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풍미했던 ‘자유로운 영혼’의 아이콘 천경자가 “내가 본 가장 매력적인 남성”이라고 말한 화가가 있었다. 시인 구상이 “깊은 산 동굴 속에서 갓 나온 사나이”라고 표현했던 ‘원시 인간’의 전형이었고, 시인 고은이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라고 썼던 사람이었다.
화가 이중섭은 피란 시절 그의 판잣집에 기숙하며 생존을 이어갔고, 소설가 박경리는 그가 사는 정릉 골짜기로 들어와 이웃해 살면서, 자신의 신문소설 삽화를 맡겼다. 수많은 예술가에게 사랑을 받았고, 더 많은 예술가에게 사랑을 주었던 화가, 박고석(1917~2002)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그림을 통한 구원
박고석은 1917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부친 박종은(1885~?)은 기독교 목회자로, 그의 막내아들에게 성경에 나오는 ‘요셉’을 따서 ‘요섭(耀燮)’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고석(古石)’은 박고석이 방황하던 청소년기 스스로 고쳐 지은 예명이다.
이름을 바꾼 것은 독실한 신자였던 부친과의 결별을 선언한 것이리라. 그것은 종교적 결별일 뿐 아니라 물리적 이별이기도 했다. 박종은은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했다가 상하이 임시정부를 돕는다며 박고석이 11살 때 중국으로 망명했기 때문이다. 큰아들까지 데리고서. 이후 박종은과 그의 장남은 언제 어디서 사망했는지조차 확인되지 못했다.
박고석은 신학교의 기숙사 사감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반항기 가득한 청년기를 보냈다. 학교 생활에는 무관심하고 불량배들과 싸우기나 하며 막무가내 인생을 살았다. 그러면서 자신을 사로잡은 문학, 영화, 미술, 스포츠 등을 닥치는 대로 섭렵했다.
타고난 재능으로 그림도 곧잘 그린다고 자부하던 어느 날, 박고석은 평양 출신 선배 화가 길진섭으로부터 제대로 쓴소리를 들었다. “사람이 서있는지 앉아있는지 모르겠다.” 데생의 기본이 안 되어 있다는 지적이었다. 길진섭이 누구던가? 민족대표 33인의 하나로 평양 장대현교회의 목사였던 길선주의 막내아들이었다. 어찌 보면 박고석과 유사한 가정 환경에서 태어나, 마찬가지로 반항의 청년기를 보냈고, 일본 유학 후 이름난 화가가 되어 돌아온 이였다. 길진섭의 “멋들어진 풍격(風格)”에 단번에 매료된 박고석은 그를 마음속 롤모델로 삼기 시작했다.
박고석은 이후 그림에 전념함으로써 자신의 풍운아적 기질을 다스려갔다. 1935년 도쿄로 유학을 떠나, 김환기가 다녔던 니혼대학(日本大學)에서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철학, 문학, 미술사, 미술 실기를 고루 배우면서, 전인적 화가로 성장했다. 중일전쟁이 한창일 때 격전지인 중국 임분(臨汾)까지 가서, 사진관을 차려 돈을 벌겠다는 무모한 도전을 일삼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는 도쿄 공습으로 하숙집에 있던 작품을 다 날리고도 일본에 남아 있다가 해방 후 귀국했다.
◇결혼과 전쟁
박고석은 매우 굳세면서도 따뜻한 내면을 지닌 인간이었다. 무뚝뚝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어!’ 하는 감탄사나 주어 몇 마디로 대화를 이끄는 유형의 인물이었다. 세상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을 지닌 채, 세속의 이해타산으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멋’이라는 것을 획득한 사람이었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반한 이들이 주변에 많았던 것은 당연했다.
그의 아내 김순자(1928~2021)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는 함경북도 청진에서 소련과 무역을 하던 거부(巨富)의 딸이었는데, 그만 박고석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서울 가회동 저택에 살며 기사 딸린 자동차를 가지고 있던 부잣집 딸이 박고석의 자취방에 갔다가, 텅 빈 방에 가구 하나 없이 종이 상자 위에다 밥을 올려놓고 먹는 그의 모습을 보고 반해 버렸단다.
김순자는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보따리 하나만 달랑 들고 나와 박고석과 결혼했다.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 서울 태화여자관에서 단 일곱 명만 참석한 결혼식을 올렸다. 김순자의 가족으로는 남동생이 거의 유일하게 참석해서 결혼사진을 찍어주었는데, 건축물을 하도 크게 앵글에 잡아서 사람 얼굴은 알아볼 수도 없게 찍어 놓았다. 건축에 유달리 관심이 많았던 이 남동생이, 나중에 유명한 건축가가 되는 김수근(1931~1986)이다.
결혼 후 전쟁은 더욱 본격화되었다. 박고석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자급자족하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전쟁기에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있었다. 부산 피란 시절에는 2층짜리 판잣집을 직접 지어 하얀 페인트칠까지 멋들어지게 했다. 집도 절도 없는 예술가들이 여기서 기숙했던 것은 당연하다. 이중섭이 대표적이었다. 그가 여기서 수많은 은지화를 그리는 동안, 박고석은 제법 큰 유화 작품을 그려 피란지 부산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가난에 태평인 화가와 그의 아내
부인의 말에 따르면, 박고석 집에는 신혼 때 받은 이불 홑청이 남아나질 않았다고 한다. 이중섭은 말할 것도 없이, 시대의 우울 속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시인 전봉래, 조각가 차근호 등 불우한 예술가의 장례식에 늘 나서서 수습하는 이가 박고석이었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전쟁 후 서울 정릉 골짜기에 자리를 잡고 대학 강의를 다니며 제자를 길렀는데, 없는 살림에 제자 사랑도 끔찍했다. 하숙집에서 쫓겨난 학생들이 그의 집에 기거하기 일쑤였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의 등록금을 가불해서 내주곤 했다. 그런 박고석의 정(情)을 체득한 제자 중 하나가 나중에 전설적인 CF 감독으로 성장한 윤석태였다. “여보,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놓아드려야겠어요” 같은 따뜻한 카피 문구로 유명한 그 감독이다.
