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환 충북지사가 도청 내 자신의 ‘6평’ 집무실에서 ‘못난이 김치’를 들어 보이며 웃었다. “못난이 김치는 쇄빙선이에요. 이 김치가 개척한 길에 못난이 감자, 고구마, 사과, 복숭아 등이 줄을 이을 거예요.” 못난이 김치를 비롯해, 충북의 매력을 입이 마르게 설명하는 그는 마치 신명 난 장사꾼 같았다. 그는 “충북은 (인접한) 바다는 없지만, 꿈의 바다가 있는 곳”이라고 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못난이 김치’는 김치만은 우리 것을 먹자는 ‘김장 의병 운동’이자, 버려지는 농산물을 도시 사람들에게 저렴하게 공급하는 ‘못난이 컬리’입니다. 생긴 건 못났지만, 맛은 정말 잘났답니다, 하하!”

도지사인가, 장사꾼인가. 현란한 말솜씨에 감탄하던 찰나, 그가 자못 진지해졌다. 대뜸 “날 비호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말도 많고 뺀들뺀들해서.”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튀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혁신하지 않으면, 몸부림치지 않으면 충북은 가라앉을 게 뻔하니… ‘잘난이 김치’면 누가 봐주겠어요, ‘못난이 김치’니까 보는 겁니다.”

취임 6개월 차인 김영환(68) 충북지사는 매우 튀는 사람이다. 삶의 궤적부터 그렇다. 노동운동가, 4선 국회의원과 장관, 치과의사이자 등단 시인. 사람들은 그를 ‘튀는 사람’이라 좋아하고, 또 싫어했다. 2016년 총선에서 낙선하자 사람들은 ‘김영환은 끝났다’고 수군댔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치과 일을 하면서 계속 선거에 나섰고 목소리를 냈다. 그러다 지난해 정권교체 바람을 타고 충북지사에 당선됐다.

취임하자마자 파격 행보를 이어갔다. 관사를 반납하고 자비로 월셋집을 구했고, 해외 출장 시 항공편은 이코노미석을, 호텔은 비즈니스 호텔을 이용하겠다고 약속했다. ‘못난이 김치’를 비롯해 ‘진료비 후불제’ ‘충북 레이크파크 르네상스’ 등 세상에 없던 사업과 정책도 시작했다. 그의 페이스북엔 “충북의 벤투가 되고 싶다” “예산이 봄비처럼 줄줄 샌다” 같은 글들이 매일 같이 올라온다. “신선하다”는 기대와 “쇼맨십”이란 우려가 엇갈린다.

이달 중순 충북도청에서 김영환을 만났다. 기존 88㎡(약 26.6평) 크기의 도지사 집무실을 직원 회의실로 바꾸고, 자신은 손님 대기 공간이었던 곳을 집무실로 쓰고 있었다. 새 집무실 면적은 20㎡(6평). “이것도 넓어요. 권위는 넓은 사무실과 거대한 책상, 육중한 소파에서 나오는 게 아니에요. 창조적 혁신과 도민의 지지에서 나오는 거지.”

충북도청 내 도지사 집무실. 기존 집무실 크기의 4분의 1 수준이다. /충북도

◇충북의 벤투가 되고 싶다

-’못난이 김치’가 인기다.

“도(道)가 배추 재배 농가와 김치제조업체를 연결해 겉모양이 못생긴 배추를 김치로 만들어 파는 것이다. 포기김치 10㎏이 3만원 정도 된다.(시중 김치는 5만원대) 지난달 한국외식업중앙회 사이트에서 팔았는데, 6시간 만에 계약 물량 10t이 완판됐다. 지금 계약된 것만 200t이 넘고, 일본·미국·베트남 등 해외 수출도 시작됐다. 저가로 파고드는 중국산 김치에 맞서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김치의 정체성도 살리고 농민의 자존심도 살리는데 이게 의병 운동이 아니면 무엇인가?”

-도지사 아이디어인가.

“4년 전부터 괴산에서 고구마, 옥수수, 콩 등 농사를 짓고 있다. 아들하고 며느리가 귀농해서, 온가족이 함께 짓는다. 그런데 배추 농사 하는 농민들을 보니 좋은 배추만 팔고, 절반 이상을 버리더라. ‘이걸 버리지 않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 ‘못난이 김치’를 고안하게 됐다.”

