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왕증(旣往症), 해태(懈怠)하다, 궁박(窮迫)하다, 불상(不詳), 요(要)하지 아니한다, 장구(葬具)….
이 단어들의 정확한 뜻을 아시는지. 순서대로 풀이하면, ‘지금까지 걸렸던 질병’ ‘게을리하다’ ‘곤궁하고 절박하다’ ‘알 수 없는’ ‘필요가 없다’ ‘장례 도구’다. 신조어만큼이나 해독이 어려운 이 단어들은 법원 판결문에 흔하게 등장해 분쟁 당사자들을 괴롭히는 주범. 대법원은 1991년 “판결서는 당사자를 위한 것”이라며 “법률 전문가가 아닌 당사자도 이해하기 쉽도록 쉬운 단어를 사용하고, 문장은 되도록 짧게 세분하여 간명하게 작성하도록 한다”며 ‘쉬운 판결문’을 권장했지만 여전히 난독의 대상이다.
법률 용어를 쉽게 풀어보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2008년엔 서울남부지법 판사들이 판결문 수십 건을 국립국어원에 보내 “용어와 문장을 쉽게 고쳐 달라”고 의뢰한 바 있다. 2011년 법원도서관에서는 전국 법원의 판례들을 모아 ‘읽기 쉬운 판결서 작성 핸드북’과 ‘간결한 판결사례집’을 발간했다. 2017년 법무부는 ‘알기 쉬운 민법 개정 TF’를 운영해 2019년 ‘민법 일부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일본식·한자어 표현을 개선하고,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표현으로 민법 조문을 바꾸는 내용을 담았다.
장애인·비장애인 모두를 위한 판결문
그간의 노력이 밑거름이 된 것일까. 쉬운 단어와 구어체를 사용하고,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까지 들어간 ‘쉬운 판결문’이 지난달 2일 한국 사법 역사상 최초로 등장했다.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 이는 청각장애인(원고)이 서울 강동구청장을 상대로 낸 ‘장애인일자리사업 불합격처분 취소’ 소송 판결문에서 나온 첫 문장이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재판장 강우찬)는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는 기존 판결문에 쉽게 풀어 쓴 문장을 나란히 붙여 썼다.
‘쉬운 말로 요약한 판결문의 내용’도 이어졌다. 3쪽 반 분량의 ‘해설’에는 단문과 구어체 문장으로 재판의 내용이 쉽게 적혀있다. 이해를 돕기 위한 삽화도 실렸다. 이는 판결 선고에 앞서 “알기 쉬운 용어로 판결문을 써달라”는 장애인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재판부는 “UN 장애인권리협약 및 UN 권고 의견에 근거하여, 판결문의 엄밀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지 리드(Easy-Read) 방식’으로 최대한 쉽게 판결 이유를 작성하도록 노력했다”고 밝혔다
이번 사례를 두고 전문가들은 “재판 내용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 쓴 것은 헌법에서 명시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최갑인 경기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변호사는 “난해한 판결문은 장애인은 물론 비장애인에게도 어렵다”며 “재판 당사자가 변호사의 해석과 번역을 거치지 않고 원문 그대로 판결문을 직접 이해할 수 있을 때, 재판받을 권리를 충실히 보장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팝송 가사도 등장하는 해외 판결문
해외는 어떨까. 영국은 정부 차원에서 지적 능력, 문해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을 위해 ‘쉽게 쓴 글(easy-read)’을 장려한다. 영국법을 계승한 미국도 판결문에 쉬운 영어를 쓰려고 노력한다. 심지어 ‘팝송 가사’가 등장한 연방대법원 판결문도 있다. 2008년 통신 사업자들 간 소송 판결문에선 밥 딜런의 노래 ‘뒹구는 돌처럼(Like a Rolling Stone)’의 가사를 적었다. “당신이 가진 게 없다면 잃을 것도 없다(When you got nothing, you got nothing to lose)”는 가사를 통해 ‘원고가 피고에게 소송을 걸어 얻을 것이 없다’는 취지를 비유로 풀어낸 것이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를 위한 ‘쉬운 판결문’이 널리 확대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변호사 김재왕씨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각하·기각 등의 표현이 난해한 것은… 물론, 법률 언어가 일상 언어와 다른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많아 법률가가 아닌 재판을 받는 사람들 모두에게 판결문이 어렵게 읽힐 수밖에 없다”며 “‘쉬운 판결문’에 대한 내규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