그러나 3남 1녀의 자녀들이 태어나면서, 가난에 태평인 남편의 존재는 부인에게 시름을 안겼다. 박경리가 박고석의 기질을 잘 아니, 김순자에게 생활 전선에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고 권할 정도였다. 김순자는 한복을 지어 팔기 시작했는데, 솜씨가 너무나도 훌륭해서 순식간에 입소문을 탔다. 이 부부 주변에 모여 있는 예술가 중에는 무대연출가도 있어서, 역사극에 필요한 궁중의상을 김순자에게 의뢰했다. 그녀는 이방자 여사를 찾아다니며 궁중의상을 연구해 급기야 고전의상 전문가가 되었다. 1964년 하와이에서 역사상 최초로 한국 의상 쇼를 열었으며, 이란인 디자이너와 동업하여 워싱턴에 드레스숍을 열었다. 한복의 선과 결을 응용한 이브닝드레스는 미국 최상류층 인사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워싱턴과 서울을 오가며 작업하던 김순자는 1973년부터 아예 워싱턴에 정착해 자녀를 모두 데려가 유학시켰다.
◇산과 인생
그 사이 박고석은 자신의 ‘멋’대로 세상을 살았다. 이 소박하고 원초적인 인간이 사랑했던 것은 ‘산’이었다. 그는 대부분 시간을 산속에서 보냈다. 1년에 설악산을 10번씩 올랐을 정도였다. 가까운 북악산, 도봉산에서부터 백암산, 설악산 등 전국의 명산이 박고석의 생활 터전이었고, 그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는 영감의 원천이었다.
박고석은 산에 오르면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왠지 모를 이유로 자신을 사로잡는 바로 그 순간에만 펜을 빼들었다. 그러고는 이 순간을 놓칠 수 없다는 결연한 표정으로 스케치북을 수도 없이 넘기며 여러 장의 드로잉을 마구 그려댔다. 그러나 아무리 산에 자주 가도, 온몸에 들어와 안기는 풍경이란 쉽사리 만날 수 없는 법이다. 산 정상에 힘들게 올라서도 그런 순간을 경험하지 못하면, 박고석은 스케치북을 꺼내 보지도 않은 채 그냥 내려오는 날이 많았다. 그가 대표적인 과작(寡作)의 화가인 이유이다. 박고석은 결코 ‘감동’을 꾸며내는 일과도 타협하지 않았던, 결벽증적으로 솔직한 화가였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솔직 담백한 삶을 사는 것이 우선이었다. 누가 보면, 화가라는 직업을 가졌다고 할 수나 있나 싶을 정도로 게을러 보였다. 일평생 그는 현장에서는 수많은 드로잉을 그렸지만, 아틀리에에서 완성한 유화 작품은 고작 300여 점밖에 되지 않았다. 말년에야 드디어 그의 작품이 고가(高價)로 팔렸지만, “내가 돈을 그리는 것 같다”며 절필해 버렸다.
그런데 그가 평생 그린 작품을 시기별로 찬찬히 늘어놓고 보면, 놀랍게도 거기에는 한 인간의 인생이 너무나도 솔직하고 담담하게 펼쳐져 있다. 청년기의 어두운 우울, 장년기의 기운찬 패기, 노년기의 애잔한 우수 같은 것이 작품들에 무던히도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그는 단지 ‘같은 산’을 그렸을 뿐인데 말이다. 산 그림을 보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아, 이것이 인생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산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산이 되는 경지”(오광수)인 걸까?
◇노년의 걸작
우아한 이브닝드레스를 만드는 디자이너와 동굴에서 나온 것 같은 산 사나이의 만남이라니! 이 부부는 처음부터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을 예고했다. 그러나 부인은 끝끝내 박고석의 매력을 벗어나지 못했다. 김순자는 1982년 막내를 미국 대학에 입학시키자마자 미련 없이 사업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남은 생을 박고석의 아내로 살고 싶다며.
김순자는 2021년 93세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평생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1990년부터 약 2년간 아픈 박고석과 단둘이서 설악산 밑에서 살았던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언제나 이방인 같고 손님 같던 박고석이 누구의 친구도 애인도 아닌, “오롯이 내 남편으로” 김순자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박고석은 이 무렵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고, 산을 오르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그는 아내가 화병에 꽂아놓은 해바라기를 그렸고, 원경의 설악산과 아련한 기억 속의 벚꽃 같은 것을 점점이 그렸다. 이 노년의 작품들에서는 한창 혈기 왕성할 때의 힘찬 붓질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작품이 이상하리만치 슬프고 아름답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먹먹함이 밀려오는 그림이다. ‘다 살아보니, 인생은 눈물 나게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보는 이에게 위로를 전하는 그림이다. 박고석은 그렇게 끝까지 따뜻했다.
‘화가’로서보다 ‘인간’으로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진실한 작품은 없다. 그 사실을 박고석은 평생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해 보이려 했는지 모르겠다.