-지난 9일부터 시행된 ‘의료비 후불제’도 화제다.

“전 세계 80억 인구 중 나만 생각한 일이다, 하하! 자동차, 휴대폰은 다 후불로 살 수 있는데, 왜 병원 진료는 선불이어야 하나? 누군가 돈 때문에 제때 치료를 못 받아 죽는다고 치자. 우리 국민으로서 살 권리, 앞으로 수십 년 경제활동 할 권리를 뺏는 것 아닌가. 사실 돈 있는 사람들은 신용카드 무이자 할부로 진료를 받는데, 어려운 사람들은 카드가 없어 수술도 입원도 못 하고 죽어간다. 의료비 후불제는 취약계층이 우선 치료부터 받고, 의료비는 나중에 낼 수 있게 순서만 바꾼 것이다. ‘문재인 케어’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과는 전혀 다르다.”

-돈 버는 데 열심이다. ‘세일즈맨 도지사’란 별명도 생겼다.

“취임 후 6개월 동안 기업 투자 26조8000억원, 예산 8조3065억원을 확보했다. 나는 세일즈맨보단, 장돌뱅이에 가깝다. 무조건 발로 뛴다. 서울부터 제주까지 온갖 곳 다니며 투자설명회를 열고, 삼성바이오로직스·LG에너지솔루션 등 기업들을 직접 찾았다. 여의도, 용산, 세종시도 종횡으로 다녔다. 한 번 서울 올라가면 국회의원, 기업인을 비롯해 20명, 30명씩 만난다. 8조원을 갖고 80조원, 800조원을 만들어 충북 사람들 다 먹여 살리는 게 내 책무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다.”

-”한 푼의 예산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고 했다. 직접 도정을 맡아보니, 허투루 쓰인 예산이 많던가.

“거의 전부가 허투루였다. (지자체가) 그냥 주는 시민단체 보조금이 대표적이다. 충북도립대의 경우 취업률, 교수 연구실적 등이 전국 최하위다. 그런데도 연간 180억원의 돈이 들어간다. 특단의 개혁을 통해서 대학다운 대학으로 바꿔놓을 생각이다. 청남대(옛 대통령 별장)는 매년 30억원 적자에 허덕인다. 100억원을 벌어도 시원찮은데, 30억원 적자라니 이거야말로 허투루 아닌가. 직원들 얘기 들어보니 청남대에서 (규제 때문에) 커피 한 잔 못 팔게 했다더라. 커피를 못 팔게 하면 바깥에 커피차를 갖다 놓고 팔면 되고, 취사를 못하게 하면 도시락을 팔면 되는 것 아닌가. 두고 보라. 청남대는 앞으로 수십억 흑자를 내게 될 것이다.”

그는 김대중(DJ) 대통령이 지도자의 덕목으로 꼽은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언급했다. “우리 지도자들은 상인의 현실감각이 너무 부족하다. 도정이든 국정이든 민생을 중심으로, 밥그릇을 튼튼하게 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아무튼, 주말>과의 인터뷰 도중 김영환 충북지사는 스크린에 지도를 띄웠다. 그는 "그동안의 내륙 소외는 지역 불균형과 농촌 소멸을 가져왔다"면서 "'내륙의 발견'은 국가의 신성장동력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중부내륙선(철도)의 고속화·복선화, 청주~김천 연결, 청주공항 확장 등을 선결 과제로 제시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충북은 가만히 있으면 가라앉는 조건을 가진 곳”이라고 했다.

“바다가 없고, 백두대간에 막혀 있어 교통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되지 못했다. 댐과 국립공원이 많다는 이유로 규제도 과도했다. 국가 성장 전략이 1970~80년대 동해안 중심, 1990년대 이후 서해안 중심으로 행해지면서, 희생만 강요받아왔다. 이런 한계들을 극복하려면 치열하게 몸부림쳐야 한다. 충북은 대한민국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757개의 아름다운 호수와 준엄한 산맥을 갖고 있다. 중부내륙선(철도) 고속화·복선화, 중부내륙고속도로와 청주공항 확장 등을 통해 국토 균형 발전의 중심으로 만들 것이다.”

