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의 한 기원에 모인 사람들이 바둑을 두고 있다.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바둑은… 왜 좋아해요?”

“침묵 속에서, 죽을힘을 다해 싸우는 게 좋아서요. 상대가 공들여 지은 집을 무너뜨려야 이기는 것도 맘에 들고.”

같은 날 오후 서울 은평구 은평바둑학원에서 한 초등학생이 어린이의 흥미를 끌기 위해 제작된 분홍색 바둑판과 청색돌, 금색돌로 바둑을 두는 모습.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고교 시절 학교 폭력 피해자 문동은(송혜교분)이 가해자 박연진(임지연분)을 향해 처절한 복수를 노리는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The Glory)’가 전 세계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김은숙 작가가 빚어낸 서늘하고도 통쾌한 대사와 더불어 시청자들의 눈길을 끈 소재가 있으니 바로 바둑이다. 주인공 문동은은 박연진의 남편 하도영(정성일분)에게 접근하려 그가 좋아하는 바둑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더 글로리’의 바둑은 조용하고 천천히, 그리고 치밀하게 나아가는 문동은의 복수 그 자체를 상징한다. 가해자와 피해자로 명확히 나뉘는 ‘더 글로리’의 대립 구도는 흑백이 첨예하게 맞서는 바둑의 싸움과 쏙 닮아있다.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에서 주인공 송혜교와 정성일이 기원에서 바둑을 두는 장면. / 넷플릭스

특히 시청자들 사이 화제가 된 것은 바둑판 형상을 띤 대규모 바둑 공원이다. 인천 청라호수공원에 약 80평 크기의 바둑판 두 개와 대형 바둑돌 등 조형물을 설치해 만든 세트인데, 현재 ‘글로리 성지’로 불리며 팬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단다.

하지만 바둑계 사정은 ‘더 글로리’와는 딴판이다. 삼국시대부터 1500여 년간 이어진 바둑이 근래 고사하고 있다는 위기감이 퍼져가고 있다. 한국 바둑은 1989년 세계바둑대회에서 우승한 뒤 귀국한 조훈현 9단이 카퍼레이드를 벌일 정도로 한때 국민적 인기를 누렸지만, 30년 사이 생존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젊은 층 외면, 노인 회관 된 기원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20년 안에 죽고 나면, 다 없어질 거야.”

지난 9일 오후 서울 은평구 신사동에 있는 D 기원. 낡은 상가 3층에 있는 기원 문을 열고 들어서자 20여 평쯤 되는 공간에 바둑판 20여 개가 깔려있었다. 하지만 손님은 두 테이블에 옹기종기 둘러선 노인 10명뿐. 이들은 “더 글로리 같은 드라마는 들어본 적 없다”며 “늙고 나서 할 일이 없으니 그냥 여기 온다”고 말했다.

15년 넘게 D 기원을 운영한 백발의 사장은 ‘업황이 어떠냐’는 물음에 “업황이랄 것도 없이 오래전부터 기원은 이미 다 망했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2000년대 초반까지는 손님이 제법 많았지만 이제는 노인만 남았다”며 “여기도 운영해 봤자 남는 것도 없지만 기원에 놀러 온다 생각하면서 임차료만 감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기원들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D 기원과 수백 미터 떨어진 한 기원에선 손님들이 바둑 대신 화투를 치고 있었다. 한 기원 사장은 “코로나 때는 이미 손님이 없었던 상황이라 타격이라고 말할 것도 없었다”고 했다.

바둑계 인사들은 “지금 40~50대인 1970년대생부터 바둑에 대한 관심이 뚝 끊어졌다”고 말했다. 1980~90년대 PC가 보급되면서 등장한 PC 게임과 온라인 게임이 바둑 인기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는 것이다. 40대 회사원 A씨는 “1998년에 스타크래프트 게임이 나오면서 당시 대학생 청년들,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바둑 대신 ‘스타’를 하지 않았느냐”며 “지금도 스타크래프트를 하는 친구들이 적지 않으니 ‘스타’가 바둑을 대체한 것 같다”고 말했다.

