이나 중년 부부, 젊은 커플 할 것 없이 다양한 세대가 가마솥 밥 짓기 체험을 하고 간다”며 “의외로 어르신들의 반응이 좋다”고 했다.
◇노천탕에서 음미하는 설경
새해 첫 여행이니 세신도 필수. 하추리산촌마을에서 차로 20분 거리 ‘필례약수터’를 지나면 필례게르마늄온천이 나온다. 구불구불한 길, 침엽수림 너머 고개를 살짝 내미는 설산 봉우리는 찾아가는 길의 재미를 주는 풍경. 호젓한 마을의 오솔길 안쪽에 자리한 온천 내부는 동네 목욕탕보다도 작은 수준이지만, 게르마늄 함량이 높은 중탄산 온천수에 몸을 푹 담글 수 있는 건 인제 여행의 특권처럼 느껴진다. 탕 안엔 녹슨 듯 얼룩덜룩한 자국들이 눈에 띄는데 이곳 주인은 “게르마늄 성분 때문에 생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이물질 역시 오염물이 아닌 온천 성분으로 매일 수질 관리를 철저하게 하고 있다”고 했다.
필례게르마늄온천은 설경을 바라보며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노천탕이 백미다. 노천탕의 네모난 틀 안으로 겨울 설경이 들어온다. 남녀 구분된 노천탕은 오전 10시쯤 물을 받기 시작하는데, 평일 오전 시간대에 가면 호젓하게 온천욕을 할 수 있다. 설악산이 내뿜는 맑은 공기 마음껏 들이마시며 몸을 푹 담그고 있자니 일본 온천이 부럽지 않다. 주말에는 인제 주민, 속초나 양양에 다녀가는 여행객들까지 겹쳐 붐비기 쉽다. 이용료는 성인 1만4000원, 청소년 1만2000원, 어린이 8000원. 휴무일인 매주 수요일을 제외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한다.
◇한용운, 박인환, 김응현
인제 속 문인들의 흔적을 따라가 보는 코스도 알차다. 북면 용대리 만해마을은 불교의 대선사이자 시인, 민족 운동가로 일제강점기에 민족혼을 불어넣은 또 다른 ‘영웅’ 만해 한용운 선생을 기릴 수 있는 공간이다. 복합 문화 단지로, ‘만해 문학 박물관’ ‘문인의 집’ ‘만해 학교’ ‘만해사’ ‘심우장’ ‘님의 침묵 광장’ 등이 잘 조성돼 있다. 만해 문학 박물관에선 만해의 친필 서예와 작품집, 독립운동 당시 수형기록부 등 만해가 남긴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새해여서인지 친필 글귀 중 ‘절구공이를 갈고 갈아 바늘을 만들고 대나무 책의 가죽끈이 닳아 떨어졌다’는 뜻의 ‘마저절위(磨杵絶葦)’가 눈에 들어온다. 쉬지말고 노력하라는 선생의 가르침을 가슴에 담고 박물관을 나오면 북카페 ‘깃듸일나무’가 기다린다. 깃듸일나무는 만해의 시 ‘생명’의 한 싯구(깃 들일 나무)에서 따온 이름. 편백나무로 꾸민 카페는 산장처럼 따스한 분위기다. “문인의 집은 문인들을 위한 시설이지만, 일반인들도 숙박이 가능해 아는 이들이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 조용히 다녀간다”는 게 이곳 권혁필 사무국장의 말이다. 만해마을과 가까이 한국 시집 박물관, 여초 김응현 서예관도 있다. 여초 김응현 서예관은 한국 서예사의 대가로 평가받는 여초 김응현의 작품 세계를 볼 수 있는 곳. 서예란 말 대신 ‘서법예술’이라 강조했던 여초 선생이 생전에 쓰던 서화 용구와 안경, 돋보기 등 유품과 책, 여초 선생의 작품 133점 등이 기다린다.
차로 20여 분 거리의 인제읍 박인환 문학관은 한국 모더니즘 시의 대표적 시인이자 ‘댄디보이’로 불리던 박인환과 만나는 공간이다. 박인환 생가터에 세워진 문학관은 해방 전후 1950년대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의 발상지이자 박인환의 서점이었던 ‘마리서사’ 주변 거리를 마치 근현대박물관, 드라마 세트장처럼 재현해 그 시대로 들어간 듯 ‘체험’해 볼 수 있다. 1955년 겨울에 명동 대한중석 옆에 문을 연 ‘동방싸롱’부터 박인환의 대표 시 중 하나인 ‘세월이 가면’의 노래가 만들어진 막걸릿집 ‘은성’ ‘포엠’ 등은 일부러 연출 사진을 찍으러 찾는 이들도 있다. 문학관 밖엔 시인의 품에 안긴 듯 사진 촬영을 할 수 있는 박인환 조각상 벤치가 있다.