-’지방소멸’과 ‘저출산’이 국가적 재앙으로 다가오고 있다.

“지방소멸 문제는 수도권과 지방, 도시와 농촌의 문제를 함께 봐야 한다. 예컨대 도시는 인력이 남아서 문제고, 농촌은 모자라서 문제 아닌가. 충북에선 도시의 유휴인력을 농촌에 투입하는 ‘도시농부’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4시간 일하면 6만원을 받는데, 이중 60%는 농가가, 40%는 도가 부담한다. 도시와 농촌이 모두 ‘윈윈’할 수 있는 거다. 저출산도 마찬가지다. 보육, 의료뿐만 아니라 여성의 경력단절 문제도 함께 봐야 한다. 충북은 5년간 1100만원의 출산육아수당을 지급하는데, 이것만으로 출산율이 오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소기업이 사내에 어린이집을 설치하면 지원하는 등의 방안을 생각 중이다. 충북은 먼저 도전하고 실험하는 ‘테스트 베드’가 될 것이다.”

-과거 기사를 찾아보니 ‘운동권 출신답지 않게 사고의 폭이 넓고 아이디어가 많다’는 평이 있더라.

“하하! 운동권의 창조적 사고를 막는 장애물이 셋 있다. 시장을 모르고, 경영을 모르고,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 모른다는 것. 우물 안 개구리가 국가를 경영하면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 보지 않았나. 내 신조가 ‘두잉 퍼스트, 섬싱 디퍼런트(Doing First, Something Different·다르게 생각하고, 최초로 도전하라)다.”

2012년 7월 5일, 김영환이 폭우 속에서 대선 출마 선언을 하는 모습. 그는 당시 “국민 화병을 고쳐드리겠다”며 출사표를 냈다. 이번 인터뷰에서 대선 출마 생각을 묻자, 그는 “전혀 (없다). (당선될) 가능성도 없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충북의 개혁 드라이브가 약화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선DB

◇文과 李의 노선은 DJ 노선 아니다

연세대 학생 운동권 출신으로 재야에서 이름을 날린 김영환은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대변인으로 정치에 발을 들였다. 치과의사로 살면서는 채워지지 않는, 사회 변혁에 대한 꿈을 좇기 위해서다. “소의(小醫)는 병을 고치나, 대의(大醫)는 가난을 고친다는 말이 있다”는 게 첫 출마의 변이었다. 공단이 많은 경기 안산 지역에서 15·16·18·1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0번의 선거에 나가 5번 당선되고 5번 낙선했다. 2007년과 2012년엔 대선 출사표를 던지기도 했다.

-DJ는 생전에 김영환을 ‘우리 당 국회의원이고, 전기기술자에 시인이자 치과의사’라며 자랑스럽게 소개했다더라.

“1996년 15대 총선에서 당선되자마자 당의 정세분석실장을 맡게 됐다. 이듬해 대선 때는 내가 맡은 당직이 13개 정도 됐다. 연청(DJ의 청년정치조직) 회원도 아닌데 중앙회장을 맡은 건 나밖에 없다. 동교동계도, 호남 출신도 아닌데 예뻐하셨다. 최연소 (과기부) 장관에도 발탁해 주셨고. ‘과감하게 큰 정치를 하라’고 하셨다.”

-열린우리당 창당에 반대했다가 17대 총선에서 떨어지는 등 시련을 겪었는데.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말씀드렸다.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면 불행해진다고. (새천년)민주당으로 당선된 대통령이, 민주당을 버리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 게 비상식 아닌가. 결국 어떻게 됐나. 분열을 먹고 자란 ‘뺄셈의 정치’가 나라를 두 동강 내지 않았나.”

-민주당에서 정치를 시작했는데, 국민의당을 거쳐 지금은 국민의힘 소속이다. 자리 욕심 때문인가?