서효석 대한바둑협회 회장(편강한의원 회장)은 “바둑이 시간이 많이 필요한 스포츠이다 보니 갈수록 젊은 층의 외면을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바둑에 입문해서 제법 바둑을 둔다고 할 수 있는 10급까지 가려면 수년이 걸리고, 한 판을 제대로 두려면 2시간 정도 걸리다 보니 PC 게임의 속도감과 즉흥성을 추구하는 최근 젊은 세대의 감성과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1500만 바둑 인구, 30년 새 반 토막

최근 바둑계의 위기감이 부쩍 커진 건 전 세계에서 한국에 유일무이하게 존재하던 바둑학과가 폐과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명지대는 명지전문대와 통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명지대 바둑학과를 폐지하기로 했다. 최근 바둑 인구가 줄어들면서 바둑이 사양산업이 됐고, 현재 젊은 층의 바둑 참여 비율도 10% 미만이라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바둑계에서는 “바둑학과 폐지 반대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가 나온다. 1980년대 초만 해도 바둑은 등산과 낚시, 테니스를 제치고 국민 취미 분야 1위에 오를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한때는 국내 바둑 인구가 1500만명에 달한다는 추산 결과도 있었다. 대한바둑협회 측은 “수년 전 조사에서는 700만명으로 떨어졌으니, 지금은 그보다 적을 것”이라고 말했다.

돌연 바둑 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다. 2016년 이세돌 9단과 바둑 두는 인공지능(AI) 알파고의 대결로 바둑 인기가 폭발했었다. 한 기원 사장은 “당시에 손님이 조금 늘었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며 “기원보다 바둑 학원의 사정이 많이 좋아졌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바둑 학원 사정도 현재는 그리 좋지 않다. 서울 은평바둑학원의 목진우(67) 사범은 “알파고 이후 한때 원생이 50~60명까지 됐지만, 지금은 30~40명 수준”이라며 “이 학원도 구청과 은평 시니어 클럽에서 공익적 차원으로 월세 등을 지원해 주고 있어 운영이 가능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바둑 학원 사범은 “바둑을 배우는 학생은 초등학교 저학년이 대부분이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학부모들이 바둑 대신 공부에 열을 올린다”며 “경기가 나빠지면 학부모들이 가장 먼저 중단하는 학원이 바둑 학원”이라고 말했다.

◇“바둑 기사 될 천재들, 다 프로게이머 돼”

프로 바둑의 사정도 갈수록 악화되는 실정이다. 한 바둑 학원 원장은 “최근에는 프로 기사들이 대회 출전으로 생계를 이어가지 못해 바둑 학원 사범으로 오고 있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현재 신진서 9단이 30연승을 질주하며 세계 바둑계를 이끌고 있지만, 정작 바둑계에서는 “신진서 9단을 이을 어린 주자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 인사는 “예전에는 머리 좋다는 천재들은 다 바둑에 입문했는데, 지금은 다 프로게이머가 되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한국 기원과 대한바둑협회 등은 바둑 인기를 되살리고자 고심하고 있다. 양재호 한국기원 사무총장은 “AI를 활용한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 바둑을 빨리 익히고 실력 향상 속도를 높여주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처럼 교본을 보며 오랜 시간 바둑을 익혀야 했던 것과 달리, 모바일 앱과 AI를 활용해 게임을 하듯 바둑을 두고 AI가 실시간으로 잘못된 수와 잘 둔 수를 판별해 줘 어린 입문자들이 빠르고 재미있게 바둑을 배울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대한바둑협회는 현재 주 1회 방과 후 교실로 이뤄지고 있는 교내 바둑 교육을 정규 교과로 확대하고, 19줄로 이뤄진 바둑판을 13줄로 줄인 ‘13줄 바둑’ 보급을 확대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서효석 회장은 “13줄 바둑은 19줄 바둑보다 판이 작기 때문에 난이도가 낮고 20분에 한 판을 끝낼 수 있을 정도로 속도감이 있어 바둑에 빠르게 재미를 붙일 수 있다”며 “경기 부천시는 현재 시내 초등학교 80% 이상이 바둑을 정규 과목으로 채택하고 있고, 각 지자체에서 이 같은 방식의 바둑 교육을 점점 확대해 가는 추세”라고 말했다.

양재호 사무총장은 “바둑만큼 집중력과 끈기, 창의력을 길러주는 게임은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그 가치는 여전히 크다”고 했다. 가로 8줄, 세로 8줄에 처음 둘 수 있는 경우의 수가 20가지인 체스에 비해 가로세로 19줄에 총 361칸이 있는 바둑이 가진 경우의 수는 약 10의 700승으로, 우주에 떠 있는 별보다 많다는 추산이 있을 정도다. 권준수 서울대 정신의학과 교수 연구팀이 바둑을 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의 뇌를 비교 관찰한 결과, 바둑을 둔 집단은 정서 처리와 직관적 판단에 관여하는 편도체와 안와전두엽 부위, 공간적 위치 정보를 처리하는 두정엽 부위가 활성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바둑이 깊은 통찰력과 직관적 판단력, 공간지각력을 키워준다는 것이다. 서효석 회장은 “바둑이 어린이의 두뇌 개발과 노인의 치매 예방에 효과가 크다는 게 계속 입증되고 있고, 서구권도 체스 대신 바둑으로 인기가 넘어가는 상황”이라며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배우기 시작해야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