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비동간?”(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 “와! 비동간!”(류호정 정의당 의원).
여성가족부가 꺼내 들었다 9시간 만에 철회한 ‘비동의 간음죄(강간죄)’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지난 26일 오전 11시 여가부는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을 발표하면서, 발표 자료에 ‘형법 제297조의 강간 구성 요건을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 검토’라는 문구를 넣었는데, 이게 논란의 불을 댕겼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비판·옹호 의견이 쇄도하며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오후 5시 법무부는 “소위 ‘비동의 간음죄’ 개정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냈고, 오후 8시쯤 여가부는 “비동의 간음죄 개정 검토와 관련해 정부는 개정 계획이 없음을 알려드린다”고 밝히면서 사실상 철회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비동의 간음죄 논란은 ‘9시간의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2030세대가 초미의 관심을 보이고 있고, 정치권이 동참하면서 내년 총선까지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다.
◇‘안희정 사건’ 계기로 불붙은 논의
비동의 간음죄를 도입하자는 주장은 형법을 개정해 강간죄의 구성 요건을 폭행·협박 등 ‘가해자의 유형력 행사’에서 ‘피해자의 동의 여부’로 강화하자는 것이다. 현행 형법 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법부는 강간 사건에서 폭행‧협박 여부를 판단할 때 가장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최협의설’을 따른다. ‘피해자의 저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정도’의 강력한 폭행·협박이 있어야 강간죄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비동의 간음죄가 도입되면 폭행·협박이 없었다 하더라도, 상대가 동의하지 않았다면 강간으로 보고 처벌이 가능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부터 비동의 간음죄 도입 주장이 나왔는데, 2018년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을 계기로 논의가 활발해졌다. 여야 4당 의원들이 공동 발의한 법안을 비롯해, 2018~2019년 비동의 간음죄를 도입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이 총 10개 발의됐다. 지난 대선에선 정의당 심상정 후보가 비동의 간음죄 도입을 공약했고,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도입을 공약했다가 철회한 바 있다.
◇“현행법, 피해자 보호 못 해”
26일 2030 여성들이 주로 이용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비동의 간음죄 도입을 찬성하는 글이 여럿 올라왔다. 회사원 김모(29)씨는 “동의 없이 억지로 이뤄지는 성관계는 당연히 강간”이라며 “안희정·박원순 사건 등 수많은 성폭력 사건에서 명시적 폭행이나 협박이 없어도 성폭력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디지털 성착취 범죄 ‘n번방’ 사건을 폭로한 박지현 전 민주당 비대위원장은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가 강간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 강간인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성계는 “비동의 강간죄는 성폭력을 해소하기 위해 세계가 가고 있는 체계”(강간죄개정을위한연대회의) “현행 강간죄는 성폭력 피해자의 항거 여부에 따라 죄의 경중을 물어 피해 유발의 책임을 묻는 악법”(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등의 입장문을 냈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에 따르면, 실제 2019년 1~3월 전국 성폭력상담소 66곳에 접수된 강간 피해자 1030명 중 735명(71.4%)이 직접적인 폭력·협박이 동반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간 피해를 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2020년 폭행·협박이 없는 성폭력을 겪은 피해자들의 경험을 분석했는데, 피해자가 가해자와의 관계에서 취약한 상황에 놓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가해자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성관계를 해야만 하는 경우, 가해자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유일한 생활 방편인 경우, 종교 지도자-신도 관계 등 가해자가 권력의 위치에 있는 경우 등이 있었다.
비동의 강간죄 도입이 세계적 추세라는 의견도 나온다. 2000년대 초반부터 최근까지 영국·독일 등 유럽 10여 국가, 캐나다, 호주, 미국(캘리포니아 등 일부 주) 등은 형법을 개정해, 피해자의 (자발적) 동의 없는 혹은 의사에 반하는 성적 침해를 강간죄로 규정하고 있다. 스웨덴·스페인 등은 상호 간의 자유로운 동의가 없는 성관계는 모두 강간이라는 ‘예스 민스 예스 룰(Yes Means Yes Rule)’ 모델을 따르고 있는데, 이는 피해자가 거부 의사 표시를 했는데도 성행위가 이뤄진 경우를 범죄로 보는 ‘노 민스 노 룰(No Means No Rule)’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다.
◇“男을 잠재적 성폭력자로 몰아”
반대·신중론도 만만치 않다. 폭행·협박과 달리 ‘동의’는 판단 기준이 불분명하고,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주장이다. 직장인 강모(33)씨는 “(비동의 간음죄는) 성관계를 할 때마다 계약서를 써야 한다는 말과 다름없다”며 “계약서를 쓴다 할지라도 나중에 상대방이 ‘사실은 동의하지 않았다’고 하면 졸지에 범죄자가 되는 것 아니냐. 무수한 무고를 만들 수 있는 악법”이라고 말했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는 비동의 간음죄를 조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섹스 신청서’ 양식이 확산하기도 했는데, 실제 2021년에는 성관계 당사자들이 서로의 동의를 기록·보관하는 앱(애플리케이션) ‘그래그래’가 출시된 바 있다. 정치인들도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 “합의한 관계였음에도 이후 상대방의 의사에 따라 무고당할 가능성도 있다.”(권성동 국민의힘 의원) “성관계 시 동의를 묻고서 동의가 되고 나면 성관계를 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은 실제 생활에서 불가능한 일”(조경태 국민의힘 의원) 등이다.
동의 여부의 입증 책임이 피고인에게 전가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한동훈 법무장관도 “(비동의 간음죄는) 입법 시 동의 여부에 대한 입증 책임이 피고인에게 전환되게 돼 억울한 사람이 죄 없이 처벌받게 될 우려가 있어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동의 여부’를 가름하기 위해서는 수사기관이 고소인의 주관적 진술에 의존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피고인의 방어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밖에 법원이 최근 강간죄의 ‘폭행·협박’ 정도를 넓게 인정하고 현행법에 이미 위계·위력에 의한 간음죄가 있다는 점, 비동의 간음죄가 남녀 사이의 성적 행위에 대한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다는 점 등도 근거로 제시된다. 이수정 경기대 교수는 “안희정 사건 이후 (피해자의) 동의 여부를 성폭력의 유무죄 판단 기준으로 고려하는 판례의 흐름이 생겨났고, 또 항문에 상대방의 DNA를 넣고 유사 강간을 당했다고 무고한 사례가 나오는 등 과거하고는 범죄 양상, 환경이 달라졌다”며 “당장 형법을 개정해 비동의 강간죄를 명문화하는 것이 적절한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