“나는 오히려 자리를 박차고 나온 사람이다. 내가 양지를 찾아 다녔다면, 다섯 번이나 낙선할 수가 없지 않나. 정세균·추미애 같은 이들과 정치를 시작했는데, 이들은 국회의장, 당 대표 등을 두루 했다. 나는 2003년부터 20년 가까이 비주류만 했다. 친노를 겪고 절대 비주류는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훨씬 더 심한 친문과 친명이 등장하더라. 당초 아내와 아이들은 ‘당을 바꿔가면서까지 (정치를) 해야 하냐’고 했는데, (2018년 경기지사 선거에서) 이재명과 맞붙으면서 가족의 의견이 처음으로 하나가 됐다. ‘이재명은 절대 안 된다’고. 그는 절대 반성하지 않는 사람이다.”

-2018년 지방선거 때 ‘이재명 저격수’를 자처했다.

“대장동 게이트, 성남FC 후원금 문제, 친형 정신병원 강제 입원 사건 등을 제기했다. 5년이 흐른 지금 수사가 진행되면서 진실이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김영환은 40권의 책과 1000편의 시를 발표했다. 자신을 ‘정치가 시보다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상주의자’라고 소개하곤 한다. 그는 “국민을 분열시켜 진영으로 나누는 뺄셈의 정치가 아닌, 국민을 통합하는 덧셈의 정치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고 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변절자’란 비판도 있다.

“우선 DJ 정부 시절, 북한이 핵을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오판했다. 부끄럽고 (국민에게) 죄송한 일이다. 북한 문제를 제외하고는, 나는 지금 나의 길이 과거의 민주당이 추구했던 노선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추진 중인 모든 정책은 서민에게 포커스를 맞춘 것이다. 민주당보다 더 개혁적인 정책이다. 지금 민주당은 DJ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만한, 진영 논리에 경도된 정당이다. 문재인과 이재명의 노선은 DJ의 노선이 아니다. 나는 그들과 같은 배를 타는 동안 끝없이 경고하고 비판했다. 듣지 않더라. 그들의 행렬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윤석열 대선 캠프에 직책 없이 합류했다.

“불러주지 않으니까, 하하! 윤석열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데서 온 용기였다. 2007년 대선 때 고건을, 2012년 때 안철수를 밀었는데 후보들이 중도에 포기했다. 윤 대통령도 집에 갈까 봐 걱정했는데, (윤 대통령이) 만나자고 전화를 했기에 ‘마음을 단단히 가져야 한다’고 했다. 윤 대통령이 그때 ‘저 멘탈 강합니다!’고 하더라.”

-화물연대가 불법 파업에 들어갔을 때 윤 대통령에게 ‘양심의 독재자’가 되라고 했던데.

“지도자가 언론이 좀 때린다고 해서, 지지율이 좀 안 나온다고 해서 흔들리면 안 된다. 대한민국 건국을 이룬 이승만, 경부고속도로를 만든 박정희, 하나회를 척결한 김영삼, 한일 관계를 정상화한 김대중, 한미 FTA를 체결한 노무현처럼 지금은 어렵더라도 대한민국의 번영을 위한 외롭고 힘든 길을 걸어가야 한다. 윤 대통령 취임 뒤 우리나라의 바이털사인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지 않나.”

-그래도 쓴소리를 한다면.

“사람을 더 넓게 써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정치를 하면서 가장 잘한 일과 못한 일은 뭔가.

“잘한 일은 윤석열 정부 출범을 도와 ‘상식의 나라’로 만드는 데 기여한 것. 못한 일은 노무현 탄핵에 앞장선 일이다. 탄핵 역풍이 새천년민주당의 몰락을 가져왔고, 그게 친노·친문·친명의 패악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무학의 아버지가 가르쳐준 것

시인 황지우는 김영환의 시집 ‘꽃과 운명’의 발문에 이렇게 썼다. “(김영환의) 첫인상은 너무 잘생겼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운동이니 정치니 하는 세속의 먼지 떠 있는 법석에 함께 있다는 것이 언뜻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연세대 치대를 나온 김영환은 외모와 학벌 덕에 ‘부잣집 아들’이란 오해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는 1955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산골에서 태어났다. 무학의 부모는 중국집 주방장과 노점상을 해 5남매를 키웠고, 그는 가족을 가난에서 구하기 위해 치과대학을 택했다. 하지만 학생운동을 하다 제적·투옥·수배 등을 겪었고, 대학은 15년 만에 졸업했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나.