◇해 질 녘 한계령에 서서
‘만해마을’이 있는 북면 용대리는 혹한기엔 ‘겨울 왕국’으로 변신한다. 차가운 바람에 황태가 꼬들꼬들 말라가는 황태덕장의 설경과 함께 매바위 인공 폭포를 빼놓을 수 없다. 한여름 매바위 정상부 90여 m 높이에서 쏟아지던 폭포수는 겨울이면 꽁꽁 얼어 빙벽장이 된다. 인제의 겨울 축제인 ‘인제 빙어 축제’(20~29일 예정)가 열리는 남면 빙어호와 함께 얼음을 원 없이 구경할 수 있는 ‘빙멍’ 장소다.
용대리와 가까운 미시령을 뒤로 하고 서울양양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한동안 찾지 못했던 옛 고개를 다시 천천히 올라가 해발 920m 지점에 닿으니 인제의 끝, 양양과의 경계에 있는 한계령휴게소가 반긴다. 건축가 류춘수가 설계한 휴게소는 40년의 세월이 흘러 어느덧 설악산 풍경의 하나가 됐다. 전망대에서 서서히 내려오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자니 양희은 노래 ‘한계령’의 한 구절이 입속에 맴돈다.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그 쓸쓸한 노랫말에 떠밀린 듯 발길을 돌려 천천히 내려오는 길, 그제야 속도에 떠밀려 놓쳤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 지글지글 두부구이 먹을까, 팥옥수수 범벅에 떡구이 먹을까 ]
지나치기 쉬운 인제 맛집
휴게소만 잠시 거쳐 서울양양 고속도로를 이용해 빠르게 동해 바다로 달려가는 이들은 절대 알 수 없는 인제 맛집들이 있다.
인제 자작나무 숲(속삭이는 자작나무 숲)에서 10여 분 거리, 기린면 고향집엔 뜨끈뜨끈한 손두부 요리가 별미다. 현지 주민들도 두부전골(2인 이상 9000원), 콩비지백반(9000원)과 함께 검은색 구이판에 지글지글 구워 먹는 두부구이(9000원)를 필수 주문하는 분위기다. 식감은 크림치즈, 맛은 적당히 고소하면서 담백해 많이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오히려 메인인 두부전골이나 콩비지보다 손이 더 간다. 단, 두부를 직접 부치다 보면 기름이 사방에 튈 수 있으니 주의할 것.
북면 백담사 부근 백담순두부도 유명하다. 황태구이 정식이나 더덕구이 정식도 인기지만 순두부정식(9000원)을 찾는 이들이 많다. 직접 담은 장은 물론 곁들여내는 나물 반찬도 정갈하고 맛이 깔끔해서 따로 판매하기도 한다. 몽글몽글 뭉쳐진 하얀 순두부가 어쩐지 설경과 잘 어울린다. 황태해장국도 시원하다. 오전 8시부터 문 열어 아침 식사가 가능하다.
인제읍 메밀촌막국수는 9월 초부터 2월 말까지 감자옹심이(1만원)를 찾는 이가 많다. 생감자로 만든 수제 옹심이는 ‘강원도 고랭지에서 9월부터 출하되는 두백 품종의 생감자로만 만든다’고 내세운다. 두백은 ‘분이 많은 감자’로 불리는 품종으로 삶거나 익혔을 때 입자가 가루처럼 고운 것이 특징이다. 면과 함께 섭섭하지 않게 담겨나오는 감자옹심이는 쫀득쫀득 차진 식감이다. 메밀새싹묵무침(1만3000원)이나 메밀묵을 곁들이면 메밀 만찬을 즐길 수 있다.
하추리산촌마을 내 카페 하추리엔 오전 9~11시에 한해 할인해 선보이는 ‘산골 브런치’(2인 1만2000원)가 인기다. 주문하면 팥과 옥수수를 섞어 만든 ‘팥옥수수범벅’에 떡구이, 아메리카노 2잔이 나온다. 거창한 구성은 아니나, 소박하고 건강한 브런치로 소문나며 인근에 있는 리조트 이용객들이 조식 대신 일부러 찾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