“내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다. ‘뒤주에 쌀이 떨어지면 밥을 굶는다’는 아버지 말씀이 내 좌우명이다. 고아였던 아버지는 가족을 지키겠다는 생각이 강한 분이었다. 철저히 대비하지 않고는, (자식) 다섯 놈을 먹여 살릴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런 말을 하신 것 같다. 내게 현실 인식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셨다.”

-얌전히 공부해서 치과의사가 될 생각은 없었나.

“대학 때 을지로에서 야학을 했는데, 거기 온 노동자 친구들이 너무 불쌍했다. ‘사회를 변혁해야겠다’ ‘유신을 반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운동을 하게 됐다. 학교 다닐 때 인기가 좋아, 나 따라 운동한 후배들이 많았다. 당시 연대 학생운동의 배후가 나였다, 하하!”

김영환 충북지사가 전기기술자로 일하던 당시의 모습. /충북도

그는 80년대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서울 여의도·충북 청주 등에서 기름때 묻은 ‘뺀찌(펜치)’를 차고 다니며 기술자로 일했고, 전기안전관리기사 등 자격증 6개를 땄다. 부천에서 단순조립공 생활을 하기도 했다.

-시는 어떻게 쓰기 시작했나.

“서울구치소에서 ‘빵투(감방투쟁)’를 했더니 홍성교도소로 이감을 시키더라. 그게 1978년이었다. 면회·도서열독·세면·운동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이러다 실어증 걸리겠다’ 싶더라. 어느날 문틈에 뾰족이 나온 가느다란 못을 발견했다. 그 못으로 회벽에 시를 적기 시작했다.”

김영환은 1986년 등단했고, 1000여 편의 시를 발표했다. 조립공 시절 ‘김해윤’이란 필명으로 쓴 시 ‘단순조립공의 하루’는 훗날 민중가요로 만들어졌다. 시집 ‘지난날의 꿈이 나를 밀어간다’(1994) ‘돌관자여, 흐르는 강물에 갈퀴손을 씻으라’(2010) 등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2021년엔 아내 전은주와 함께 광주민주화운동증서를 반납했다. 당시 범여권 의원들이 민주화 유공자 가족 등에게 교육·취업·의료·주택 지원을 하는 내용의 ‘민주유공자예우법’을 발의한 것에 반대하면서다. 국가보훈처장 앞으로 보낸 편지에 그는 이렇게 썼다. “저와 아내의 민주화를 위한 작은 희생조차도 그동안 너무나 과분한 대우를 국민으로부터 받아왔습니다. 저희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할 때는 결코 이런 보상을 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김영환 충북지사와 그의 아내 전은주씨는 2021년 4월 '민주유공자예우법'에 반대, 광주민주화운동증서와 명패를 반납했다. 김 지사는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의 행태에 대해 국민들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과거 민주화 운동 동지들의 위선과 변신에 깊은 분노와 연민의 마음도 갖게 됐다"고 했다. 사진은 같은 해 5월 부부가 본지와 인터뷰 하는 모습. /남강호 기자

-아내는 어떤 사람인가.

“노동운동을 하다 만났다. 숙명여대 출신인데, 운동권으로 따지면 내 선배 격이다.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았어도, 한 번도 바가지 긁은 적이 없다. 95년 정계에 입문할 때 아내에게 문학·사업·정치 중 앞으로의 인생길을 택하라고 했더니, 정치를 권하더라. 내가 정치를 하면서, (아내가)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게 됐다. 미안한 마음이 크다.”

-가장 잘 맞는 직업은 뭐였나.

“치과의사. 내가 환자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얘기가 ‘선생님한테 치료받으면 안 아프다’는 것이었다. 비법은 자상함. 주사 한 대를 놔도 그냥 놓는 게 아니라, 왜 놓는 거고 어디에 좋은지를 설명했다. 그래서 병원이 항상 잘됐다. 하지만 치과의사는 진료비 후불제, 못난이 사과 같은 것은 못 하지 않나. 정치와 정책으로 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많다.”

-올해 예순여덟이다. 열정의 원천은?

“창조적 희열의 순간에 사람은 늙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정책을 구상하고, 사업을 벌이고, 성과를 거두는 것! 이만큼 행복한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